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잼 노 스트레스
술자리의 불편한 손님
대학이라는 공간을 처음 마주했던 새터. 그때의 가장 강력한 기억 중 하나는 역시 술자리다.?한창 재밌게 술 게임을 하면서 처음 만난 동기, 선배들과의 어색함이 한참 녹고 있던 때였다. 갑자기 학생회장이란 사람이 들어왔다, 대놓고 술잔을 기분나쁘게 내려놓는 선배를 시작으로, 짜증 섞인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학생회장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반-성폭력 회칙을 공지하겠습니다. 앞에서부터 종이 넘겨주시고요."
나는 유인물에서 反성폭력이라는 글자를 확인하기 전까지 갑자기 폭력을 왜 반성하자는 건지 영문을 모르고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종이 속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내규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성폭력 사건의 공동체적 해결, 즉 사건이 일어났을 때 피해자의 권리와 삶이 훼손되는 것을 최소화하고, 공동체가 성폭력을 용인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그런 지루한 문장들이 몇 장에 걸쳐 빼곡히 쓰여 있었다.
그 와중에 기억에 남는 건, 사람들의 눈빛이었다. 집중해서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눈빛은 흥겹던 분위기를 망친 학생회에 대한 원망. 그리고 재미없는 걸 왜 하느냐는 감정이 가득 묻어나던 눈빛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학생회를 하게 되었다.
모든 필요가 재미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새터, 주점, 농활 같은 사업을 할 때마다 나는 이런 눈빛과 마주해야 했다.
“취지가 좋은 건 알겠지만, 분위기 처지게 꼭 해야 해?”
익숙한 그 눈빛이 무서웠다. 피하고 싶어 이리저리 몸부림을 쳤다. 단순 공지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식도 시도해보고, 재밌는 썰도 함께 풀어봤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를 만들자는 이야기, 말도 안 되게 낮은 최저임금, 학교 청소노동자의 부당 해고, 정리해고 당한 어떤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담은 교양 따위는 무슨 수를 써도 술자리 게임보다 재밌을 수 없는 거였다.
안다. 반성폭력 내규가 있다는 것 자체로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한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교양 몇 번 한다고 세상을 보는 눈이 번쩍 뜨이지도 않는다. 다만 나는 믿을 뿐이다. 이런 장치들을 통해 우리 공동체가 폭력에 대해 문제제기 할 수 있는 공간이며, 세상에 대해 논쟁할 수 있는 공간임을 확인하고 ‘의식적 노력’을 환기할 수 있을거라고.?이런 마음으로 학생회에 7년을 몸담았었다.
비록 ''재미''가 없더라도
지난여름을 끝으로 수료생이라는 어색한 신분을 가진 채 학교를 떠났다. 많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발 딛고 있던 공간을 조금은 자랑스럽게 떠날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재미없음을 선뜻 거두어주고 함께 해준 이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에 나온 내게 더 이상 내게 반-성폭력 회칙과 같은 것들을 말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재미없는 것들에 매몰되는 것이 아닐까. 하지 않으려 애썼던 것들을 망각하고 스스로 이야기했던 것들로부터 빠르게 탈주할까 두려운 마음도 있다.
그렇기에, 더욱 잊지 않으려고 한다. 굴뚝 위의 노동자에게 하루 100만원의 벌금이 선고되었다는 소식도, 송파동의 세 모녀가 생활고 끝에 죽음을 택했다는 소식도, 어느 대학의 성추행 교수 소식을 ?단순한 논평의 대상이자 텍스트로 넘기고 싶지 않다.
문제제기와 논쟁이 불가능한 공간은 건강할 수 없다. 하지만, 이 필요한 것은 대부분 재미없고 따분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이 재미라는 단순한 기준에 따라 평가되는 순간, 우리가 잃게 될 것은 재미없고 따분함을 참아내는 것보다 훨신 더 클 것이다.
우리의 인간다운 삶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를 지켜나갈 기반을 단지 ‘재미’라는 평가 기준에 의해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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