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거기 없는 것을 말하지 말라

천육백만이 봤다는 명량은 텅 비어있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보통의 ‘천만관객 영화’가 아니다

또 다시 한 편의 영화가 천만관객을 넘겼다. 몇 년에 한번 쯤 벌어지는 범상한 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엔 그 추세가 남다르다. 일단 개봉 11일 만에 800만 관객을 동원하였고, 이는 최단기간 800만 관객 돌파로 기존 기록(<도둑들>. 16일)을 6일이나 단축한 결과라고 한다. 그리고 이 기세는 관객수 1,600만 돌파라는 기록을 만들어냈다.

1,600만 이라는 관객수를 단순히 <도둑들>보다 300만 명 더 본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하나의 산업적 예시로서, 관객수 1.500만의 벽이 뚫린다면 순수 내수 시장만으로 제작비 200억 이상의 영화들이 제작될 수 있는 환경이 열릴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즉, <명량>의 흥행 추이는 대한민국 제도권 영화 시장의 생태를 바꿔버릴 만한 행보가 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가히 전례 없는 신드롬이라고 부를 만한 수치다. 지금 대중은 미친 듯이 <명량>에 몰리고 있다.

개봉 27일째, 명량은 여전히 힘이 세다 ⓒ NAVER

개봉 27일째, 명량은 여전히 힘이 세다 ⓒ NAVER

그런데 흥행 속도에 비해 의외로 <명량>이 불러일으키는 반향과 파급력이 ‘신드롬’이라 부를 만큼 그리 압도적인 것 같진 않다. 외려 무지막지한 그 흥행 추이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반응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명량>에 대해 대중들이 느끼고 있는 모종의 피로감이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미 많은 이들이 영화의 흥행에 대해 각자의 가설을 내놓았다. 누군가는 영화 자체의 완성도 덕분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이순신 덕분이라고 말하며, 누군가는 스크린 독과점 덕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영화의 비정상적 흥행(과 대중의 피로감)을 자명하게 설명하는 원인으로 개운하게 기능하지 못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천만 영화에 대한 각종 담론의 무의미한 반복이 피로감을 주는 것이라고.

그 담론의 중심 키워드는 아마도 ‘힐링’과 ‘리더’일 것이다. 유행이 지나간 것처럼 보였던 이 두 단어는 매년마다 유령처럼 돌아오고 있다. 시작은 <광해>이었다. 정치의 해인 2012년 가을에 개봉한 이 영화는 단숨에 천만 관객을 동원하였다. 모두들 광해 같은 리더가 우리를 구원하리라고 생각했다. 3개월 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이듬해 <변호인>이 도착했다. 모두들 노무현 같은 리더가 우리를 우울에서 구출하리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변호인>이 무엇을 바꾸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다음해 <명량>이 출현했다. 이 영화는 세월호 침몰 이후 처음으로 천만 관객이 응답한 영화다. 그렇다면 이순신의 리더십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돌림노래의 한 형태로 머물게 될까.

보통 이하의 허술함에 대하여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명량>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명량>은 명량해전이 시작되기 전의 상황을 묘사하는 전반부와 본격적인 명량해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후반부로 나뉘어 있다. 많은 이들의 지적대로 전반부를 채우는 건 리더로서의 이순신의 딜레마와 그에 대한 영화적 질문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할 뿐, 확장되거나 깊어지지 않는 단순한 위기의 나열이다. TV 다큐멘터리와 재연드라마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듯한 영상과 성의 없는 캐릭터들의 등/퇴장, 여기에 이순신의 강박적인 명대사 퍼레이드로 채워진 1시간가량의 전반부를 쉽게 버티면서 보기 힘들다. 돌려 말할 것 없이 <명량>의 전반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후지다.

전반부는 이순신만큼의 인내를 요구하게 만들었다. ⓒ 빅스톤픽쳐스

전반부는 이순신만큼의 인내를 요구하게 만들었다. ⓒ 빅스톤픽쳐스

신기한 건, 놀랍게도 많은 이들이 영화의 내적 빈곤함을 지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신 그들은 영화 내내 주문처럼 나열되던 이순신의 어록과 선택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극중 이순신의 아들 이회는 오로지 이순신의 판단력과 통찰의 위대함을 감탄하는 역할로만 사용되고 있다. 이순신과 이회가 대화를 하는 장면의 대부분은 적어도 영화를 평가하는 입장에서라면, 캐릭터의 도구적 사용과 주제 전달의 촌스러운 방식을 비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관객은 “충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을 향한 것이다.”라는 이순신의 말을 기억한다.

왜 그 장면이 그 맥락에서 등장하는지에 대해서 영화도, 관객도 질문하지 않고 있다. 영화 안에서 장면과 이야기가 성립될 수 있는 핵심적 질문과 요구를 모두 무시하고 그럴 듯한 이미지 메이킹으로 봉합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겠다. <명량>은 국내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들 중 가장 구성이 아마추어적인 영화다. 이전의 천만 관객 영화들은 대체로 관습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었지만 적어도 허술하지는 않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영화의 대박을 납득할 수 있었다. 그 말은 곧 관객이 <명량>을 볼 때, 영화 자체를 본다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기존의 깔끔하게 정제된 이미지를 확인하러 온다는 인상으로 연결된다.

전반부의 늘어지는 지루함을 하나의 특정 전투에 집중한 영화의 구성의 일환으로 변호할 수는 있을 거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명량해전이 시작되는 후반부에도 영화는 전반부의 단점을 고스란히 이어간다. 간단하게 말해서, 나는 아직도 이순신이 어떻게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게 된 건지 잘 모르겠다. 영화는 이순신의 전략과 전투의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 없이 시각효과로 눈을 멀게 한 뒤, 승패의 정보를 전달할 뿐이다.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일본 장수들은 시나리오 작법 상, 아무 것도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없는 캐릭터들이다. 영화가 명량해전을 얼마만큼 충실히 고증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영화 안에 묘사되고 있는 명량해전은 지독하게 지루하다. 여기엔 상황에 대한 구체적 설명과 구성이 부재하고 있다.

새로움은 없고 진부한 복습만 남았다

<명량>의 흥행에 대해 누구나 쉽게 말한다. 그건 현실에서 보기 힘든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현실의 한심한 리더들에게 지친 대중의 잠재의식이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열망으로 향한 것이다. 과연 그런가? 정녕 이 영화 안에 이다순신의 리더로서의 딜레마를 질문하는 대목이 있던가. 오히려 <명량>은 영화 내내 이순신을 혼자 있게 두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지지부진한 위기 상황이 반복되면서 본격적으로 명량해전이 시작될 때까지 시간을 채울 뿐이다.

사실상 <명량>이라는 영화 속 이순신 캐릭터의 구축은 관객의 뇌 속에서 이미 배경지식을 통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순신에 대한 재해석과 질문의 자리를 그럴 듯한 이미지 메이킹으로 옮겨놓는다. 돌려 말할 필요 없이 <명량>이라는 영화 안에 백성을 위한 영웅의 면모와 진정한 리더로서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를 묘사한 적도, 설명한 적도 없으며 심지어 방점을 두지도 않았다. 언제부터 영화에서 맥락 없이 던지는 몇 마디 대사와 그럴 듯한 이미지 메이킹이 영화의 핵심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는가. 관객들은 당최 영화의 어떤 장면을 보고 이순신을 진정한 리더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

은 학습된 기억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다 ⓒ 흙마당

<명량>은 학습된 기억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다 ⓒ 흙마당

해전이 진행되는 후반부에 이르면 디테일에 대한 최소한의 리얼리티도 실종된다. 주제를 끼워 맞추기 위해 작위적으로 동원되는 백성들의 장면에서 특히 그러하다. 정씨 여인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죽어가는 임준영의 말을 알아듣고 치마를 펄럭이는 장면, 십수명의 백성들이 손으로 판옥선을 소용돌이에서 끄집어내는 장면에 이르면 지구의 물리적 한계를 무시해버리는 그 실험적 상상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보기 민망한 장면 묘사는 영화의 얄팍한 전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결국 영화는 ‘백성이 이순신과 함께 싸우며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라는 의미와 이미지 메이킹을 덧씌우고 있을 뿐, 그에 대한 어떠한 영화적 묘사를 보여주고자 하지 않는다. 그저 의미만 전달하고 싶다면 굳이 영화로 만들 필요가 없다. TV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으니. 그렇게 영화는 구체적 묘사와 최소한의 리얼리티 보존을 못한 게 아니라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에 화답하듯 관객 또한 여기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고작 그럴 듯한 이미지와 아주 단순한 의미 단위 뿐. 이것이 우리 세대의 관객이 직면한 시네마인가.

전투가 일단락되자 배 안에서 누군가가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한 걸 후손들이 알까?” 누군가 대답한다. “모르면 호로자슥들이지.” 이 대화가 오가는 순간, 나는 관객의 입장에서 민망함을 참을 수 없었다. 주제를 끼워 맞추기 위해 전투가 펼쳐지는 몇몇 장면에서 백성들이 작위적으로 개입하는 대목은 그나마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정말 견디기 힘들다. 더 나아가 영화가 이 대사를 관객에게 들려주고 주제를 노골적으로 가르치려 들 때, 영화는 관객과의 사적인 만남을 중단하고 관객을 애국심을 가지고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할 국민의 한 사람으로 호명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대사는 고증의 산물이 아니며 명백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대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온전히 스크린 밖의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후손’들을 향해 발사되는 계몽적인 연극에 가깝다. <명량>은 고문당하고 있는 단독자의 얼굴에서 출발하여 백성들의 작위적 대사를 통해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이상한 방식으로 끝맺는다. 이것이 영화가 생각하는 ‘백성을 향한 충’이라면 나는 그 태도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두 시간 넘게 우리가 본 것은 뭐였던가

다시 질문하고 싶다. 정말로 그게 거기에 있었던가. 나는 관객이 <변호인>과 <명량>이라는 어떤 특정한 영화를 보러 온 게 아니라 노무현과 이순신이라는 원형적 이미지를 (재)확인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명량>은 영화가 포함하고 있는 거의 모든 요소에서 구제불능 상태인 영화다. 그러나 스마트폰과 페이스북 세대의 관객은 이를 전혀 개의치 않는다.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걸어 다니면서 이 사이트 저 사이트를 빠르게 옮겨 다니는 관객에게 이야기, 캐릭터, 장면의 전후 맥락은 더 이상 영화 감상의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거기에 남아 있는 건 극도로 단순화 된 한 줄의 의미가 유일하다.

대중들은 마녀만 갈아 치워가며 사냥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자조차 주기적으로 갈아 치워가며 카타르시스를 체험한다(고 믿는다). “신파는 패배만 거듭하는 한국 서민의 변형된 저항의 형태이며 마조히즘에 의한 자기해방의 수단이다.”라는 고 이영일 평론가의 한국 신파영화 사조에 대한 지적은 문장 속 ‘신파’의 자리가 괄호 쳐진 채로 2010년 이후 대한민국에 적절히 도착한다.

나는 그들이 특정한 영화들을 보고 정말로 구원을 바라는 것인지, 정말로 힐링을 받은 것인지 의문스럽다. 어쩌면 그들은 지금 이상한 착각 혹은 이상한 습관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빠른 소비와 빠른 망각, 그리고 끝없는 되풀이. 본질적 원인은 해결되지 않은 채, 초조함에 시달리며 표백된 영웅의 승리담을 통해 일시적 자위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2014년 현재 대한민국 영화관객의 특성이다.

보이는 게 바뀐다고 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 엠넷

감동 받은 관객을 위해 영화는 에필로그에서 6년 전 한산도로 돌아가 이순신의 또 하나의 승리담을 예고한다(<명량>은 3부작으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패배의 역사를 끝없이 지연시키고 깔끔하게 표백된 서사를 반복한다. 앞서 말한 대로 무모해보이던 주인공의 윤리적 승리를 다루는 서사는 이제 2010년 이후 한국영화의 변형된 신파이자 빙빙 도는 후렴구가 되었다. 한쪽에서 끊임없이 힘든 시절의 자학과 패배를 통한 마조히즘적 쾌감에 도취되고 있다면, 다른 한쪽에선 이 힘든 시절을 벗어나게 해주리라 믿는 영웅의 서사가 주는 쾌감에 눈물을 흘린다.

물론 여기엔 영웅의 선택에 대한 딜레마와 질문이 결여되어 있으며 영화적 묘사에 대한 욕망도 부재하고 있다. 딜레마 없는 영웅에 대한 이 비정상적인 호응이 우리 세대의 병리를 진단할 수 있을까. <변호인>에 대한, 그러나 <명량>을 비롯한 무수한 영화들에게도 유효한 허문영 평론가의 의견을 인용하면서 생각을 더 하고 싶다. “살균과 표백으로 제거된 것은 우리의 죄의식과 질문들이다. 이 수의가 많은 사람들, 이 영화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울게 했다면, 실은 우리가 살균과 표백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죄의식의 연루와 대답 없는 질문들의 미로를 벗어나고픈 욕망, ‘선한’ 우리의 고단함과 불행이 ‘악한’ 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믿고 싶은 충동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응시해야 할 것은, 이 한 편의 영화 이전에 그 욕망과 충동일 것이다.” <명량>이라는 영화는 완전히 표백되어 텅 비어있다. 그러니 우리는 거기 없는 것을 본 것처럼 말하면 안 된다.

P. S.

1. “살이 에이듯이 추운 날이다. 옷 없는 병졸들이 움츠리고 앉아 추위에 떨고 있다. 군량은 바닥났다. 군량은 오지 않았다”(<난중일기>, 1594년 1월20일). <명량>은 러닝타임 내내 보여주는 무수한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의 건조한 언어가 내포하는 냉철한 영웅의 면모를 흉내조차 내지 못한다.

2. 지인의 불평에 따르면 일찍이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투자, 제작, 배급의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한국영화의 수준과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경고한 바 있다고 한다. 그 염려의 시간을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니 뭐니 자위하면서 멍청하게 보내다가 결국 우리가 맞이하게 된 건 <광해>와 <명량>의 1600개의 스크린이다. 관객의 마음이란 정말 도저히 모르겠다. CJ의 기획력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3. 다만 한 가지 불평하고 싶은 건 최근의 영화평론가들은 과거의 정성일처럼 기형적 환경을 염려하기는커녕, 그 환경에 붙어서 기생하거나 혹은 신기루처럼 잠시나마 반짝였던 10여 년 전의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기를 들먹이며 최근의 CJ산 공산품 영화들을 기계적으로 비판하는 꼰대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이젠 어떤 비평가에게도 2003년에 대해 듣고 싶지 않다). 후진 영화가 양산되기 때문에 후진 비평가들이 되는 걸까. 잘 모르겠다. (모든 신드롬이 그렇겠지만) <명량>의 비정상적인 흥행은 단순히 하나의 요소를 찬미하거나 하나의 독소를 비판하는 것으로 명쾌해질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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