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이 아니꼽습니다

‘소확행’ 그 이상을 꿈꾸면 안 되나요?

옷에 유별나게 예민한 편입니다

구김 있는 셔츠는 절대 입고 나가지 않습니다. 서랍도 마찬가지 입니다. 색깔별, 무늬별로 나란히 개어져 있습니다. 일본의 인기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저와 꽤나 닮은 구석이 있는 모양입니다. 하루키는 잘 다려진 셔츠를 볼 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든다고 했습니다. 이를 ‘소확행’이라 불렀다죠?

막 구운 따끈한 빵을 손으로 뜯어 먹는것, 오후의 햇빛의 나뭇잎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든느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 무라카미 하루키, <랑겔한스섬의 오후>

몽글몽글 피어나는 그 행복의 감정이 무엇인지 공감이 가긴 합니다. 하지만 뭔가 살짝 억울합니다. 잘 다려진 셔츠만을 행복으로 치기에는 많이 아쉽달까요. 제가 너무 욕심이 많은 탓일까요? 아니면 일본 특유의 소소한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욕심을 반으로 줄여 봐도, 일본 감성을 온몸으로 흡수해 봐도, 저도 모르게 ‘소확행’이라는 단어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소소하고 작은 행복이라도 그렇지, 잘 다려진 셔츠만 보고 살아가기엔 세상에 하고 싶은 것이, 누리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데 어디선가 자꾸만 ‘소확행’이 들려옵니다. 특히 저와 같은 청년을 향해서요.

조금 억울합니다. 딱히 지금까지 크게 뭘 누려본 것도 아닌데, 이제 행복까지도 소소하게 느끼라는 것처럼 느껴지곤 하거든요. ‘소확행’이란 친구, 도대체 뭘까요?

소확행이 만들어진 일본의 그 시절은

‘소확행’이란 단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 <랑겔한스 섬의 오후>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이 책은 무려 1986년에 출간 됐는데요, ‘소확행’이란 단어는 만들어진지 30년이 넘은 셈입니다.

당시 일본은 경제 호황을 누리고 있었어요. 88년도 세계 50위 그룹에 일본 기업은 23개나 된 걸 보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능하죠? 바로 이 코카콜라에서 나오는 여유롭고 풍족한 분위기가 80년대 당시 일본의 경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물질적 소비가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던 시대에, 자신만의 정신적 행복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차원에서 ‘소확행’을 이야기 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코카콜라 광고

그리고 30년이 지났습니다. ‘소확행’이 유행하고 있는 한국의 경제상황은 당시의 일본과 판이합니다. 한국의 전년 대비 경제성장률은 3.1%에 못 미쳤습니다. 중소기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청년고용률은 42.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 30위를 기록했고요.

단어가 존재했던 사회적 배경이 다르다보니, ‘소확행’이란 단어도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경우 여러 행복의 형태 중 ‘소확행’을 고를 수 있었던 ‘행복에 대한 선택권’이 있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소확행’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소확행’ 밖에 누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습니다

‘소확행’ 자체에 결함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양한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가운데 작은 행복을 선택하는 것과, 작은 행복만 누릴 수 있는 상황은 분명 다릅니다. 한국 사회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경제 상황이 다르다 보니, ‘소확행’의 의미와 실천방향도 조금 변질됐습니다.

하루키는 정신적이고 자기만족 성향이 강한 행복을 ‘소확행’의 방향으로 봤다면, 한국의 ‘소확행’은 작은 소비로 이뤄지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경향을 기업 마케팅이 선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소확행’ 마케팅은 1인 소비가 많은 2030세대를 주 타깃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맥주, 커피, 셀프 네일처럼 싸고 쉽고 빠르게 소비할 수 있는 품목이 대부분입니다 ⓒ'에비스' CF

결국 ‘소확행’이라는 그럴듯한 철학 속에 ‘작은 소비’가 곧 작은 행복이라는 논리가 만들어집니다. 청년은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조차 해보지 못한 채 ‘작은 소비’에 만족하게 됩니다. ‘소확행’은 일본의 유명 작가가 만든 말이고, ‘행복하자’라는 긍정적 메시지를 듬뿍 담고 있고, TV속 광고에서도 좋은 가치라고 얘기하니까요.

‘달관세대’부터 ‘소확행’까지 : 진짜 청년의 행복은 어디에?

사실 ‘소확행’은 한때 한국을 뜨겁게 달궜던 <조선일보>의 ‘달관세대’론과 매우 비슷합니다. ‘달관세대’란 일본의 사토리세대를 번역한 단어로, 요즘 청년들은 힘든 사회에서 달관하면서 나름 잘 산다는 담론이었습니다. 철저히 어른들의 시각으로 청년 세대를 정의한 단어였죠.

괜찮지 않습니다

‘소확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청년들, 힘들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너희 잘 즐기면서 살고 있잖아. 작은 거에 돈 쓰면서 행복 누리면서 잘 살고 있잖아.’라고 스리슬쩍 청년의 모습을 어른들이 보고 싶은 데로 규정합니다. 청년을 틀 짓고 그들의 욕망을 작은 병에 가둬 더 큰 욕망을 품지 못하도록 규제합니다.

그런데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달관세대’ 담론이 등장 했을 당시엔, ‘달관세대’를 부정하는 여론이 거세게 발동했습니다. 많은 언론에서도 <조선일보>의 ‘달관세대’ 시리즈 기사를 비판하는 글을 실기도 했습니다. 그에 비해 ‘소확행’은 여론이 매우 후하고, 청년 세대조차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소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째 더 교묘하게 스며들고 있는 느낌입니다.

아무래도 달관은 부정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이번 생은 망했으니까 그냥 태어난 김에 살자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 쉽죠.?하지만 ‘소확행’은 다릅니다. 힘든 세상에도 행복을 찾아 자기만족을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도 달관보다는 ‘소확행’이 좋습니다. 적어도 ‘소확행’을 하면, 아무리 청년들 주머니가 가볍다 하더라도 그 중 몇 푼은 털 수 있으니까요.

어느덧 마케팅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소확행'

'소확행' 그 이상을 꿈꾸면 안 되나요?

어쩐지 ‘소확행’ 담론은 청년들에게 더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주 작은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이 청년 세대가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전부라고. 너희들은 안락한 집을 마련하기도,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에도 어차피 그르지 않았냐고. 그러니 불닭볶음면 한 사발에서 행복을 찾으라고 말이죠.

‘소확행’이라는 단어의 등장은 청년들에게 다른 큰 행복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지 못하도록, 아주 작은 곳으로 고개를 고정시켜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큰 행복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작은 행복에 길들이여 버리는 거죠.

‘소확행’ 담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양한 행복을 가지고 싶어 하는 청년 세대의 열망과 요구를 보이지 않게 만든다는 겁니다. 다양한 광고들은 4캔에 만원하는 수입맥주, 예쁜 카페에서 먹는 커피 한잔에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휘발성이 매우 강한 일시적 행복에 가깝습니다.

평생 동안 이런 것들로 행복을 느낄 수는 없잖아요

더 근본적인 행복이 필요합니다. 안정적인 일자리, 든든한 보금자리, 쉴 수 있는 여유시간이 필요합니다. 삶의 기초적인 요소들이 보장받지 못하는 이상, ‘소확행’은 제대로 된 의미를 발현할 수 없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제 행복까지도 소소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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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희

주진희

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아직 방황하는 중.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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