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에는 전주가 없다면서요?
여러분은 분명 전주로 오기 전에 녹색 검색창에다 ‘전주 한옥마을’을 검색할 것이다. 뻔한 블로거들이 올린 한옥마을의 각종 주전부리와 한옥 게스트하우스 리뷰들이 눈앞에 나오겠지. 나는 당신에게 조금 다른 전주의 모습을 제안하고자 한다. 한옥마을에는 그런 것들 말고도 보여줄 매력이 더 많기 때문이다. 전주 사람이 쓰는 전주 한옥마을, 기대해도 좋다.
전동성당부터 모시겠습니다
한옥마을의 입구에 있는 전동성당부터 본격적인 전주관광은 시작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열기를 반영하듯 여기저기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주: 본 기사는 8월 말에 작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셀카봉을 든 사람들이 가득했다. 험한 길을 먼저 딛는 교황의 지팡이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참, 전동성당 앞에서 “두 분 사진 찍어드릴까요?”란 말은 “저희도 좀 찍어주세요.” 정도로 이해하면 편하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바뀌는 서로의 카메라. 조선시대 천주교도의 순교 터에 세워진 전동성당의 아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찰칵 소리가 넘실거린다.
한옥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자. 그곳에서도 ‘지팡이’의 향연은 계속되었다. 달랑거리는 지팡이 아이스크림들을 보니 스무 살 때 처음 간 인사동이 떠올랐다. 전주 토박이도 알 만큼 이름이 난 그곳은 나에게 애매함이란 세 글자로 기억된다. 유명한 쌈지길도 막상 가 보니 액세서리나 잡화류를 비싼 가격에 파는 곳일 뿐이었다. 맛과 멋의 도시에서 자라온 내게 인사동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의 한옥마을은 그런 나의 자부심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한옥마을을 대표하는 요즘의 키워드는 떡갈비 꼬치, 문어 꼬치, 츄러스, 수제 초코파이 같은 것들이다. 이곳이 어쩌다 길거리 음식을 대표하는 공간이 되었더라. 천 년 역사 동안 한옥, 한지, 판소리와 같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자랑스러운 도시였던 기억은 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걸까. 숨은 매력을 애써 찾으려고 해도 온갖 먹을거리를 팔아대는 바람에 여기가 노량진인지 한옥마을인지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별 수 없이 나도 꼬치 하나를 사서 물면서 생각했다. 사람들은 왜 한옥마을을 찾는 것일까. SNS에서 봤던 길거리 음식을 코스요리처럼 정복하려고? 아니면 설마, 사람 구경을 하려고? 분명 그들도 원하는 ‘전주’ 여행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멀리서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찾아왔을 텐데 말이다.
전주 볼거리들 다 어디 갔지?
전주의 본래 매력을 보여주는 다도 체험, 한지 체험과 같은 공방들은 생각보다 더 깊숙한 골목에 있었다. 앞선 먹거리 골목과 달리, 이곳에서는 줄 서는 사람은커녕 기웃거리는 사람조차 볼 수 없었다. 구경만 해도 좋으니 들어와 보라는 팻말은 먹던 꼬치에서 입이 떨어질만큼 서글펐다.
한옥마을 중간으로 더 들어가 보기로 한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비빔터’라는 공간이 나왔다. 비빔터는 전주 대표음식 비빔밥에서 이름을 따와, 문화 복합공간이라는 취지로 만들어진 곳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전주를 만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곳은 캐리커처, 그리고 3D게임(!)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옥마을이라는 이름이 무색해지는 풍경이었다.
조금 고개를 돌려보니 반대편에서는 한옥을 한참 새로 짓고 있었다. 이제 이곳은 아이스크림을 팔게 될까. 아니면 게스트하우스가 되는 걸까. 옆을 지나가는 아저씨가 한옥마을의 땅값이 평당 2000으로 껑충 뛰었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새로 들어선 상가들 속에서 한옥마을의 진정한 중심인 예술가나 장인은 밀려나고 있었다. 아쉽지만 앞으로도 그들을 쉽게 찾아보기는 힘들 것 같다
한식은 느린 음식이다. 준비하는 데 오래 걸리는 것은 물론이고 천천히 음미하며 만든 사람의 정성을 생각하면서 먹어야 한다. 그렇게 배우고 느끼고 자라온 내게 ‘익스프레스 비빕밥’이란 말은 갑자기 변해버린 남자친구처럼 느껴졌다. 가장 느린 음식과 익스프레스라는 단어가 공존하다니. 여기가 고속버스 휴게소도 아니고 굳이 빠르게 먹어야 할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밖이 금세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한옥마을을 나서는 길에 전주가 국제슬로시티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보였다.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도시가 슬로시티의 자격을 가질 수 있다. 기쁘게도 전주는 2010년 그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2014년, 슬로시티 전주에 온 사람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줄을 서서 나온 음식을 빠르게 먹고 빠르게 사진을 찍는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은 걸까
나는 여전히 전주를 사랑한다. 비록 지금은 떠나 있으나 나를 키운 곳이 전주이고, 전주를 생각하면 엄마를 떠올리듯 포근한 마음까지 든다. 한 해 전주한옥마을에 다녀간 관광객이 5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한국의 대표적 관광지인 제주도가 관광객 500만 명을 모으는데 20년이 넘게 걸린 거에 비하면 무척 빠른 속도다. 그만큼 나의 고향은 갈수록 낯설어지고 있다.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다음에 왔을 때는 더 변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자꾸만 머물렀다. 창밖으로 새 전주시장이 내건 ‘사람의 도시, 품격의 도시’ 라는 슬로건이 눈길을 끌었다. 사람이 먼저이고 사람이 중심이 되는, 그리고 약자를 배려하고 문화예술의 향기와 매력이 넘치게 만들겠다는 전주는,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아니 돌아갈 수 있을까. 600만 관광객 돌파라는 숫자보다 무엇을 잃었는지를 고민하는 여유가 아쉽기만 하다.
버스가 시동을 걸었다. 멀어지는 전주가 유난히 흐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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