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개러지밴드’처럼 아주 쉬운 걸 쥐고 있을 것

제 1탄, 가장 쉬운 음악 제작 툴을 쥐고 있는 야마가타 트윅스터.

기획의도: 가장 날카로운 ‘소지품’을 생각하자

2017년 새해 초입이니까 해 보는 이야기. 여러분 혹시 ‘죽창드립’이 올해로 3살이 되었다고 한다면 믿으시겠는가? 놀랍게도 사실이라고 한다. “죽창이 필요하다… 아주 날카로운 죽창이!!”라는 유행어는 지난 몇 년 동안 격하게 불붙어 올라온 ‘헬조선 담론’의 한 축을 담당하던 중요한 키워드였으나, 2016년 후반의 어처구니없는 해프닝들 이후로는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져 갔다.

이게 나라냐 피켓

그도 그럴 게, 이제 사람들은 무슨 신조어를 붙일 생각도, 어떤 반응을 어떻게 하고 싶다는 의지도 일으킬 수 없이 “이게 나라냐”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중도일보

죽창드립이 잊혀지지 않았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사람이든 구조든 뭔가 실제로 있는 것에 대항하고 싶다는 생각을 아주 어렴풋이나마 하고 있었고, 그때 마지막으로 찾아낸 대책이 ‘죽창’이었다. 물론 그때도 지금도, 그것은 진지한 의미에서의 대책은 아니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일반인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처량하게 들어 보는 무기,?우리는 그런 걸 연상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죽창”이 단지 그뿐이 아니라면? 우리가 각자의 생활에서 구할 수 있고 항상 내 것으로 갖고 있을 수 있는 것, 그 중 가장 묵직하고 강력한 어떤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면?어떨까? 요컨대, 각자의 가장 날카로운 소지품인 것이다.?그런 간소하고 강력한 비장의 무기를 ‘죽창’이라 부른다면, 죽창드립은 확실히 조금 다른 얘기가 된다. 실제로, 적지 않은 역사의 장면이 바로 그런 생각으로 바뀌어 왔다.

Adbusters Occupy Wall Street Poster Bring Tent

월가점거 시위에는 딱 하나의 행동 지침이 있었다. “텐트를 가져오세요.” ⓒ 애드버스터 재단

그래서 총 5화의 탐구 인터뷰를 준비했다. 각자의 생업과 취미와 삶에서 자기만의 ‘죽창’을 단단히 쥐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고 여전히 지옥은 계속될 것이라는 무기력감과 절망감 때문에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면, 이제는 당신도 찾아보면 어떨까. 이 난세에 무엇을 들고 있어야 할지. 당신이 쥐고 있을 수 있는 구체적인 수단 중, 무엇이 가장 날카롭게 세상을 깨뜨릴 수 있을지 말이다.

이를테면,
이제부터 소개할 음악가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항상 들고 다니는,
“개러지밴드”처럼 쉬운 뭔가를 말이다.

야마가타 트윅스터 맥북에어

한받 (42)

- (전) 아마츄어증폭기, (현) 야마가타 트윅스터
- 두리반 철거 반대투쟁, 두물머리 행정대집행 반대투쟁, 베를린 세월호 추모공연 등 다수 현장 참여
- 2011년 ‘자립음악생산자조합’ 창립, ‘뉴타운컬쳐파티’ 공동기획
- 2009년 GQ ‘올해의 남자’ 선정, 2012년 EBS 스페이스공감 공연

 

“댄스음악이 너무 쉽게 만들어지는 거라”

그는 대학 축제와 음악 페스티벌에서도 공연하지만, ‘테이크아웃드로잉 퇴거 반대’ 모임이나 두물머리 행정대집행 반대투쟁 등 다양한 “투쟁 현장”에서 신스팝 음악을 틀어놓고 다같이 즐길 때가 더 많다.

그는 다소 민망한 춤을 추는 퍼포먼스를 하고, 파격적인 복장을 끊임없이 갈아입으며, 관객에게 손가락질이나 명령을 하고, 뜬금없이 모두를 이끌어 정해진 공연 장소를 이탈해 어디론가 떠난다. 음악 작곡 및 연주를 맡은 그의 노트북을 끌고.

어진

이 노트북이 야마가타 트윅스터에 합류한 지가 얼마나 됐죠?

한받

(노트북으로 음악 한 것은) 2005년부터 했어요. 기계는 계속 바꾸면서. 맨 처음에 했던 거는 아이북(iBook)이라고 있었어요. 그 중에 ‘흰둥이’라고 플라스틱으로 된 걸 쓰다가 그 다음에 파워북으로 바꿨어요. 그게 좀더 사양이 높은 거죠. 그러다가 개러지밴드가 계속 멈추니까 그 다음에 바꾼 게 맥북프로. 그런데 (맥북프로는) 너무 무거워. 그래서 2010년에 지금의 맥북에어로 바꿨습니다. (앞에 놓은 노트북을 툭툭 치며) 이 친구는 2010년부터 계속.

어진

지금 같이 하고 있는 이 친구는 이제 야마가타 트윅스터에 적응을 좀 했나요?

한받

아하, 네. 완벽한 파트너. (웃음)

어진

‘아마츄어증폭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실 때는 기타로 시작하셨거든요. 그러던 분이 지금의 전자음악으로 바뀐 건 사실 큰 변화란 말이죠. 어떤 계기랄까 변화가 있었나요?

한받

아마츄어증폭기로 녹음을 하고 음반을 만들 때는 PC로 했지 맥은 생각을 전혀 못 했어요. 매킨토시 컴퓨터를 처음 접한 것은 2003년에 한예종 편집실에서였고요. 거기는 모든 시스템이 맥인데, 거기서 iMac을 접하고 이게 PC보다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점이 있어서 저도 아이북을 구매했던 거고, 아이맥을 구매하니까 거기 개러지밴드 프로그램이 깔려 있더라고.

어진

네.

한받

그래서 어 이게 뭐지? 하면서 혼자 가지고 놀다 보니까 이게 너무 재밌는 거에요. 개러지밴드로 특히 댄스음악을 너무나 쉽게 만들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 안에 숨어 있던 땐스 본능, 그게 다시 가동되기 시작을 했죠. 고등학교 시절부터 춤추는 걸 좋아해가지고 순수하게 춤 추러 클럽도 다니고 했던 과거가 있어서.

어진

(웃음)

야마가타 트윅스터 개러지밴드

한받

그래서 개러지밴드를 가지고 놀면서, ‘이걸 틀어놓고 춤추기에 진짜 좋다’라는 걸 깨닫고 (웃음) 그게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시작한 모습이었고.

어진

되게 우연한 기회였네요.

한받

그렇죠. 그렇게 혼자 재밌게 놀고 있다가 이걸 밖으로 뽑아내준 친구가 있었어요. 한예종에 영상이론과 학생 중에 유병서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학교 안에서 여러 파티를 많이 기획했어요. 아마츄어증폭기도 와서 강의실 같은 데서 (그런 파티에서 공연)하고 그랬었는데, 저보고 ‘아 이번에는 한받 씨가 DJ를 해 보면 어떻겠느냐’ 해서

어진

그분도 한받님이 댄스음악을 한다는 정황은 미리 알았나 보네요.

한받

그럴까요? (웃음) 아무튼?그래서 ‘아, 하면 재미있겠다’ 하고 수락했는데, DJ를 하려면 이름이 필요하잖아요. 그때 떠올랐던 게 야마가타 트윅스터라는 장난스런 이름.

어진

데뷔가 그때인 셈이고요.

한받

그렇죠.

어진

당시 반응은 어땠나요?

한받

딱 그 파티 때는 잘 기억이 안 나고, 2005년 가을에 한예종 가을 축제 때 학생들 주점하는 옆에서 잠깐 DJ를 했었거든요. 그때 반응 좋았죠. 학생들이 흥겨워하고 그래서, ‘아, 이거 잘하면 되겠다.’

어진

(웃음) 뭐가 잘 된다는 건가요?

한받

(상업적으로) 공연을 할 수 있겠다 하는 건 아니고, 학생들 사람들과 재미있게 즐길 수 있겠다 이 정도까지 생각했었죠. 재미 삼아.

어진

혹시 음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간단히 여쭤볼 수 있을까요?

한받

음악은 지금도, 여기 (노트북을 툭 치며) 있는 개러지밴드를 120% 활용해서. (웃음)

어진

120%요? (웃음)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냥 노트북을 열고 프로그램을 켜서 프로젝트를 열고 소프트웨어 악기를 몇 개 선택해 자판을 누르는 게 전부다. 그가 이렇게 하면 되는 거라고 즉석에서 시범을 보이며 들려준 비트는, 그전까지 야마가타 트윅스터의 이름으로 들어본 것이 아니었다. 이미 “신곡”이 하나 새로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진

지금 신곡을 만들고 있는 거잖아요. (웃음)

한받

그런 거죠. 근데 이 코드 진행은 제가 하도 많이 써서. (웃음)

 

보다 보니 발견한 것, “돈만 아는 저질”

그는 보통 철저한 운동권 아티스트로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계기가?두리반?철거 반대 투쟁 연대였고, 지금도 그는 여러 집회와 문화제에서 유쾌한 공연 순서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의 계기는 그다지 수상하거나 이념 편향적이지 않았다. 그냥 ‘이런 음악’을 받아줄 공연장을 찾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게 된 것들이 있었고, 그 여정의 끝에서 탄생한 것이 “돈만 아는 저질”이라는 희대의 명곡이었던 것이다.

한받

그때 (한예종 공연) 이후로 야마가타 트윅스터를 잊지 못하는 분들이 있어서, 그거 한 번 더 하자 (웃음) 하고 작은 바 같은 곳에서 불러 주셔서 공연한 적이 몇 번 있었죠. 저도 큰 기대 없었고 보는 사람들도 큰 기대 없었는데, 둘 다 너무 재밌는 거에요. 그래서 ‘야마가타 트윅스터로 계속 활동해도 괜찮겠다’ 했죠.

그게 2008년쯤이었어요. 그런데 다만 그때까지는 야마가타 트윅스터로 활동을 하긴 했지만 아주 활발하게 한 건 아니었고, 아는 사람이 불러주면 가서 하고 그런 정도로. 중국 공연도 초대받고, 전태일 금요거리공연도 초대를 받아서 매주 가서 하고요.

어진

전태일 금요공연이요?

한받

전태일 동상이 있는 평화시장 앞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전태일의 정신을 기리면서 라이브 공연을 하시는 분들이 있거든요. 거기 초대를 받아서, 저는 다른 데 공연할 데도 별로 없고 하니까 거기서 금요일마다 많이 했어요. 그때 뭔가 뼈저린 걸 많이 느꼈어요.

어진

예를 들면?

한받

예를 들면, 홍대앞만 벗어나도 이건 정말 ‘듣보잡’이고 정말 무명 가수고, 이러한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고. 그 다음에 한편으로는 받은 느낌이 있는데, 전태일의 민중성 같은 것들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됐죠. 어떻게 보면 단련하듯이.

야마가타 트윅스터 전태일거리 금요문화공연

2009년에 활발하게 열렸던 전태일거리 금요문화공연은 전복적인 예술가들이 많이 참가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야마가타 트윅스터의 공연 모습. ⓒ칼라TV

어진

수련하듯이?

한받

수련하듯이 공연을 해 왔지요. 그러다가 두리반 사태가 터지면서, 이제는 ‘홍대앞에서마저 용산 참사 같은 일이 일어나면 안 되겠구나’ 해서 거기 들어갔던 거죠. 현장에 많이 연대, 투쟁하게 된 건 그때부터죠.

어진

‘돈만 아는 저질’이 언제쯤 어떻게 나왔죠?

한받

그게 두리반이잖아요. (웃음)

어진

아 맞다 그랬죠. (웃음) 에피소드가 많다고 들었어요.

한받

이것도 참 재밌는 건데, 아마츄어증폭기 때만 하더라도 제가 경험한 것, 제가 체험한 것을 그대로 노래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어진

자기 위주.

한받

예. 근데 야마가타 트윅스터로 노래 만들 때는 내 안에서 출발한다기보다는 바깥에서 들어오는 그런 이야기가 많았어요. ‘돈만 아는 저질’도 그런 경우였고, 시작이 두리반이었던 건 아니었죠.

어진

네. 수유시장에서 처음 접한 노래를 샘플링하셨다고.

한받

그렇죠. 제가 강북 수유시장에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하나로 수유시장 상인들의 애창곡을 조사했거든요. 거기서 ‘돈만 아는 저질’의 샘플이 되는 “동숙의 노래”(문주란)를 우연히 알게 됐고, 그 노래를 가지고 샘플링을 하면서 원래는 수유시장 상인들을 위한 수유시장가를 만들려고 시도하다가… “저질”이란 부분이 반복이 되잖아요? 하필 또 그 당시 제가 동시에 두리반을 연대하고 있었거든요.

어진

예.

한받

그래서 ‘아 이건 두리반을 위한 노래가 돼야겠구나’ 했죠. 저질이란 말을 반복하면서, 돈만 아는 저질들을 향해 날릴 수 있는 그런 노래. 두리반에서 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두리반에서 3번째인가 4회차 자립음악회에서 제가 이 노래를 들고 가서 조심스럽게 시작을 했지요. 그런데 반응이 열광적인 거에요. 그래가 “아 이건 여기서 해야 한다.”

어진

그럼 수유시장 분들은 이 노래를 아실까요?

한받

전혀 모르실 거 같은데…

일동

(껄껄)

어진

이 곡이 나온 이래 아주 다양한 장소에서 공연하셨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주된 반응은 어떤가요?

한받

공감을 하죠. 상당히 공감을 많이 하고, 자기 자신도 저질이라는… (웃음) 걸 공감하고, 그런데 정말 이걸, 뭐라 해야 하나? 진지하게 반성한다기보다… 즐겁게, (이런 손가락질을) 서로가 서로한테, 하나의 축제처럼 만들어 버리는 게 재밌는 거고.

어진

사실 이런 퍼포먼스나 효과를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셨죠?

한받

그렇죠. 의도하진 않았죠. 해 보다 보니까(된 거죠).

사실 바로 이 점, 굳이 의도하고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 ‘돈만 아는 저질’의 가장 탁월한 부분이다. 처음부터 의도하고 만든다면, “너희 인간들은 다들 돈밖에 모르고 사는 저질이다”라는 메시지를 오해 없이 명쾌하게 전한다는 일은 대단히 까다롭고 버거운 일이 된다. 심지어 이걸 재미있게 전달해야 한다면, 과연 누가 해낼 수나 있겠는가.

하지만 한받은 이를 멋지게 성공시켰는데, 이는 “전태일의 민중성”으로 표현된 일련의 의식(意識)들에 가장 쉽고 즉물적인 접근법―댄스음악―을 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로 이 점, 자기 자신에게 쉽고 익숙한 방식으로 예리한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이야말로, ‘죽창’을 달라고 외쳤던 우리가 뭔가를 본받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YG와 ‘싸이’에게 댄스음악으로 되갚아주기

어진

지금(인터뷰 당시) 참여하고 계신 테이크아웃드로잉 사태 얘기를 좀 해 볼게요. 여기는 다른 사람 소개나 연결 없이 직접 연대하신 건가요?

한받

제가 처음에는 이야기를 건너서 들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안타까운 느낌이 든 거에요. 뭐냐면, (잠시 생각) 두리반하곤 다르게, 많은 사람들의 연대가 이루어지질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진

외면을 한다?

한받

어떤 거냐면, 이거는 (싸이를) 비판하는 안티가 한편으로 있고, 또 한 편으로는 건물주 싸이를 두둔하고 이쪽을 비판하는 그런 분들이 있고. 그러니까 조금 두리반 경우하고는 달라요.

어진

일방적인 잘못이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라 서로 의견이 나뉘는 분쟁 상황이다?

한받

예 예. 그런데 저는 어디까지나 돕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분명히 싸이가 폭력으로 강제 철거를 시도했고, 사람들에게서 모멸감을 일으킨 측면은 잘못됐다 그렇게 생각을 했죠.

어진

그래서 (신곡 가사가) ‘넌 사과해라’.

한받

네, 그것은 분명히 사과를 받아야 하는. YG 본사 공연 앞에서도 그렇게 공연했었고.

어진

아 (YG엔터테인먼트) 본사 앞에서도 하셨었어요?

한받

근데 저는 개인적으로 감정이 좀 있는 게,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을 받긴 받았거든요. 양현석 씨의 음악이나 춤, 퍼포먼스를 좋아했고 존경하는데. YG가 되고 하나의 산업이 되면서 흐름을 만들어낸 게 건물을 사고, 뭐라 해야 하나… 이건 인터뷰에 안 실으셔도 되는데…

여기서는 잠시 공적인 인터뷰를 옆으로 치워 놓고 사담을 주고받았다. “자기도 배고픈 시절에 음악을 해 본 연습생 시절을 기억을 할 텐데 이렇게 모순적으로 행동할 수 있나”, 내가 순진한 건가”, “다양한 음악을 지속할 수 있는 씬을 만들었다기보다는 자기가 하나의 기업체를 만들어놓고 거기서 자본의 흐름을 팽창시키는”, “CJ와 YG가 모종의 관계가 있지 않은가” 같은 말들이 나왔지만, 어느 게 각각 누구의 발언인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어진

(슬슬 정리하려고) 근데 사람이 순진한 건 죄가 아니에요, 악랄한 게 죄지. 그래서 뭐, ‘내가 순진한 건가’ 하는 문제는 사실 그리 깊이 생각하실 문제는 아닌 거 같고…

한받

어떻게 보면 YG의 양현석 씨의 경우에는 선배 음악가라 할 수 있는데…

어진

말하자면 그렇죠! 혹시 그런 상상은 해 보셨어요? 음악의 차원에서, 본인의 음악을 싸이가 들으면 어떤 반응일까.

한받

(잠시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왜냐면 제 노래가 가장 직접적이니까. 싸이한테 “싸이야 넌 사과해라!” 하잖아요. (웃음)

어진

왜, 야마가타 트윅스터도 일단은 해외 각국에서 알아주는 월드스타지 않습니까? (웃음)

한받

거기에 또 재미있는 사연이 있어요. 다니엘 튜더(Daniel Tudor)라는…

어진

아 네, 중앙일보 기자 있습니다.

다니엘 튜더 싸이 야마가타 트윅스터

한국에 관심이 많은 그는 싸이(좌)와도 한받(우)과도 사진을 찍은 바 있다. 적어도 그에게는 둘의 ‘급’이 크게 다르지 않게 보이는 듯하다.

한받

제 공연을 몇 번 본 거 같아요. 그러고 구루부 구루마 끌고 다닐 때 저한테 와서 음반도 사고 사진도 찍고 그랬었는데, 그런 기사를 썼던 거 같아요. “야마가타 트윅스터는 넥스트 싸이. 그런데 다른 식, 다른 방향의 싸이가 될 것이다.”

영어라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분명 ‘강남스타일’이 한국의 자본지향적인 모습을 나타낸 거라고 한다면 야마가타 트윅스터는 그 반대편에서 민중과 함께하는 댄스음악, 퍼포먼스로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평가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진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일본에서도 팬이 많죠?

한받

네. 일본에도 두세 번 공연을 갔었고, 음반 내 달라는 요청이 꽤 있어서 그분들을 위해서 따로 일본어로 새로 레코딩도 하고 그러고 있죠.

어진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건 이유가 뭘까요?

한받

일단 시각적으로 화려한 복장이랑 좀 재미있는 춤 동작이 있을 거 같고, 어떤 외국 분이 그렇게 평을 써 주셨어요. 한국어는 잘 모르지만 이 언어 너머로 느껴지고 전달되는 메시지가 있다고.

어진

아무튼 테이크아웃드로잉 사건은 생각해 볼수록 의미심장한 장면이란 말이죠. 천하의 싸이도 아마 같은 ‘맥’을 쓸 거거든요.

한받

로직(Logic)’쓰겠죠.

어진

네, 뭐 여튼 그러면 싸이가 어느 날 맥을 가지고 댄스음악을 막 만들다가, 법무법인으로부터 전화를 받고서 빨리 처리하라고 얘기를 할 거고, 그러면 그것 때문에 예술가들이 쫓겨나고, 그래서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마찬가지로 맥으로 만든 댄스음악을 틀면서 항의하는 거란 말이에요. 승자는 잡스인 걸까요? (웃음)

한받

안 그래도 저도 언젠가 작업하다 말고 SNS에 그런 걸 쓴 적이 있어요. ‘잡스도 개새끼다.’ (웃음)

어진

새벽 감성으로 작업하시다가 그러셨군요.

한받

아 네. 근데, 개러지밴드는 애플 이전에 eMagic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거잖아요? eMagic이 독일 회사잖아요.

어진

(웃음 그침) 음.

야마가타 트윅스터 인터뷰

한받

이 회사가 누구나 쉽게 직관적으로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잘 개발해놨던 거고, 애플이 이걸 인수한 거죠. 그걸 더 범용화한 게 개러지밴드고. 애플 이전의 독일적 시스템, 사고 체계가 개러지밴드에 녹아들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어진

듣고 보니 그러네요.

한받

애플이 eMagic사의 그런 점을 높이 사서 인수해서 산 거겠죠…

어진

…YG는 테이크아웃드로잉을 높이 사서 건물을 사고!

일동

(껄껄껄)

이처럼, 자기에게 편하고 쉬운 도구를 단단히 쥔다는 것은 꽤 날카롭고 힘이 세다. 월드스타 댄스가수 앞에서 농담으로나마 ‘나도 댄스가수고 세계적으로 알아준다’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용기를 북돋워주는 일이다. “YG는 달라($) 많이 달라”, “싸이야 넌 사과해라”라고 춤추면서 발언할 수 있게 될 정도로.

 

공연하러 가는 길에 음악과 가사를 지을 수 있을 만큼

어진

지금 우리나라의 20대들이 물질적/비물질적 토대가 아주 없지는 않아요. 예컨대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이 그렇죠. 그런데 정작 그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른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특히 모두가 ‘헬조선’이라고 조소하는 지금에 와서는 그 무기력이 더 심각하다는 느낌을 받는데요.

한받

네.

어진

이런 상황에 있는 20대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

야마가타 트윅스터 인터뷰

한받

맥북뿐만이 아니고, 태블릿이나 스마트폰이나 다양한 앱과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그걸 가지고 정말 쉽게 자기 노래를 만들 수가 있어요. 정말 쉽게. 그런데 그 ‘쉽게’를 깨닫기까지가…

어진

‘말이 쉽지 실제로는 안 쉽다’ 하고 그만둔다 이건가요?

한받

그보다는, 어떤 방법(요령)을 잘 몰라서 자기 혼자 하다가 그만두곤 하는 거죠. 살짝 재미나 즐거움을 느끼게 되면 쉽게 자기의 노래를 만들 수 있거든요. 그런 계기를 제가 만들어드릴 수 있으면 좋을 거 같긴 한데,?부단히 시도를 해 봐야 할 거 같아요.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 있는, 스마트폰용 어플이나 프로그램에 대한 가이드라인 서적들을 활용해도 되고.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노래를 만들어보면서 음악이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고, 음악을 통해서 자기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표현해낼 수 있다는 걸 느껴보면 좋을 거 같아요. 아니면, 음악도 좋고, 영상 편집을 해도 되고, 그런 것들. 자기가 즐겁게 할 수 있는 기술이나 재능을 많이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쉽게’를 깨닫기까지가 어렵다, 그 한마디가 뇌리에 남았다. 모든 것이 쉽고 간편한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정작 그 도구와 수단들을 가진 우리는 그걸로 뭘 해야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세상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조금은 미루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욱더 역설적으로, 쉬운 도구를 쉽게 구사하는 법을 깨우치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게 한결 수월해진다. 그런 수단을 손에 쥐고 있는 한은, 자기가 생각한 것을 그때그때 더 널리 더 명확하고 임팩트 있게 전하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바로 그렇듯이.

한받

재밌는 게, 제가 공연을 하러 어디 현장으로 가잖아요. 그러면 (거기서 쓸 음악은) 지하철 안에서 만드는 겁니다.

어진

(기막힘) 정말요?

한받

아니면 제가 지방으로 간다 하면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잖아요? 그 가는 길에, 이걸 들으면서, 그곳을 생각하면서 노래를 만들어요.

어진

그게 돼요?

한받

그럼요.

어진

의외네요. “관 따로 매라” 같은 드립은 좀 시간을 들여서 생각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건 줄 알았는데 말이죠. 안 그래도 좀 궁금했거든요. 현장의 심각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가장 재미있게 만들려고 애쓰시는 게 보여서.

한받

네, 맞아요. 그것도 진짜 많이 노력한 거죠.

어진

그래서 저는 당연히 한 사흘 정도 생각을 해서 만드시는 줄로…

한받

아 그런 건 아니고, 저는 순간순간 떠오른 걸 상당히 중시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잘 맞아떨어지면 좋은 거죠.

어진

‘YG=$’ 같은 곡도 그렇게 만들어진 건가요?

한받

(작곡 당시) 그때 제 옆에 기타 치는 제 친구가 있었어요. 거기 음원 들어 보면 기타 소리도 나옵니다. 그때 한강 고수부지에서 녹음했어요. 연습을 하면서, 완전 즉흥이었어요.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공연을 한번 해야 하는데, 한번 YG를 비판해 볼까? YG는 달라~’ 하면서…

어진

한강 둔치에 앉아서… (상상) (웃음)

야마가타 트윅스터 개러지밴드 작곡중

한받

그때 저녁이었어요. 비가 오려고 하고, 암울했죠.

어진

친구분은 데모음원을 듣고 뭐라고 했나요?

한받

그 친구는 날 묵묵히 응원해 주는 친구였고. 근데 어떤 다른 친구는 또 뭐래냐면, “한받 씨는 YG에 들어가야 한다”.

어진

(웃음) 왜요?

한받

몰라요. 왜 그랬는지… 비꼰 건지 진심인지. (웃음)

어진

아무튼 고민이실 거 같아요. 테이크아웃드로잉도 그렇고 사실 찾아가시는 현장들의 사안 자체는 다들 심각하잖아요.

한받

심각하죠.

어진

‘이런 (야마가타 트윅스터 특유의) 음악은 클럽에나 어울리지 그런 곳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는 의견들도 있었을 것 같은데.

한받

제 나름대로는 정말 많이 노력하고 있고, 그 현장에 계시는 투쟁 당사자 민중들에 어떡하면 녹아들어가서 정말 힘을 주고 흥을 줄 수 있을까 생각을 많이 하고 있고.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가 즐거워야 하기 때문에. 내가 춤출 수 있는 음악이어야 하고. 그 사이에서 만들어가고 있어요.

어진

지금까지의 결과에 만족하시나요?

한받

부족하죠. 이건 제 개인 욕심인 거 같아요. 정말 황홀하게, 다같이 황홀함을 느끼면서 투쟁 분위기에 불을 지필 수 있는 그런 음악… 은 아직까지 못 만들고 있지 않나.

어진

근데 정말 맨 처음에 맥북 가지고 작업하실 때는 이런 삶을 살게 되실 거라고는 예상 못 하셨을 거 같아요.

한받

전혀 예상 못 했죠. 그냥 춤추고, 뭐 즐겁고 황홀하고.

어진

사람들이 본인의 저질 퍼포먼스를 따라하는 걸 보면 어떠세요?

한받

미친 거… 사람들이 미친 거 같아요.

일동

(껄껄껄)

야마가타 트윅스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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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진

김어진

Twenties Timeline 피처 디렉터. 상식이 모자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