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상욱도 시인이냐고 물으신다면

시대는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다만 적응할 뿐.

조금 다른 시인의 탄생

나는 문예창작학과 에서 문학을 배우고 있다. 입학을 한 지는 이제 막 반년이 넘어가고 있다. 글을 쓰는 곳이어서 그런지 참 많은 낱말을 새로 정의해야만 했다. 시점, 문법, 대화, 인물 같은 것들. 그리고 그중에는 ‘시인’도 있다. 시인에 관해서 내가 아는 단순한 사실은 그들이 하나같이 근사한 사람이라는 것 정도였다. 그들이 만든 문장 안에서는 별것 아닌 단어들도 제각각의 깊이를 가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시를 읽고 엄숙해지거나 종종 소리 내서 우는 일을 기꺼이 납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지금도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시는 시인 선생님들께 수업을 들으면서, 시인을 꿈꾸는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시인의 조건 같은 것들에 대해 들으면서 시인을 새로 정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시인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제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유명 출판사나 신춘문예에서 등단을 해야만 하며, 한 해에 등단한 시인 중에 살아남는 시인은 겨우 한두 명 정도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 무렵 SNS에서는 하상욱이라는 사람의 시가 유행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를 ‘SNS 시인’이라고 불렀다. 인터넷에서 크게 화제를 몬 그의 작품은 이를테면 아래와 같다.

 

너의 진짜 모습
나의 진짜 모습
사라졌어

하상욱, <포토샵>

 

그의 영향력은 SNS를 넘어 미디어로까지 퍼지더니 문예창작과 학생은 물론, 이제는 누구나 그의 이름을 안다. 사람들은 2012년에 데뷔한 하상욱은 알아도 같은 해에 등단한 시인들의 이름은 잘 모른다.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하상욱의 시는 시인다운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다기엔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시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유명 출판사나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2014년에도 그의 인기는 식을 줄은 모른다.

나는 그를 시인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반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시인이 된다는 게, 시를 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체험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는 너무 쉽고 가벼워 보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를 시인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알던 문학은 무엇이었나

내가 그를 시인이라고 부르게 된 데는 그렇게 큰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시와 조우했던 최초의 순간. 본격적으로 문학을 배우기 이전에 내가 알았던 시인의 모습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 제시한 ‘포토샵’ 이라는 시처럼 하상욱의 초기 시는 공감과 동질의식을 목적으로 한 유머 위주의 시들이었다. 지금은 시의 분위기가 많이 다양해져서 가끔 사랑이나 이별을 다룬 시들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엄숙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이를테면 아래와 같은 시가 그러하다.

 

혼자 있는 거 싫다
혼자 잊는 거 싫다

하상욱, <싫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멸망한 정형시의 문법을 충실하게 따른다. 어려운 단어가 없고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을 법한 소재라는 점에서 새로운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의 시에 열광하는데, 언뜻 보기에는 단순해 보여도 읽는 순간 저마다의 기억이 직관적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내가 문예창작학과에 와서 시에 대한 편견이 깨진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하상욱을 보고 시에 대한 막연한 편견이 깨졌다. 여기서 발생한 충격은 하상욱에 그치지 않는다. 하상욱과는 다른 스타일로 시를 쓰는 ‘어보시집의 최대호 시인, 직접 붓으로 쓴 시를 페이스북에 올려 얼마 전 전시회를 갖기도 한 김주대 시인은 현재 모두 나름이 인기를 바탕으로 각자의 시집을 출간한 상태다.

이들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아주 간단한 인식. 즉, 시란 누구나 쓸 수 있고 또 쉽게 쓸 수 있다는 인식은 그들의 시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널리 퍼져 이제는 심심찮게 글을 적는 비전공자 친구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시에 대해 그들이 느낀 흥미는 기존의 시집들로까지 옮겨 갈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나는 이제 ‘하상욱’으로 대표되는 이른 바 SNS 문인들에게서 문학의 가능성, 더 나아가서는 아날로그 예술의 부활을 기대하게 된다.

가자, 다시 아날로그로

사람들은 매체와 예술을 눈으로만 보지 않고 모든 감각을 동원해 체험한다. 영화는 그 같은 변화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매체다. 단순히 보여주고 들려주던 시절에서 벗어나 3D, 4D로까지 체험 환경을 확장해 나아간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가 한 번에 전송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해보면, 아날로그 매체와 예술이 외면 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같은 경험이라면 사람들은 훨씬 더 풍부한 감각을 동원한 다양한 것을 느끼고 싶어 하니까.

이 같은 위기를 맞은 건 문학 뿐만이 아니다. 다른 예술 또한 같은 이유로 인해 위기에 처했다. 단일한 매체에서 표현되는 예술은 그만큼의 집중을 요구하는 법이라 일정 수준 이상의 배경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디지털적인 SNS라는 공간에서 복고 예술들은 옛 영광을 어느 정도 회복해간다. 문학은 앞서 소개한 SNS 시인들, 만화는 ‘재수의 연습장’ 과 같은, 음악은 ‘클래식에 미치다’ 와 같이 조금씩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하고 있다.

이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예술이란 크게 어려운 게 아니라는 걸 내세우고 있다는 점. 그들은 배경지식을 요구하지도 않고 단지 예술이 줄 수 있는 심플하지만 가장 선명한 감동만을 꾸준히 만들어 나간다. 당신이 예술과 최초로 조우했던 그때의 기억처럼 말이다.

나는 여전히 ‘시인’에 대해 올바른 정의를 내릴 수 없다. 등단을 준비 중인 친구들 앞에서 하상욱이나 다른 SNS 시인들을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가끔은 망설여진다. 그러나 그들이 같은 수단을 가지고 사람들에게서 큰 반응을 얻어내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결국 예술이 지향하는 곳은 사람이다. 그런 예술이 어렵다는 이유로 사람에게 외면 받는 시기를 살고 싶지는 않다.

SNS 시대의 예술가들이 사라졌다고 생각되었던 아날로그의 감동을 여기 이 자리로 다시 불러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부디 내가 발견한 가능성이 한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예술의 재발견까지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가급적 많은 이들이 아날로그 예술의 가치를 알아가기를. 그러다 보면 언젠가 예술이 누군가를 구원한 것처럼 예술도 사람들에게 구원 받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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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원

신종원

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지금은 우리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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