어쩌다 일정이 없으면 어쩐지 죄책감이 든다

나는 ‘취준생’ 이니까

지난 달 스케쥴을 보았다.

온갖 일정들 – 팀플, 스터디, 자소서 쓰기 등등 –이 빽빽이 들어차있었고, 나는 하나하나씩 해치울 때마다 그 일정들에 하나씩 X 표시를 했다. 팀플 체크. 자소서 쓰기 체크. 내일 스터디 체크. 내일 오후에 취업 연계 교육 체크. 그렇게 빽빽하게 X 표시가 채워진 5월은 너무나도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취업도 안 했는데 뭔가를 열심히 한 것 같았다. 뭘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좋아보였다.

그리고, 이상하게 이번 달에는 뭐가 별로 없었다. 자소서 쓸 것도 별로 없었고, 모임도 별로 없었다. X표시가 거의 없는 스케쥴러를 보며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게을러지는 것 같았다. 취준생 주제에 게을러지다니, 그건 정말 몹쓸 일이다. 어떻게든 채워야 한다. 뭐든지.

어떻게든 다이어리를 채우기 위해 각종 모집 공고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이어리에 채워 넣기 시작했다. 인턴 모집은 15일까지 마감. 어시스턴트 서류 마감은 18일까지. 그리고 저번에 봐뒀던 서포터즈 공고는 21일까지.

인턴 모집....15일까지.... 신입사원 공채....23일.... 면접 스터디는.... 28일....

 

취준생에게 바쁘지 않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취업을 준비한지 반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 성과는 없었다. 남들은 나에게 “취업 준비는 원래 1년 넘게 걸리는 거다, 조급해하지 말아라.” 이런 식의 위로들을 꺼냈지만, 그런 위로들은 전혀 소용없었다.

내 나이 또래의 누군가는 지금 어딘가에서 취업에 성공했을 텐데, 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또래 사람들한테 뒤쳐진다는 게 너무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다. 나만 계속 뒤처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바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내가 나태하다는 증거였다.

바쁘지 않으면 내가 지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비는 시간이 생기면, 그 시간에 내 경쟁자들은 나대신 공부하고 있을 것 같았다. 마치 고3 때 접하던 소위 ‘수험생을 위한 명언 시리즈’를 다시 보는 기분이었다. “내가 잠자는 동안 적들의 책장은 넘어간다”류의 것들 말이다.

자소서를 닥치는 대로 쓰기 시작했다. 게을러지면 안 되니까. 내가 흘려보낸 이 기회가 다시는 안 올 기회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했다. 게을러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취업을 준비하면서 중간에 쉬고 놀기도 한다는 건 죄 짓는 것 같았다.

바쁘지 않다는 건 있을 수가 없어...

게으르지 않으려다 오히려 더 게을러졌다.

점점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무작정 채워 넣은 일 더미는 나를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자소서들은 너무나도 버거웠다. 자소서의 고작 한 문항을 쓰느라 하루를 다 보낸 적도 꽤 있었다. 나중에는 내가 뭘 쓰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여기 썼던 내용을 저기에 다시 쓰고, 저기 썼던 내용을 여기에 다시 썼다. Ctrl C+V를 주구장창 해댔다.

나는 오히려 더 게을러졌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엄청 바빴다. 엄청 바쁘게 살았지만, 딱히 한 건 없었다. 나와 맞는 지 아닌 지도 확실치 않은 회사들에 자소서를 쓰려고 하다 보니, 오히려 더 쓰고 싶지 않아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밀려드는 자소서들 안에서 허우적대느라 정신없었다. 어느날엔 문득 정신 차리고 보니, 에디터 모집용 자소서에 마케팅 얘기를 쓰고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지만, 그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그러자 이젠 한계라고 생각했다.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차는 것 같았다.

조금씩 조금씩 내가 벌려놓은 일들이 내 목을 조르고 압박해왔다. 쓰고 싶지도 않은 자소서들에 파묻혀 휩쓸려버릴 것만 같았다. 내 자신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마치 과 충전 되서 결국 터지는 휴대폰 배터리처럼. 이제는 멈춰야 했다.

이젠 멈춰야 했다. 안 그럼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나도 나만의 ‘스케쥴’이 있으니까요.

싹 다 정리하기로 했다. 다이어리에 빽빽하게 채워놨던 온갖 마감 일정을 지우기 시작했다. 이 기업은 안 돼. 난 이런 데선 일할 수 없어. 이 직무도 안 돼. 어차피 할 줄도 모르는 일들만 요구하잖아. 그렇게 다 정리 하고나니 남은 게 별로 없었다.

그러자 다른 방향으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놓아버린 이 기회들, 이 기회들 중에 날 취직시켜 줄 유일한 기회가 있었다면 어떡하지? 나는 사실 게을러지고 싶어 핑계를 댔던 게 아닐까? 게으름 피우지 않고 좀 더 부지런해지지 않을 핑계를 떠올려 버린 건 아닐까? 좀만 더 참았으면 어차피 다 지나갈 일들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난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만큼, 더 이상은 나에게 무리야.’ 이렇게 인정해버리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요즘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게으르다고,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이라고 해도 한 귀로 흘려듣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조금 불안하다. 사실 좀 많이 불안하다. 남들에게 뒤쳐질 것 같은 불안함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요즘 스스로 되뇌이며 마음을 다잡곤 한다. “나도 나만의 ‘스케쥴’이 있다. 저들은 저들대로 움직일 수 있는 ‘스케쥴’이 있는 것뿐이다. 저들과 나는 그저 다른 거지 누구도 틀린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나는 이제 다시 나만의 스케쥴을 정리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들로만 가득 채운 나의 스케쥴들 말이다.


나만의 것들로 채운 스케쥴을 갖고 싶다. 아무리 절박한 취준생이라도 그 정도는 해야겠다.

 

Tweet about this on TwitterShare on FacebookShare on Google+Pin on PinterestShare on TumblrEmail this to someone
The following two tabs change content below.
박종우

박종우

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좋은 영화를 혼자 보는 것도, 함께 보는 것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