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했던 말들
실연의 슬픔에 빠진 친구는 말이 없다. 핸드폰을 정지시킨 채 잠수를 타 버렸다. 걱정 되는 맘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친절한 안내원 언니가 답해주더라. 지금 거신 번호는 당분간 착신이 불가능하오니 확인하시고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가만 있어보자. 이 친구는 대개 빠른 시일 내에 마음 정리를 끝내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편이었다. 이 친구의 당분간은 아마 일주일 내로 마감될 것임이 분명하다. 누구에게나 ‘당분간’의 기준은 다르다. 나와 친구는 당분간 남자친구를 사귈 생각이 없다고 의견을 맞췄는데 그 친구는 정확히 한 달 뒤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고, 나는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까지…그렇다, 나의 당분간은 아직 진행형이다. 물론 나의 의지다. 정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당분간’''에 물음표를 품어야 하는가. 아마도 이 정도가 아닐까 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들을 안내원 언니처럼 상냥하게 하나하나 더듬어보도록 하겠다.
1. 학교, 첫 수업에서
찌든 청춘만큼 슬픈 일도 없습니다. 당분간 과제는 안 내줄게요.
매주매주 페이퍼로 달릴 테니 꽉 잡아라.
2. 알바생이 그만두겠다고 말했을 때
유진아 진짜 미안한데, 당분간 사람 구할 때까지만 하자 응?
어딜 가? 못 가, 넌 나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어. 후~
3. 몇 개월 째 밀린 월급에 대해 말하자
요즘 사정이 좀 어렵다. 우리 당분간 힘내자!
회사 거의 다 망했다. 눈치껏 살아라 순딩아.
4. 나의 그녀가 불현듯 내게 문자로
당분간 연락하지 마.
조금 화났지만 진짜 연락 끊으면 정말 끝이야!!
잘 들어. 내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 먼저 연락하면 죽여버릴 거야.
5. 기상청이 해맑은 표정으로
당분간은 전국 날씨가 맑겠습니다★
하늘의 뜻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니라.
6. 인기 연예인 A모씨가 기자회견장에서
당분간 자숙하겠습니다.
한 6개월 공기 맑은 곳에서 사람 좋아 보이는 사진 좀 찍다가 나보다 심한 범죄를 저지른 동업자가 나타나 이목을 끌어 너희가 나를 까먹을 때쯤 되면 돌아오겠다.
7. ‘걔’가 페이스북에 전체공개로
끝. 당분간 나 찾지 마.
야 야 전화해 술 먹자. 뒷담화 소재가 아주 2박 3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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