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추억을 싣고

이토록 컨텐츠가 빨리 소모되는 세상에서 내 추억은 거기 남아 있기를.

오래 가는 게임의 비결

<메이플스토리2>가 얼마 전 알파 테스트를 마쳤다. 테스트 기간에 알파 테스터들이 업로드한 게임 플레이 동영상과 스크린샷, 그리고 여러 정보나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모음집을 보면서 새삼 10년의 세월을 실감했다.

네티즌들 솨라있네 ⓒ전자신문

간만에 네티즌들 솨라있네 ⓒ전자신문

그러나 메이플스토리2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리스 항구, 헤네시스, 페리온, 엘리니아, 커닝시티…. 전작에서 각 직업의 상징이기도 했던 이 마을들은 단순히 전직과 승급을 위한 장소만은 아니었다. 리스 항구의 하얀 석조 건물들을 나는 처음이나 시작이라는 단어로 추억할 수 있다.

어떻게든 10레벨을 찍어보겠다고 달팽이, 슬라임, 돼지들과 다투고 겨루던 일들이 떠오른다. 헤네시스의 마을 입구와 시장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많아서 돈이 없는 초보자들이나 발가벗은 거지들이 메소를 구걸하기도 했었다. 메마른 황야이자 전사들의 고향인 페리온을 생각하면 돼지와 함께 춤을, 주먹 펴고 일어서 같은 이름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3D로 보면 감회가 새롭다 ⓒ전자신문

숲에 지어진 마을인 엘리니아는 그 신비로운 분위기 밑에 어딘가 수상쩍은 기운들을 감추고 있었다. 아르웬의 잃어버린 유리 구두를 찾아주려고 고생했던 기억도 난다. 무법자들의 도시인 커닝시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공간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어서 오히려 무섭고 낯설었다.

도시 주변의 공사장, 도시 아래의 지하철…. 어둡고 외진 곳마다 무섭게 생긴 몬스터들이 나타나 다른 마을에 비해 현실적이고 두려운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개미굴. 몬스터와 싸우다 죽어서 슬리피우드로 돌아오면 꼭 목욕탕에서 쉬어 줘야 했다. 그 장소 특유의 몽환적인 BGM을 들으면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평화로워지기도 했다.

메이플스토리2에서도 이런 지역들이 그대로 등장한다는 걸 단지 마케팅 전략으로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메이플스토리2의 개발진은 게임이 오래 가는 방법을 꿰뚫어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 만들어서 내놓는 건 개발자의 몫이지만, 그 게임의 정체성을 만드는 건 유저의 몫이다. 게임 안에 생긴 유저들의 역사를 존중하는 일. 오래 가는 게임의 비결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게임 안에 숨겨둔 타임캡슐

2003년, 그러니까 정확히는 11년 전에 만들어진 게임이 발전된 그래픽과 게임 시스템으로 새롭게 나타나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또한 희귀한 일만은 아니다. 세기말에 PC방을 점령했던 두 거인, 블리자드에서 개발한 <디아블로>와 <스타크래프트>는 지금 <디아블로3>, <스타크래프트2>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또 <워크래프트> 시리즈에서 세계관을 빌려온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는 내년이면 벌써 10주년을 맞는다. 이들에게도 공통점이 있다면 게임의 개발과 그 안에서 유저들이 만들어온 역사들이 그대로 다음 시리즈로 전승되었다는 점이다.

확 변한 포토샵 기술이 세월을 실감케 한다. ⓒBlizzard

확 변한 포토샵 기술이 세월을 실감케 한다. ⓒBlizzard

<스타크래프트>에서 우리가 짐 레이너, 사라 캐리건, 제라툴과 함께 치른 전투들은 <스타크래프트2>의 역사가 되었다. 세계의 운명을 걸고 악마들과 싸워 얻은 성과는 <디아블로3>의 세계관 자체가 되었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매 확장팩마다 우리에게 친숙했던 주인공들을 우리 앞에 적으로서 내세운다. 아서스의 죽음을 지켜보며 가슴 미어지지 않은 와우저가 있을까.

그런데 엊그제 <드레노어의 전쟁군주>라는 확장팩이 발매됐다. 이제 <워크래프트2>에서 우리가 조종했던 오크 전쟁군주들과 싸우게 된다고 하니, 블리자드는 그야말로 유저들과 함께 게임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같은 사례가 해외에만 있는 건 물론 아니다. <리니지> 시리즈를 만들어 배급하는 NC소프트는 ‘옛날 감성’을 주창하며 계속해서 옛 컨텐츠에서 새 컨텐츠를 얻어오고 있으며, 넥슨은 <크레이지 아케이드>의 캐릭터들을 다른 게임에도 등장시키는 등 <바람의 나라>에서 얻은 장수 게임의 노하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질문이 나올 때도 됐다.

우리는 왜 새 게임보다 오래된 게임을 좋아하는가.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라 몰입이 잘 될 것 같아서? 난생 처음 보는 게임보다 조금이나마 친숙한 게임에 정이 가서? 모두 맞는 말이지만 나는 그 게임들이 우리의 과거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영웅의 귀환

갈수록 컨텐츠의 소모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이것은 곧 물건이 됐든 서비스가 됐든 그것을 사용하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의미와 같다. 당장 6개월마다 핸드폰을 바꾸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사용해온 핸드폰들을 추억하며 그걸 사용하던 때의 자신을 떠올릴 수 있을까.

ⓒtorchbrowser

과거로 돌아가 보자. 디아블로와 스타크래프트와 워크래프트와 메이플스토리와 크레이지 아케이드 같은 이름들이 지배하던 시절로. 사실 그 게임들이 특별한 건 아니었다. 수준으로만 놓고 보면 요즘 나오는 게임들이 그래픽도 좋고 접근하기도 쉽고 모든 면에서 훨씬 친절하다.

그러나 그 게임들에는 ‘그때 그 게임을 하던 나’가 있다. 그러니까 지금보다 10년, 혹은 좀 더 어린 나를 그 게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순간이 사진으로 남는 것은 아니며, 뇌는 매일매일 필요 없는 이미지들을 지워버린다. 누군가 망각은 신이 준 선물이라고 했지만 바로 그 선물 때문에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잃어버렸다. 있는 기억들마저도 온전하지 않다. 기억이 왜곡되기 쉽다는 학자들의 말을 듣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그 게임들, 내가 어렸을 때 즐겨했던 게임들 안에는 내가 있다. 타임캡슐은 코프룰루 구역에, 성역에, 아제로스에, 고구려와 부여에, 에린에, 빅토리아 아일랜드에 조각조각 묻혀 있다. 10년이나 지나서 이제는 늙었다는 말까지 듣는 게임들이 계속해서 혁신을 거듭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이유를 유저들의 타임캡슐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해보는 건 너무 큰 비약일까.

우리가 접속하지 않는 동안에도 위협은 꾸준히 진행되었을 것이다. 게임들은 게임 안에서는 세계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악당들과 싸우고 있었고, 게임 밖에서는 이익이 나지 않는다는 경영진을 설득하기 위해 스스로의 쓸모를 증명했을 것이다. 우리가 그 세계를 떠나있던 동안에도.

ⓒbodnara

ⓒbodnara

그렇다면 다가올 새로운 위협으로부터 한 번쯤은 되돌아가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느 게임으로 돌아가든 당신은 어디에서나 영웅이고 세계는 언제나 당신을 반겨줄 것이다. 배신자들과 악당들과 마왕들과 싸워 이기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과거가 있다.

똑같은 쾌감을 느꼈던 10년 전의 우리가. 자기소개서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과장과 거짓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 때문에 차마 외면당했던 어린 시절이.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들이 바로 거기에 있고, 당신이 돌아오는 순간과 함께 세계는 다시 한 번 변화를 준비할 것이다.

 

* 현재 메이플스토리 2는 알파테스트중이며, 원조 메이플 여전히 서비스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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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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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지금은 우리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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