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제창을 거부한 축구선수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정치 분쟁이나 살해 협박이었다.

보통 축구라고 하면 국가를 생각하잖아?

축구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중 하나다. FIFA 월드컵은 단일 종목 대회 중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프로리그를 보유한 종목이기도 하다.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월드컵 시즌만 되면 전 세계는 공 하나에 열광하며, 각국은 여야 정쟁마저 중단하고 하나 되는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한다.

코트디부아르에서는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내전이 중단되기도 했다. 역시 드록신!

그러나 본래 축구는 내셔널리즘이 아주 전투적으로 표출되는 스포츠다. 현대에 들어 클럽 축구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축구 국가대항전은 국가 간 대리전의 양상을 강하게 띠며 많은 이들을 흥분케 한다. 프랑스와 독일의 축구 경기가 경기의 수준을 떠나 화제가 되는 이유는, 2차 대전 이후 또 하나의 대리전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사실 멀리서 찾아볼 것도 없다. 축구 한일전을 볼 때마다 전 국민이 항일 독립투사가 되는 모습은 축구가 일종의 대리전임을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전쟁 전 병사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듯, 축구에서도 경기 전 유사한 의례를 치른다. 바로 국가(國歌, National Anthem) 제창이다. 경기 전, 엄숙한 분위기에서 국가를 제창하며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승부욕을 고취시키는 것이다. 비단 선수들뿐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관중들까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부르며 ‘국가(國家)’라는 소속감과, 그 소속감이 주는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낀다. 그리고 이 의식은 ‘경건한 것’,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 의식에 성실히 참여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불온한 자나, 애국심이 부족한 자로 평가된다.

다음 중 나머지 넷과 다른 하나를 고르시오 ⓒ이투데이

월드컵을 앞둔 지난 5월, 한창 월드컵을 앞두고 한반도가 달아오르던 때 벌어진 튀니지와의 축구 평가전에서 기성용의 왼손 경례 논란은 이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물론 기성용의 실수였고, 본인도 이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사과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모독했다”, “애국심이 부족하니 국가대표 엔트리에서 제외해야 한다” 등의 여론이 빗발쳤다. 아무리 그의 SNS 논란 등 그전의 미운털까지 박혔다 해도,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여기, 국가 제창을 ‘실수’도 아니고 ‘거부’한 선수들이 있다.

 

난 딱히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서

지금은 호돈신이 되어버린 호나우도가 떠오르는 브라질의 샛별이었고, 아저씨인 줄 알았던 지네딘 지단이 26세였으며, 히딩크 선생께서 친히 한국을 5:0으로 영혼까지 탈탈 털어주시던 98 프랑스 월드컵을 기억하는가. 그 해 월드컵 우승은 세계 최강 브라질을 결승전에서 3:0으로 완파한 개최국 프랑스의 몫이었다. 과연 그들의 우승은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까?

당시 프랑스 대표팀은 유럽에서도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대표 선수로 발탁해 기용하는 대표적인 팀이었다. 아르헨티나계인 트레제게, 서인도제도의 과들루프계인 티에리 앙리, 세네갈계인 비에이라, 알제리계인 지네딘 지단 등 프랑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대부분의 선수들은 이민자나 식민지 출신이었다.


1998년 월드컵 프랑스 대표팀. 입을 다물고 있는 선수들을 찾아보자.

이들 중에는 ‘당돌하게도’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 제창을 거부한 선수들이 있었다. 아트사커의 지휘자이자, 프랑스 축구의 핵심인 지네딘 지단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지단은 종교적 이유로, 그리고 알제리를 식민지화 했던 프랑스 군대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이유로 국가 제창을 거부했다.

주전은 아니었지만, 당시 프랑스 대표팀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4경기에 출장하며 우승에 살림꾼 역할을 했던 선수가 있었다. 지금은 뉴칼레도니아라는 관광지로 더 유명한 누벨 칼레도니의 토착 원주민 ‘카낙’의 후손인 크리스티앙 카랑뵈다.

Christian Karembeu

1931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파리 국제 식민지 박람회(Exposition coloniale internationale Paris 1931)가 열리고 있었다. 이 국제 식민지 박람회에 ‘식인종’이라는 제목으로 ‘전시 된’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박람회에서 전시된 것도 모자라, 박람회에 함께 전시될 예정이었던 악어가 죽자 독일 써커스단의 악어와 교환되기까지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프랑스에서 겪은 갖은 수모를 잊지 못한 채 여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만 했다. 그의 이름은 윌리 카랑뵈. 프랑스 국가대표 축구선수 크리스티앙 카랑뵈의 증조할아버지였다. 프랑스 월드컵 전 이 사실을 알게 된 카랑뵈는 지네딘 지단과 함께 라 마르세예즈 제창을 거부하는 대열에 함께 섰다.

그러나 자유, 평등, 우애의 나라라던 프랑스에도, ‘위대한 프랑스’를 하나로 만드는 데 도움도 되지 않고 자신들과 피 한 방울 나눈 적 없는 이민자·식민지 출신 국가대표들의 국가제창 거부를 마뜩찮게 바라보는 이들은 있었다. 96년 EURO 대회에서부터 프랑스 대표팀을 비난해왔던 이들은 프랑스의 극우세력인 국민전선(FN)이었다. 물론 월드컵 결승전에서 이탈리아의 마테라찌를 박치기로 받아버리고 퇴장당할 정도로 한 성깔(?)하는 지단과 친구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은퇴 뒤에도 대선에서 국민전선의 대표인 르펜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反 르펜 전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사람이 장 마리 르펜이다. 자긴 축구에 관심이 없다나 뭐라나

이처럼 유럽의 이민자나 식민지 출신 선수들 중에는 국가 제창을 거부하는 선수들이 꽤 있다. 2002 월드컵 전까지 게르만 순혈주의를 고수해왔던 독일대표팀의 터키 이민자 3세 메수트 외질이나, 폴란드 출신 골잡이 포돌스키 역시 독일의 국가 제창에 참여하지 않으며, 프랑스에서도 여전히 공격수 카림 벤제마가 국가 제창을 거부하고 있다.

 

난 그냥 국가 제창이 싫어

응답하라 1997에도 나올 정도로 명승부로 기억되는 한·일전이 있다. 이민성의 기적 같은 중거리 슛으로 역전승을 거두었던 98 프랑스 월드컵 예선 도쿄대첩 경기다. 그러나 꼬마 축구광이었던 나에게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잠실 운동장에서 열렸던 리턴 매치가 더 기억에 남는다. 한국은 이미 월드컵 진출이 확정되어 있었지만, 일본과의 경기이기에 필사적으로 경기에 임했다. 하지만 일본은 그런 한국을 2:0으로 가뿐하게 이기고 월드컵 진출의 희망을 이어갈 수 있었다. 골을 넣지는 못했지만, 세련된 기술로 한국의 강력한 압박 수비를 떨쳐내던 선수가 있었으니, 나카타 히데토시다.

Hidetoshi Nakata in Okinawa.jpg

안녕? 난 히데토시라고 해

나카타 히데토시는 열여덟 살에 데뷔하여, 어린 나이에 일본 국가대표의 에이스로 우뚝 섰다. 그의 탈(脫)압박, 자로 잰 듯한 킬 패스, 정확한 중거리 슈팅은 일본 열도, 아니 투박한 축구에만 익숙했던 전아시아를 충격으로 몰아갔다. 그의 화려한 플레이(+간지 외모)에 한국인들조차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98 프랑스 월드컵 이후 전 세계에 자신의 능력을 알린 나카타는 당시 세계 최고의 리그인 이탈리아 세리에A 페루지아(안정환을 날려버린 그 팀!)로 이적했고, 데뷔전에서 세계적 명문 유벤투스를 상대로 두 골을 몰아치며 자신의 진가를 입증했다. 이후 나카타는 AS로마, 파르마, 피오렌티나 등 이탈리아의 명문구단을 거치다가, 다른 선수들은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29세에 ‘축구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인생에는 많은 길이 있다.’며 홀연히 은퇴를 선언하고 환경운동에 뛰어든다. 박지성이 맨유에 입단하기 전까지, 그는 유럽 무대에서 가장 성공한 아시아 선수였다.

신문 기사 제목은 “현대 기인열전 ③ 일본의 튀는 대표”.

‘탈아시아’를 그리도 염원했던 일본인들 앞에 진짜 탈아시아급 선수가 등장했을 때, 일본인들은 그가 일본의 자랑이 되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기미가요를 제창하는 장면에서 일본인들은 뜨악할 수밖에 없었다. 기미가요가 연주되는 동안 꽤나 ‘불손한’ 자세로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딴청 피우는 모습이 잡힌 것이다. 톡톡 튀는 그의 스타일은 비단 축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나카타는 이에 대해 “경기 전에는 주로 기분이 고양되는 노래를 듣는다. 그런 의미에서 기미가요는 경기 전에 듣기에 적절하지 않은 노래다.”라는 인터뷰로 일본 열도에 또 다른 충격을 선사했다. (이 인터뷰는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오프더레코드로 발언한 것인데, 기자가 제목을 자극적으로 뽑아 대대적으로 보도해버렸다.) 나카타는 이후 일본 내 극우 단체들에게 살해 협박까지 받을 정도로 시달려야만 했다.

지난 5월에 브라질 월드컵 필승 기원 행사에도 참가했던 나카다 씨. 일본과 축구를 사랑하는 일본인이지만, 여전히 극소수 우익들은 그를 향한 비난과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asahi.com

 

이젠 축구라고 했을 때 사람이 생각났으면

세계인권선언 제 18조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 또는 신념을 바꿀 자유와 선교, 행사, 예배 및 의식에 있어서 단독 또는 타인과 공동하여 공적 또는 사적으로 종교나 신념을 표명할 자유를 포함한다.

애국심을 가지고 스포츠에 임하는 것이 더 짜릿할 수도 있다. 경기 전의 국가제창이 주는 그 알 수 없는 전율이 국가대항전의 묘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축구 경기일 뿐이고, 그 축구경기에서 내 애국심을 증명 받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내 머릿속 생각을 증명 받아야 하는 일은 언제나 불편하고 불쾌하다. 세계인권선언은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 권리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제시하며 이를 ‘표명할 자유’를 선언하고 있다. 이는 곧, 나의 신념을 ‘표현하지 않을 자유’를 포함하는 것이다.

나아가, 국가 제창이 주는 전율 자체가 내포한 위험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짜릿한 전율이 주는 소속감은 누군가에게는 배제와 폭력으로 작동할 수도 있고, 내부의 많은 갈등 지점을 봉합해버리는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어쩌면 지단이, 카랑뵈가, 나카타가 묻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왜 그런 전율을 국가 제창으로 느껴야 하는 거냐고. 우리가 지금 여기에 축구 즐기러 모였지 나라 사랑 깨닫기 위해 모였느냐고. 국가 제창만 생략하게 해 주면 정말 짜릿하게 경기 뛸 자신이 있는데, 그래도 내가 꼭 그걸 불러야 되겠느냐고.

우리는 과연 이 물음에 답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까.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경기에서 국가 제창을, 실수가 아니라 고의로, 아주 당당하게 거부하는 선수가 나타난다면 ―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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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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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흑석동을 좋아하는 밥버러지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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