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지금 왜 프레퍼스인가?
인류 진보의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는 불안의 제거였다. 많은 비가 내려 애써 일궈온 농작물을 모두 날려버리거나, 기분이 상해버린 왕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목이 달아나버리는 세상은 그 얼마나 불안한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삶에 대한 불안은 과학 기술을 발전시켰고, 왕권이나 소수 독재에 의한 횡포에 대한 불안은 근대 정치 제도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심지어 비를 만들어서 뿌릴 수 있는 인공 강우 기술이 등장하고 절차적으로나마 민주적인 제도가 정착되었다는 현대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불안은 그 전보다 우리의 삶을 더욱 실질적으로 지배한다. 대학생들이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인 직장을 차지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힘겹게 취업 관문을 뚫고 나면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계발해야만 하는 세태는 언급하기 지겨울 정도다.
언젠가 과외를 하다가 가르치던 학생의 성적이 잘 오르지 않아 갑자기 잘린 적이 있었다. 당장 매달 들어오던 일정 금액이 사라졌을 때의 그 막막함이란. 처음으로 맞닥뜨린 불안의 촉감은 강렬했다. 게다가 나는 당장 학교를 다닐 차비도 없었다. 당장 내일부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은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일상이 파괴되는 공포가 가장 극적으로 재현되는 것은 ‘재난’을 통해서다. 거의 모든 재난영화의 도입이 일상적인 장면에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이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재난은 일상을 파괴함으로써 기존에 알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펼쳐놓는다.
2014년 4월 16일, 한국 사회의 일상은 깨져버렸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모두가 지켜봐야만 했다. 그 죽음의 순간을 경유하면서 우리가 만들어 둔 이 시스템이 재난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리라는 믿음은 산산조각 나 버렸다. 이와 동시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하는 전근대적인 투쟁이 다시 시작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생존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과 가족의 생존은 스스로 담보하겠다는 사람들, 생존 전문가 프레퍼스(Preppers)가 바로 그들이다.
인터뷰이 우승엽
- 프레퍼스 커뮤니티 생존 21c 마스터
- 특전사 출신으로 한 때 잘 나가던 직장인이었으나, 재난에 취약한 대한민국을 보며 전문적으로 안전문제를 연구하기 시작
- 국내 최초로 프레퍼족의 생존법을 담은 ‘재난시대 생존법 - 도심형 재난에서 내 가족 지켜내기’ 저자
- 우리는 김병만도, 베어 그릴스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도심에서, 모두가 실천 가능한 생존법을 전파하고 실천할 뿐!
프레퍼스라고 하면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굉장히 생소한 개념인데요. 먼저 ''프레퍼''가 어떤 개념인지 소개 좀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프레퍼스 커뮤니티인 ‘생존 21c’ 운영자 우승엽입니다. 프레퍼는 재난 관리자, 재난 대비자라는 개념이예요. TV로 보신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방영하는 <둠스데이 프레퍼스>의 그 프레퍼(Prepper)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코난 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죠. 만화영화 <미래소년 코난>의 그 코난처럼 재난 상황에서도 밝게 헤쳐 나가면서 희망을 보여주자는 뜻이죠. 우리는 재난 상황을 가정하고, 그 재난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미리 대비하고 재난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재난에 대비해서 생존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모두 프레퍼라고 하는 건가요?
‘생존’하면 많이들 떠올리는 사람이 “Man vs Wild”의 베어 그릴스와 “정글의 법칙” 김병만씨잖아요. 정글이나 산 속에서 불을 피우고, 식수를 만들고, 벌레를 먹고… 사실 그런 분들을 프레퍼라고 하지는 않아요. 그런 분들은 주로 아웃도어를 중심으로 오지에서의 조난 상황에 대처하시는 분들이죠. 프레퍼와는 분야가 약간 다르다고 할 수 있죠.
반면에 프레퍼는 진짜 우리 삶과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재난에 대비하는 개념이 강해요. 집안에 비상식량을 비축하고, 쉘터를 구축하고, 비상시에 언제든 들고 떠날 수 있는 비상용품을 챙긴 가방을 꾸리고… 겹치는 부분도 많기는 하지만 아웃도어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주로 공세적으로 조난으로부터의 탈출에 초점을 맞추는 개념이라면, 프레퍼는 재난을 방어하고 방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죠.
우리나라에는 프레퍼족이 아직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우승엽씨는 어떻게 프레퍼 활동을 시작하시게 되었나요?
저는 군대를 특전사로 다녀왔거든요. 특전사의 경우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비행기를 타고 적진에 떨어져서 게릴라전을 통해 후방을 교란하는 역할을 해요. 아무런 도움도 없는 적진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거죠. 그러다보니 생존 기술을 필수적으로 알아야만 해요. 일단 그 때 배운 게 많은 도움이 됐죠.
군대를 전역하고서는 회사에서 전산관리직으로 일을 했어요. 회사에서 100대가 넘는 컴퓨터와 서버를 관리하는 역할이었죠. 근데 컴퓨터라는 게 하드웨어든 소프트웨어든 항상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사전에 문제가 없게끔 대비를 하고, 문제가 생기면 그 걸 해결하는 역할이었죠.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블루스크린이 딱 뜨잖아요. 근데 일을 오래 하다 보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컴퓨터처럼 멀쩡하다가 덜컥 블루스크린이 뜨는 순간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블루스크린이 뜨면 해결하고 고치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안전에 있어서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이 없어 보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생존과 안전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찾아보게 됐죠.
그런데 아무리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종말론이나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뿐인 거예요. 사실 종말론이나 음모론의 경우에는 종교적 색채가 강하거나 근거가 부족하다보니까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재난에 대처하는 방식과는 너무 거리가 멀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인터넷 커뮤니티를 만들고 사람들을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죠. 얼마 전에 회원 수가 1만 명을 넘었어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프레퍼들의 활동들을 보면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재난이라는 게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니까요.
사실 프레퍼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부분이 그런 부분이죠. 저희가 재난을 대비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크게 두 가지로 반응해요. 하나는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마라’라는 거고, 또 하나는 ‘이렇게까지 하느니 재난이 일어나면 그냥 죽지, 뭐’라거나 ‘재난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아’라는 거예요. 근거 없이 내가 사는 세상이 안전하다고 믿어버리고 안심해 버리는 거죠. 그게 마음이 편하니까. 그런데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프레퍼스 카페를 찾는 사람들이 확 늘어나요. 그 믿음과 안심이 깨져버리는 거죠. 2011년에 동일본 대지진과 대형 쓰나미 이후나 지난 해 4월, 북한과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랬고, 이번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프레퍼를 바라보는 시선은 ‘있지도 않을 일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사람들’ 정도에 가까워요. 그러다 보니 프레퍼들은 언론에 노출되는 걸 굉장히 꺼려합니다. 한 때 언론에서도 한창 프레퍼들을 다루던 때가 있었어요. 2012년 종말론이 핫이슈일 때 종편 등에서 주로 다뤘었죠. 그런데 보통 언론이 프레퍼를 다루는 방식은 집에 쌓아 둔 통조림이나 비상식량 같은 것들을 비추고 희화화 하면서 ‘괴짜’로 몰아가는 방식이었죠. 그러다 보니 언론에 노출되는 것도 싫어하고,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에게 이런 활동을 하는 걸 알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활동이 노출되면 비상시에 실제로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생기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활동을 하다 보면 어려운 점이 많으셨겠네요.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 시선이 가장 힘들었죠. 커뮤니티 회원 중에는 가족들조차 모르게 하시는 분들도 계실 정도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프레퍼 활동이 한국에서는 대중적이지 않다보니까 정보 부족이 정말 큰 벽이었어요. 지금이야 인터넷 검색도 쉽고, 유튜브 같은 매체도 있어서 정보나 의견을 공유하는 게 굉장히 쉬워졌지만, 제가 군대를 다녀오고 처음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17~18년 전만 해도 그런 정보를 얻는 게 정말 어려웠거든요. 결국 몸으로 부딪히면서 하나씩 정보를 만들어갔죠.
그러다 보니 웃지 못할 일들도 많았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통조림이나 3분 요리 같은 레토르트 식품들을 비상식량으로 준비해 두거든요. 그런데 이 비상식량들도 유통기한이 있기 때문에 교체를 해줘야 됩니다. 그런데 이 걸 그냥 버리기가 아까운 거예요. 유통기한이 1~2년 지난 것들을 보면서 ‘비상시에 과연 이걸 먹을 수 있을까?’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먹어봤죠. 통조림의 경우엔 7년 된 것까지 먹어봤어요. 그런 과정들을 일일이 사진 찍고 후기 쓰고 하면서 정보를 축적해 나간 거죠.
7년이요? 괜찮으셨어요?
당연히 안 괜찮죠. 밤새도록 토하고, 설사하고 식은 땀 흘리며 밤 새운 날들도 정말 많았어요.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정말 죽는 줄 알았죠. 지금도 그래서 장이 안 좋습니다. (웃음)
개인적으로 경험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경험과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대처를 해야만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거든요. 카페에 음모론이나 종말론에 대한 글들도 종종 올라오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것들을 배제하고 실제 우리 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도심형 재난’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해요.
‘재난시대 생존법 - 도심형 재난에서 내 가족 지켜내기’라는 책을 내셨네요.
우리가 재난을 예측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준비하고 대처할 수는 있지요. 어떠한 재난 상황이 오더라도 사람은 먹고 마셔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저는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책에는 비상시에 먹을 것을 미리 비축하고 먹는 방법, 비상시에 물을 구해서 마시거나 정수하는 방법, 혼란 상황에서 공황이나 패닉에 빠지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걸 다루고 있어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중심으로 담았죠.
사실 이전에도 재난이나 종말에 관한 책들이 있기는 했거든요. 하지만 이런 책들도 대부분 음모론이나 종교적 믿음에 기초한 것들이 많거나 외국에서 수입되어서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거든요. 이 책을 통해 우리 같은 일반 서민들, 아줌마나 대학생 같은 사람들도 재난에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어요.
책 제목대로 우리는 가히 재난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형 재난이나 참사를 한 번 떠올려 볼까요. 최근 20년만 하더라도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KAL기 괌 추락 사건, 씨랜드 화재 사건, 대구 지하철 참사 같은 대형 재난들이 참 많았죠. 사실 옛날에야 대형 재난을 막을 기술력이나 안전에 투자를 할 여유가 부족했다고 하지만, 현대화가 되고 과학기술과 경제가 발전했다는 지금도 이런 대형 재난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재난들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걸까요?
일단 재난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어요.
첫째는 자연재난입니다. 일본 쓰나미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이제 지진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한 지역이라고 볼 수 없어요. 오늘도 일본에서 지진이 일어나면 우리나라에 최대 5m 높이의 쓰나미가 올 수 있다는 기사가 났더라고요. 그 외에 홍수나 가뭄 같은 것도 있고요.
둘째는 전쟁이나 내전 상황입니다. 6·25 전쟁도 어느 평화롭던 일요일 아침에 일어난 사건이었고, 80년에 광주에서 일어났던 항쟁에서도 시가전이 펼쳐졌죠. 이런 전쟁 상황이나 내전 상황 같은 시나리오도 한국에서 전혀 비현실적인 가정은 아니죠.
마지막으로는 전쟁 상황은 아니지만 사람이 초래하는 재난, 인재(人災)가 있죠. 이런 건 노후화된 시스템 때문에 일어나는 재난이에요. 이번 고리원전도 홍수가 나면서 가동이 중단되었잖아요. 그 전에도 계속 가동이 중단되는 일들이 있었던 거죠. 세월호 같은 경우도 25년 정도 된 폐급 선박을 가지고 와서 개조를 해서 무리하게 운항을 하다가 침몰했습니다. 선진국 문턱으로 가고 국민 소득이 높아지면서 중요한 기간 시설 같은 것들을 당연히 전문가들이 관리를 할 거라고 우리는 믿고 살아왔단 말이에요? 그런데 현실은 비정규직, 임시직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이런 것들을 관리해왔던 거죠. 참, 서울에 있는 지하철도 20년이 넘게 지났다고 하죠.
이렇게 안전과 관련된 시설들이 다 낡았는데도, 경영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조금만 고쳐서 임시로, 소위 ‘땜빵’을 해서 운행을 하고 있어요. 사실 지금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거죠. 그게 어느 순간에 세월호 사건처럼 터질지 모르는 상황인 거예요. 안전 문제가 터지기 전에는 항상 전조가 나타나거든요. 경고가 울리는 작은 사건들이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무조건 직진만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어요. 노후화된 시스템에 의한 재난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우연한 사고로만 치부할 수 없는 사고들이 너무나도 많죠.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사회에서 재난은 언제든 우리 삶을 덮칠 수 있어요. 지금 안락하고 호화로운 이 삶이 당장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다 깨져있을 수도 있다는 거죠.
말씀하신 것처럼 자연재해나 사고, 전쟁 이런 것들도 단순히 우연이나 불운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것 같아요. 가령 홍수가 났을 때도 배수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서 하천이 범람한다던지, 이윤 추구를 용이하게 해주기 위해 안전 규제를 풀어버린다던지 해서 생기는 사고들이 많잖아요. 결국 안전보다는 이윤 추구에 방점이 더 찍혀있는 사회가 시스템 차원에서 변화하지 않으면 재난이라는 건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 보거든요. 그러다 보니 이런 문제들은 사회구조적인 개혁을 통해서 재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통령도 국가 개조를 이야기했었죠.
그런데 프레퍼스들은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적으로 대처하는 방식이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결국 책 제목에도 나타나 있듯이 ‘내 몸은 내가 지킨다’, ‘내 가족은 내가 지킬 수밖에 없다’라는 거잖아요.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세요?
일종의 불신에서 시작하는 거죠.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현실을 알자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부산 폭우 때, 한 일가족이 차 안에서 불어난 물에 휩싸여서 목숨을 잃었어요. 세 명이 차 안에 있었는데 한 명은 구조 요청을 하러 밖으로 나갔고, 차 안에 남아있던 할머니와 손녀는 물이 들어차서 목숨을 잃었다고 해요. 그 때 부산 지역에 평소의 20배 가까운 신고 통화량 때문에 소화가 안 되는 거예요. 원래 그런 폭우가 있으면 비번까지 호출을 해서 3교대 인원이 전부 전화를 받거든요. 그런데도 이게 소화가 안 되는 상황인 거죠. 상황은 급박한데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까 나중에 녹음 멘트만 확인하게 되고, 제때 대응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처럼 어떤 재난이 터지면 모두가 119나 정부의 구조대만 기다리게 되죠. 그런데 한정된 구조 인력과 노후화된 시스템이 나의 생존을 책임져 줄 수 있느냐? 사실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그걸 명확하게 인식하자는 거죠.
이번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저도 느낀 게 많았어요. 생각보다 더 엉망이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사고 자체는 상당히 국지적이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제대로 대처를 못 해서 신고 접수도 우왕좌왕하고, 구조 체계도 제대로 갖춰진 게 없어서 침몰 이후에는 단 한 명의 생존자도 구조하지 못했어요. 시스템 자체가 멘붕에 빠진 거죠.
이런 국지적인 해양 사고에도 제대로 대처를 못하는데… 만약 수 백만이 몰려 사는 대도시에 재난이 닥친다고 하면,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시스템의 구조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이런 의심은 당연한 거라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어떤 최소한의 준비를 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비상식량을 준비하고, EDC(Every Day Carry, 재난 대비용 비상백)를 가지고 다니기도 하고, 이렇게 하자는 거죠.
얼마 전에 한겨레신문사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를 보니까 ‘위기 상황에서 국가가 나를 지켜줄 것이다’라는 신뢰도가 세월호 사건 이후에 46.8%에서 7.7%로 급락했더라구요.
거칠게 말해서 선장이 내렸던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잘 들었던 사람들은 배를 빠져나오지 못했고, 자기가 판단해서 그 명령을 거부하고 뛰쳐나왔던 사람들만 목숨을 건졌던 그 상황들을 보면서 많은 시민들이 답답함을 느꼈거든요. 이런 재난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매뉴얼도 없고, 무엇보다도 사고가 터진 뒤에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역할과 구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컸던 것 같아요. 재난 관리자, 재난 대비자로써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프레퍼가 우리나라에도 있기는 했지만 외부의 시선 때문에 음지에서 혼자 외롭게 활동해 왔거든요. 저도 사실 괜찮은 회사에 다니던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안정된 수익도 있었고. 그런데 이런 것들을 박차고 나와서 책 집필이나 프레퍼 활동에 몰두하게 된 것도 ‘우리나라에도 재난대비와 안전에 대해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겠다’라는 생각 때문이었거든요. 사실 지금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재난이 이 정도로 일어나는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안전 문제에 무관심해요. 계속 조마조마한 상황이었던 거죠. 재난에 대해 연구를 하다 보니까 언젠가 크게 한 번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계속 있었어요. 그래서 회사를 나와서 책도 쓰고 프레퍼 활동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거죠.
지금 우리는 정말 근거 없는 낙관론 하나만 가지고 살아가고 있어요. ‘오늘처럼 내일도 날이 맑을 것이고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죠. 그런데 6·25도 정말 평화롭던 어느 아침에 터졌거든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내가 사는 동안에 어떤 재난이나 사고도 일어날 수 있고, 그 사고가 일어났을 때 모두가 시스템에 의해 안전을 보장받을 수는 없는 사회라는 거예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큰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사고라는 건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나는 거거든요. 예를 들어 인터뷰하고 있는 이 카페에 지금 연기가 들어온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이게 이벤트 효과인가?’ 이런 다른 생각을 하면서 소중한 골든타임을 다 날려버려요. 평소에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으면,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EDC 같은 것들이 있다면 좀더 빠르고 안전하게 대처할 수 있겠죠. 약간의 준비와 마음가짐이 정말 내 삶을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더 중요한 건 사회 시스템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정말로.?이제 GDP가 2만 5천 불이라고 하잖아요. 굉장히 잘 살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나 TV에 나오듯 재난이 터지면 외국처럼 첨단 시스템이나 구조장비를 통해 우리를 구조해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각종 참사가 현실을 보여줬죠. 사람의 목숨이 달린 중요한 시설을 임시직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운행과 점검을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돌아간다는 것을요. 결국 사고 발생 자체는 우연적이지만, 언젠가 터질 수밖에 없는 필연성도 같이 안고 있는 사회인 거예요. 일단은 이런 문제가 먼저 해결되지 않으면 재난은 계속해서 일어나요.
대처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죠. 사실 정부 부처나 관계 기관에 매뉴얼이 없는 게 아니에요. 수천 가지 매뉴얼들이 있죠. 하지만 재난이라는 것은 순간순간에 따라 상황이 급변하기 때문에 그 대처 방식도 이에 맞게 가야 하는 거죠. 그냥 일반 관료가 매뉴얼을 가지고 있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안전에 대해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지휘 책임을 가지고 재난에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저 형식적인 매뉴얼이 많거나 자세하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안전에 대한 교육도 중요하죠. 사실 우리나라 소방방재청 같은 곳에서 주는 정보들은 지나치게 단순한 것들이 많아요. 일단 국가 자체가 ‘우리나라에는 큰 재난이 없을 거다’라고 가정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일본이나 미국같이 재난에 대한 대비가 선진화 된 국가들에서는 재난 정도와 상황에 맞는 고급 정보를 빠르게 습득할 수 있도록 되어 있거든요. 이제는 우리나라도 안전에 대한 투자를 해서 이런 시스템들을 갖춰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제2, 제3의 세월호 참사는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는 겁니다.
기우를 갖지 않을 수 없는 지금
‘기우(杞憂)’라는 말이 있다. 옛 중국 기나라의 어떤 이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데서 유래된 말이다. 누군가는 프레퍼들을 보며 진부한 이 말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되고, 우리가 구축한 공동체의 무기력함을 온몸으로 체감해야만 하는 시대에 과연 이들 프레퍼스의 걱정을 기우라고, 그러니 안심하라고만 이야기할 수 있는 걸까. 개인이 다시금 치열한 생존 투쟁의 장으로 뛰어들지 않아도 되는 사회는 가능한 걸까.
의 이름으로 나온 최근 기사 (모두 보기)
- 이 시대의 수많은 ‘사이먼 D’에게 - 2018년 9월 16일
- 소확행이 아니꼽습니다 - 2018년 9월 16일
- “창업하는 각오로 진지하게 랩 하고 있는거에요” - 2018년 9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