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甲)질 고해성사

어느 순간 우리에게 나타는 '갑질'이라는 단어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포털 메인화면의, 공중파 뉴스의 가장 핫한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하지만 TVN?코미디빅리그의?<갑과 을>에서도 나오듯, 갑과 을이란 상대적인 것.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이 나지 않는 관계의 연속 안에서 사회에서?세상의 어떤 사람도 항상 갑이거나 을은 아니다.

계약서를 써야만 갑이던가. 비록 우리가 비행기를 돌리거나 해고까지는 하지 않았더라도, 일상에서 맺는 많은 관계 속에서 우리는 갑질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다. ?차마 꺼내기?부끄러운 기억이라 숨겨놓았던 기억들. 자신의 양심을 괴롭히던 그 찝찝함을 주변의 평범한 대학생들을 통해 살펴보았다.

* 제보받은 모든 이름은 가명이다. ?괜히 같은 이름 친구한테 따지지 말자.

참을 수 없는 권력의 달콤함에 취했던 이지혜 씨 (22세)

지혜씨, 옛날에 엄석대라는 반장이 있었는데요…

중학교 3학년의 나는 담임선생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실장이었다.

학창시절에 자리 정하기는 매우 민감한 부분인데, 우리는 당시 ?자리 바꾸기 프로그램으로 정하곤 했다. 처음엔 선생님께서 자리를 정해오셨다. 그러다 아마 귀찮으셨나보다. 어느 순간부터 실장인 내가 그것을 담당하게 되었다.?마우스를 눌러 자리를 배치했다. 그런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배치가?나올 때까지 계속 눌렀다.

거짓말이 들킬까봐 떨면서 선생님께 들고 갔었는데, 선생님께서 분명히 아신다는 웃음을 지으시면서도 귀엽다고 여기셨는지 그냥 넘어가셨다.?그때부터 나는 실장의 갑질을 시작하게 된다. 대담해진 나는 마음에 안 들거나 많이 떠드는 친구들 자리를 일부러 찢어놓기도 하고, 나와 친한 친구들의 자리를 더 좋게 만들기도 했었다. 물론,?완전범죄를 위해 이 사실을 지금껏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친구들아 그때는 미안해. 내가 많이 어렸었어…

엄마가 좀 잘생기게 낳아주셨다는 박태현 씨 (27세)

이놈의 인기란… ?오마이뉴스

3. 남들은 몸과 마음이 고된 시기라고들 하지만 내겐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남들만큼 공부를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나오는 성적만 믿고 탱자 탱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님께는 공부를 한다는 훼이크가 필요했다. ?밤 열시까지 피씨방에서 열심히 서든어택과 피파온라인으로 달리다가, 이대로 집에가기 뭔가 애매할때면??공부하자는 맘으로 독서실에 들르곤 했다.?

수능이 한 달 정도 남았을 때, 내 책상에 캔 커피 하나가 놓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누가 잘못 두었으려니 해서 몰래 먹고 버렸다. 그런데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캔 커피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힘내라는 쪽지와 함께.?한 달 내내 도대체 누굴까 고민만 하다가 그만 수능 날이 다가와 버렸다. 그리고?수능 전 날, 1004라는 번호로 수능 잘 보라는 격려와 함께 수능 끝나면 커피 한 잔 사주셨으면 좋겠다는 문자를 받았다.

짐 정리를 하러 들른 독서실에서 사랑의 큐피드를 자처한 아는 동생이, 자기 친구를 좀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옆 여학교에 다니던 독서실에서 몇 번 마주쳤던 아이. 하얀 피부에 항상 수줍음을 온 낯에 달고 다니던 친구였다.?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마음 졸이며 그런 고백을 하려 했을까 싶다. 누군가에게 진심을 전달한다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니까.

그러나 그 때의 나는 망친 수능 성적때문에 매사에 짜증으로 가득했던 시기였다. 그 아이를 만난 자리에서?부담스럽다는 말을,?해버렸다. 그 아이의 진심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싫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의 원망을 받아낼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이었고?그 아이는 나를 좋아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화살을 받아내야만 했다. 그렇게 돌아서서 나는 재수학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를 까맣게 잊은 채.

몇 해가 지났다. 사랑의 큐피드를 자처했던 그 동생을 만났다. 나는 잊고 있었던 그 일에, 자기 친구는 참 많이 울었다며 나를 질책했다. 그렇게 대하는 게 그녀에게 생채기를 남기는 일이란 걸 어린 날에는, 알지 못했다.

집안의 절대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장녀 윤재경 씨 (25세)

잘 들어, 엄마품을 뺏아간 너를 평생 괴롭힐거야.

밖에서 후배들과 뭐 하나를 구경하거나 먹으면, 계산대 앞에 서게 되는 건 아무래도 선배인 나다. ?아무래도?사주는 쪽이 갑의 분위기가 되는 건 당연지사. 가볍게는 음식 메뉴를 고르는 것부터 시작해서, 기타 셀프 서비스는 ''쪽에서 도맡아 해주게된다. 만약?이러한 갑을 관계가 가족 간에 적용된다면 어떨까?

나는 집에서 장녀라는 포지션을 맡고 있다. 동생은 둘이나 있고 나이차는 4살과 11살이다. 덕분에?더욱 강력한 상하 관계가 성립된다. 연년생 형제자매들이 누리지 못하는 상하?관계의 유효기간이 보다 길어지는 것이다. 특히?맛있는 거 하나라도 사주는 날이면 나의 갑질은 무자비하게 시작된다.?물 떠와라, 불 꺼라, 리모콘 가져와라, 라면 끓여라를 동생=을에게 시킬 수 있는 ?갑 오브 갑이 된다.

동생들은 그런 잔심부름을 하며?'나이 조금 많은 거 가지고 엄청 유세 떤다'라는 얼굴이지만, 나는 곧 '꼬우면 언니 하시든가'라는 표정으로 응수하면서, 연륜과?돈은 이토록 인간을 풍요롭게 한다는 진리를 쇼파 위에서 곱씹어보곤 한다. 호호호.

시간과 정성으로 학생회를 키워온 서지원씨 (22세)

쟤는 또 뭐니?

우리?학교 특성상 학생회는 대체로 2학년이 맡아왔다. 누가 해도 좋으니 내심?그 후배만은 나오지 않길 바랐다.?'네가 아니라도 누구든 할 사람은 나오기 마련이야' 혹은, '넌 이미 충분히 고통 받았어, 의무감만으로 학생회를 하려 하면 힘들어' 같은 말로 애둘러 말려봤지만 사실 내 진심은 네가 하면 학생회 망하니까 하지마라'에 가까웠다.

내 맘도 모르고 그 얄미운 아이는 꾸역꾸역 메이트를 찾아서 학생회를 꾸렸고, 비틀거리면서 어떻게든 굴리곤 했다. 물론 나를 비롯한 선배님들 보시기에는 끔찍했지만 말이다.? 물론?학번이 학번인 만큼 손 떼야지 하면서도 자꾸 눈이 가는게 또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지켜보다보니 '내가 이렇게까지 일을 하는데 니들이 뭐라고 할 거야?' 라는 식으로 운영하는 모습도 거듭 보였다.

내 시간과 정성을 쏟았던 학생회가 유린당했던 끔찍한 일 년이 ?흘러갔고, 어느덧?종강총회가 다가왔다. 질의응답 시간에 손을 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제가 이번에 새로 옮긴 학생회 카페에 들어갔었는데, 회의록이 5월 이후로 전혀 없더라구요?' ㅡ 마음 같아서는 회의록도 제대로 안 쓰면서 무슨 1년 치 사업 정리하는 가이드북을 만든다는 건지,?그러니까 학생회 하지 말라고 했잖냐는 식으로 몰아 부치면서 그 후배를?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찍고 바닥까지 끌어내린 후 역사에 길이 남을 무능한 학생회로?몰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진 않았다. 대신?그냥 가장 가벼운 해결책을 택했다.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뒤풀이도 가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그 아이와 인사를 하거나 말을 섞는 일도 없었다.?나의 소심한 선배로서의 갑질은, 아니 갑질을 못 하고 체념한 기억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내래 소비자의 맹렬한 비판을 보여주겠다는 김명훈 씨 (28)

널 찾아내 갑질을 할 것이다.

개인적인 신조 중에 기왕 잘하기 시작했으면 끝까지 좀 잘해라라는 게 있다. 빤히 보이는 강점을 가지고 어리숙한 체하면서 뭘 못하고 있는 걸 보면 화딱지가 난다. 내게는 T43이라는 A사의 PMP가 꼭 그랬다.

2000년도 중반 당시 A사는 국내 PMP 업계에서 대단히 선도적이었다. V43이라는 대표 모델이 성공하자 그들은 V43DMB TV 기능을 붙인 T43을 출시하고 체험기 공모전을 열었다. 언젠가 경품으로 운 좋게 얻어걸린 V43을 잘 쓰고 있던 내게 T43의 첫인상은 한심하다는 것이었다. V43TV가 안 나와서 뭔가 부족한 PMP가 아니었다. 오히려 기초적이나마 PDA처럼 쓸 수 있게 조작이 가능한 상급 PMP였다. (“큐토피아라고 아시는지?) DMB를 그 무거운 PMP로 보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인터넷 접속 같은 고급 부가기능이 더 개선돼야 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과연 A사 이놈들은 이번 신제품 만들면서 그걸 알고 했을까 모르고 했을까 확인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천호동 현대백화점 공식샵까지 반바지 차림으로 쫓아가서 디스플레이된 T43을 거의 1시간 가까이 붙잡고 이리저리 만지고 건드리고 사진 찍고 직원에게 괜히 이것저것 물어본 다음 바로 집으로 왔다. 혹시나 하고 보니 역시나였기에, 비난과 비판이 2:8로 섞인 2부작 분량의 체험기를 그림판으로 만들어서 올렸다. 2등 경품이 뭔지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목표는 하나였다. A사 신제품 기획 부서는 이걸 보고 반성해라! 너네는 PMP를 하루 종일 갖고 다니는 고딩의 설움을 아냐?!?

그리고 얼마 뒤 새까맣게 잊고 있다가 공지를 봤는데 내가 T43 체험기 공모전 2등이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품으로… T43을 받았다! ?'고객님의 소중한 의견을 반영하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은 A사가 나의 하찮은 갑질에 응대한 어떤 고단수적인 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결과적으로 우리 가족은 그 뒤로V43T43을 오손도손 행복하게 잘 썼고, 나도 어쩐지 A사가 뭘 잘하든 못하든 아무래도 좋다고 느끼게 되었으니까. PMP의 시대가 끝나면서 A사와의 인연도 그렇게 잊혀져 갔지만, 그 갑질의 추억만큼은 지금도 이따금씩 생각이 나곤 한다.

꿈과 희망을 품고 거제도로 놀러갔었던 김시은씨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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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거제도로 놀러갔을 때 일이다. 우린 그저 일상적인 대화를 했을 뿐인데 표준어를 쓰는 서울처자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덕분에 우리는 관광객 티를 폴폴 내고 다닐 수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 바닷가에 왔으면 당연히 회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어느 횟집에 들어갔다. 우리는 막회를 시켰고 아주머니는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쓱쓱 횟감을 준비해주셨다.

그런데 막상 다 포장된 회를 보니이걸 누구 코에 붙여? 우리의 위를 무시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량이 나왔지만 긴긴 기다림과 설레임으로 가득찬 우리를 만족시키기에는 너무 부족해보였다. 일부러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가 저 먼 서울에서 거제도의 향기를 느끼러 왔는데 겨우 이것뿐인가 하는 못된?생각들.?아주머니는 그런 서울아가씨들의 대화가 영 신경 쓰였는지 홍합탕을 서비스로 주셨다.

홍합탕은 정말 끝내줬다. 허나?먹으면서도 목이 텁텁하고, 영 죄송한 마음이 가시지 않다. 뱉은 말을 주워담지 못해 꺼림칙했던, 나의 어떤 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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