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자서도 잘 살고 있답니다
새로운 타인들과 처음엔 잘 지낸다
연락처를 주고받고, 가벼운 술자리에 초대를 받는다. 약간의 대화 그리고 몇 번의 만남을 거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모든 것이 피곤하고 진부하게 느껴진다. 물론 그 와중에도 예의바르게 행동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애매한 성격을 덮어두기 위함이다. 하지만 타인들도 어느 순간 일종의 선을 느껴버린 것일까. 허물어질듯 하던 거리감이 다시금 생겨난다. 그리고 나의 일상엔 다시 잔잔함이 깃든다.
관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갈망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나는 이 묘한 어색함이 좋다. 나에 대해, 나를 위해, 온전히 시간을 소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 공허함을 모두가 이해해줄 순 없는 걸까.
카카오톡 혹은 페이스북 같이 텍스트를 통한 대화는 좋다. 전화 통화. 뭐 그럭저럭 괜찮다. 세 명이 넘는 모임부터는 머리가 슬슬 아프다. 곤란하다. 그렇다면 회식은? 아주 질색이다. 그렇다고 ‘나’라는 사람이 세상을 아주 등지고 사는 건 아니다. 사회적으로 훌륭하게 생존하기 위해 당신들의 틈에서 끊임없이 호흡하고 있다. 불우 이웃 돕기에 기부는 하지만 봉사 동아리에 가입을 해서 함께 활동하지는 않는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누군가에게 얽매게 되는 상황이 싫을 뿐이다. 단체에 속하게 되었을 때 져야하는 책임감은, 솔직히 말해선 최대한 피하고 싶다.
당신들은 ‘나' 를 보고 사회성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나만의 라이프 스타일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영화나 전시는 당연히 혼자 보러가는 게 더 좋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감상하고 작품을 온 몸으로 느끼고 싶을 따름이다. 이런 ’나‘의 성향이 악질적인 전염병도 아니고?뭐 어떠한가. ’나‘는 그저 조금이라도 마음이 고단한 것을 피하고 싶은 뿐이다.
어딘가의 '나'는 홀로 즐기고 홀로 만족하는 고등학교 시절의 라이프 스타일을 무척이나 즐겼지만, 대학에 간 지금은 쏟아지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전혀 어색하지 않는 척 한다. 어떤 '나'는 또 어떠한가. 너무 용기가 부족한 나머지 자신이 사람들 틈에 있을 때 어색하다는 뜻을 밝힐 힘 조차도 없다. 그래서 항상 잘 어울리는 듯 보이지만 매일 매일 속으론 아파하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이런 '나'는 대가족에서 개인으로 가는 흐름에서 태어난 하나의 생활 방식 일지도 모르겠다. 통계에 따르면 전체 가구의 1/4이 혼자 사는 시대가 아니던가. SKY폰과 싸이언을 가지고 놀던 옛날, 아홉시 뉴스에 종종 나오던 엄지족 같은 느낌으로 '나'를 바라봐주는게 당신과 ‘나’에게 있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말하지 못한 것들
이를테면 나를 깊게 알게 되면 실망할 지도 몰라, 와 같은 불안들은 언제나 내보이기 수줍다. 맞다. '나'는 꽤나 소극적이다. 함께 무언가를 오래토록 하게 되면 아무래도 고유의 성격이 드러나기 마련, '나'는 그 순간이 너무 무서운 것이다. 또한 '나'의 능력이 월등히 뛰어나질 못해서 당신과의 일을 완전히 망쳐버리게 되는 상황이 올까봐 무지무지 두렵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없다. 그렇다고 커다란 기쁨을 준 적도 없다. 이토록 미적지근한 보통의 인생에 대해 돌이켜보면, 정말 난 이도 저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언제까지 이런 애매한 사람으로 남을 까 하는 궁금증이 들기도 한다. 동시에, 그렇게 상처받은 적 없던 '나'의 삶에 대한 애정이 더욱 샘솓기도 한다. 나 말고 누가 '나'를 이토록 아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적이 없는 갈등은 오늘도 계속된다. 하지만 괜찮다. 이 모든 것은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와 같은 지나가는 고민일 뿐이다. 그러니 걱정마시라. 나는 생각보다 훨신 더 잘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홀로 서점에 가볼까 한다. 길을 걸으면서 들을 음악들을 즐겁게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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