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의 삶을 사는 방법

카포(Kapo)와 마름

 

"카포의 방에 들어갔을 때 난 내 눈을 의심했단다. 빵이 있었다고. 버터도! 소시지도! 햄에 우유도!
그 때의 기분이 어떤 줄 아니? 이 자의 아침인가 봐. 이런데서 저런 식사를 하니 얼마나 행복할까!
난 그만 내 눈을 가리고 말았어. 보고 있으면 다 집어먹을까 봐 두려웠거든. 그때 카포가 들어오는 거야."

「뭘 그렇게 멀뚱멀뚱 보고 있나? 어서 앉으라구!」

"그건 내가 먹으라는 거였어."

- 아트 슈피겔만, <쥐> 중 일부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많은 수용소를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수용소에는 특별한 존재가 있었다. 카포(Kapo)라 불리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같은 수감자이지만 또 다른 신분이었다. 엄격한 선발기준을 통해 뽑힌 카포는 집결 캠프(Concentration Camp)에서 사람들을 관리하였다. 살인 등의 전과가 있다면 카포로 뽑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중범죄자들에겐 도덕성과 양심이 없으니 동포를 떠나 사람 죽이는 일에 관리자 역할을 맡기기에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카포들에겐 전깃불이 들어오는 독방과 상대적으로 훨씬 나은 식사가 제공되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 나치에게 유태인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에 불과했다. 폭력을 써서 다른 동물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카포를 잘 먹이고 관리했던 것뿐이다. 그들은 동족을 관리하고, 밀고하고, 구타하면서 삶을 유지했다.

카포를 구성하는 상황이 극단적일 뿐, 어떤 사회에서도 비슷한 사람들은 있어왔다. '마름'이라는 단어를 접해본 적이 있는가. 과거의 농업 사회에서 지주를 대신하여 소작농을 관리하던 사람을 말하는 단어다. 소작농에게 임대료를 받고 땅을 빌려줄지를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실무자다. 많은 한국문학 작품에서 마름은 악독한 집단으로 그려진다. 실제로 그랬기도 했고.

2차대전의 시기는 갔고 인종청소와 같은 일은 주변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카포와 마름들은 여전히 있다. 맥락도 다양하다. 을을 교화하는 또다른 을로, 통폐합당한 학과생들을 버리고 당국의 편을 드는 학생회 등. 단지 얼마나 극단적이냐일 뿐이다.

햄버거 세트와 통닭집 아버지

윤서인의 조이라이드는 나올 때마다 인터넷의 화제가 된다. 내 기준에서 그 만화를 보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인 일이 아니기에 평소엔 별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한 계기로 그의 최근 만화 중 일부를 보게 되었다. 최저임금 5580원으로 사먹을 수 있는 햄버거 세트가 있는데, 그리고 '밥버거' '김혜자도시락' 등의 다른 더 싼 대체재가 있는데 왜 하필 1시간 일해도 햄버거 세트도 먹을 수 없다고 투정을 부리냐는 것이다. 강남 아파트는 덤이다.

밥버거나 김혜자도시락이 햄버거 세트에 비해서 나은 먹거리인가, 그런 문제는 언급하지 않겠다. 복잡하니까. 마찬가지로 어지간한 푸드코트에서 정식 메뉴로서 먹을 수 있는 거의 모든 메뉴가 5580원보다는 비싸다는 사실 역시 언급하지 않겠다. 필요없으니까. 사실 그는 언제나 더 나은 처우를 바라는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 같다.

애초에 그에게 기대하는 '옳음'이라는 것이 없기에 그 시점까지는 딱히 화가 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Like를 누른 그의 과거 게시물이 페이스북에 보였다. 그는 전체 공개로 호텔 조식을 올려 놓고 반복되는 여행과 호텔 조식이 지겹다며 때로는 집에서 밥을 먹고 쿠키런이나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단 이 페이스북 댓글이 캡쳐되어 내 트위터 계정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는 친절하게도 통닭집 사장과 내 아버지가 같은 사람이라고 알려 주었다. 갑자기 그의 조이라이드를 처음 접했던 고등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야후 시절의 그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작품들을 내놓았다. 이를 테면 이런 것들이다.

 

'조이라이드'와 '朝이라이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내게 있어 윤서인이 '작가'이던 시절은 이 시기가 끝이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내게 그가 하는 대부분의 주장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나 저 시기, 야후에서 그려지던 <조이라이드>는 지금의 <朝이라이드>에 비해서 딱 하나가 달랐다. 어쨌든 자신만의 입장을 드러내었다는 점이다. 이해관계와는 전혀 별개로.

지금의 윤서인이 그리는 만화는 그 시절과 주장의 퀄리티 차원에서야 당연히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의 식견이 딱히 그 때보다 더 나아졌다고 말할 만한 근거도 없다. 내 기준에서 그는 언제나 비루했다. 주장은 얄팍하거나 우스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2005년의 윤서인은 비루한 '작가'였다. 시간이 지난 지금의 그는 한경과 조선일보에서 '어디서 들어본' 말들만을 하기 시작했다. 물주와 해당 매체의 독자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베껴적는다.

"어쨌든 최저임금은 올라서는 안되고(또는 매우 천천히 올라야 하고)
?너희들은 충분히 더 아낄 수 있으나 그러하지 않는다. 너희들의 삶은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너희에겐 어떠한 일관성도 없다. 너희는 그저 정부를 탓하고 음모론을 제기할 뿐이다.
너희는 미개한 자고 질서를 모르는 자들에 불과하다"

이제 개인적인 주장은 여기에 없다. 그는 그저 웹툰이라는 툴을 빌려주는 사람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맞는가 틀린가, 혹은 도덕적으로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가 아니다(물론 대체로 둘 다 아니다). 저 시절의 조이라이드는 '문제적 만화'였고, 윤서인은 '문제적 작가'의 범주에 해당했다.

내 입장에서 그의 만화는 좋지 않을 뿐, '작품'이기는 했다. 그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세계관이 있고 자신이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부 스와핑이 됐건 조상님의 미개함이 됐건. 그것을 오리지널리티나 작가적 입장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

그를 <송곳>의 최규석 작가와 같은 진보 성향, 야당 성향의 작가와 대비해서 정치적 입장에 따라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천만에. 최규석 작가는 커녕 최지룡 작가와 비교해도 입장은 변하지 않는다. 윤서인보다 훨씬 내용 자체는 문제의 소지가 큰 그조차도 내게는 작가고 그의 만화는 작품이다. 윤서인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최지룡의 작품과 성향에 동의하지 않을 뿐, 그것을 존중한다.

그 차이는 내용의 문제적 소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자신의 말을 하며 독자를 대하고 있는지의 여부이며 그에게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이 있냐 없냐의 여부다. 어느 순간 윤서인은 충분히 작가가 아닌 홍보인, 또는 종북좌파가 왜 이상한 놈들인지를 가르치는 학습만화의 작가가 되어 있었다.

폭력으로 변하는 견해

3월 10일, 조선일보 프리미엄 웹툰 朝이라이드에서는 5580원으로는 햄버거 세트를 먹을 수 없다며 일갈하는 청년이 등장했다. 가상의 청년을 상대로 윤서인의 오너 캐릭터는 준엄한 일갈을 가한다. 마치 그 가상의 청년이 1시간을 일해서 5500원짜리 버거 세트를 먹는 대신 7천원짜리 버거 세트를 먹으려 들면 누가 죽는다는 듯이. 그리고?3월 12일, 그는 언제나 자신을 괴롭히는 '까'들을 비웃고 자신의 팬들을 부럽게 하기 위해 호텔 조식 사진을 올리며 이런 것도 지겹다고 한다.

알바생에게 통닭집 사장님이 아버지라면 통닭집 사장님에게 알바생은 아들이어야 할 것이다. 지금도 많은 아버지들은 자식들이 자기 가게에서 일하게 하지 않는다. 자녀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것, 필요한 것을 하고 더 존귀한 직업을 갖고 더 부유하게 살기를 원한다. 만약 사장님에게 알바생이 아들이었다면 사장님은 참담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7천원짜리 순쇠고기 패티와 토마토가 들어간 고급 버거 세트 대신 밥버거를 자녀에게 먹여야 하는 기분이 어떨까. 자녀에게 미안함을 간직한 아버지는 윤서인에 의해 바보가 되어버린다.

'친일적인' 테이스트로 처음 대중에게 선을 보였고 그 입장들을 전혀 공식적으로 철회한 적이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한일관계에 관련된 이슈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리하게 언급하지 않으며, '부부 스와핑' 같은 얘기도 더는 하지 않는다. 지금의 그는 언제나 물주들의 입장을 자기 식으로 대변한다. 거기까지는 비루한 작가에서 비루한 내용을 웹툰에 담아주는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만화로 한 청년을 내세워 알바 시급이 너무 낮다며 불평하는 현실의 청년들을 두들겨 패고 열받아 달려올 수많은 '까'들을 호텔 조식 사진으로 맞이하는 것은 흥미로운 장면이다. 그 시점부터 그는 작가가 아닌 것을 넘어 소작농 앞 마름, 수용소 안의 카포가 되기 시작한다.

남아있는 것들

1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조이라이드>는 괴상한 만화가 아니라 프로파간다가 되었다. 윤서인은 문제적 작가에서 문제적 인간으로, 문제적 인간에서 문제적 마름이자 21세기 한국적인 카포로 변했다. 만화에서 그는 물주들의 입장을 열심히 대변한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그저 오리지널리티 없이 '좌파'와 '야당 지지자'를 교묘하게 잘 까는 사람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만화를 그린 뒤 물주들에게 받은 돈으로 즐거운 라이프를 즐기며 찾아올 루저와 우민들을 놀린다. 그리고 사장님을 아버지로 만들어 억지 춘향이식 가족 이념을 들이민다. 그의 정체성은 한번 더 변한다. 비루한 인간이 아니라 비루한 마름, 카포로.

비루한 작가에서 비루한 사람으로 변한 그의 만화는 '종북좌파'를 까는 데에 쓰이는 기능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다. 만화가 아닌 만화적인 툴에 불과하기에 더 생산성 높은 사람이 나타나면 그에게 더이상 호텔 조식은 없을 것이다. 카포를 밀고한 건 카포의 행복이 부러웠던 다른 입소자들이었다고 한다. 마름은 지주보다도 먼저 농민들의 타깃이 되곤 했다.

그 역시 일거리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을에 불과하다. 그가 다른 을을 바보로 만든 대가는 무엇이 될런지. 그가 행복하게 살면 살수록 그와 경쟁하려 들 사람들도 많아진다. 언젠가는 생산성을 잃게 될 그가 토사구팽을 당한 이후 과연 복지를 말할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오너 캐릭터로 비웃을까.

이쯤 되니 흥미로워진다. 이념의 홍보를 넘어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그가 얼마나 더 성공신화를 써나갈까. 그가 언급한 '생산성'이 그를 언제까지 구원해 줄까.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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