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국신민들에게 고함 – 朝夷懶而盜論(조이라이도론)

朝 夷 懶 而 盜 論 ( 조 이 라 이 도 론 )

 

근래, 많은 조선인이 自强(자강)에 힘쓰고저 여러 운동을 벌이고 있다 들었다.

황국의 의지 아래 은혜로운 文化統治(문화 통치)가 시행된 이래, 조선인의 실력을 쟁취하고저 하는 사상은 지극히 바람직한 것이다. 당장의 無力(무력)함을 보지 못하고 感情(감정)에 들끓어 백날을 분연히 일어난들 강국이 들어줄 리 萬無(만무)한 것이 병백하다.

여기에, 다수의 靑年(청년)들이 뜻을 나누고 맹세하야 組織 結成(조직 결성)에 이르니 流行(유행)이란 것이 가히 놀랍다. 물론 明治維新(명치유신)을 通(통)하야 개조를 完(완)한 大日本民族(대일본민족)에 비하야 수십 년이나 늦었으나 작금에라도 행해짐이 다행이라 칭할만하다. 다만, 改造(개조)에 있어 우선해야 할 것은 황국 신민다운 사상과 인성이 우선해야 할 것이다.

듣기로는 근래 소작인과 방직 工人(공인)들의 쟁의가 일어남이 우후죽순이라 하였다. 이유인즉슨, 소작료와 賃金(임금)에 불만을 표하야, 생활고가 있다 하여 火賊(화적)떼와 같이 무리를 이루어 地主(지주)와 社長(사장) 앞에 나아가 무리지어 덤비어 나선다. 또한 공장의 손을 멈추고 손해를 가하야 사사로운 이득만을 취하니 참으로 고약하다. 남의 재물을 도적질하는 것에 다름이 무언가. 그리하다 막심한 피해를 끼치고 모두가 沒落(몰락)하게 되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항만·도로·철도를 설치하는 황국의 넓은 은혜를 모르고 부질없이 쟁의하는 이들을 보라

爭議(쟁의)를 일삼는 이들이 쉽게 내세우길, 모든 것은 힘 있는 資本家(자본가)의 탓이요, 높은 소작료와 저급의 賃金(임금)으로 인하여 제대로 끼니조차 식 할 수 없음을 한탄한다. 그러나 어디 보라, 산천에 지척으로 널린 것이 식용의 草根(초근)이요, 약용의 木皮(목피)인듸 어찌하여 식 하지 못함을 논하는 것인가. 봄이면 갖가지 山菜(산채)가 가득하며 가을엔 實果(실과)의 농익음이 참으로 탐스럽다. 草木(초목)이 메마른 겨울에도 호수 아래에 魚族(어족)이 여전할 것이다. 여기서도 굶주리는 자는 오직 族屬(족속)의 懶怠(나태)를 엄중히 물을 따름이다.

본토에 들어갔을 적의 일이다. 대장장이의 점포에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들은 一介(일개) 工人(공인)이라 하여도 오직 자신의 일을 최고로 여겨 맡은 바 직업에 不足(부족)함이 없었다. 아무리 미천한 이라도 소임에 골몰하여 百錢(백 전)의 삯을 받으면 百五十錢(백오십 전)의 것을, 百五十錢(백오십 전)의 삯을 받으면 二百錢(이백 전)의 것을 해내니 품삯을 주는 이는 도리어 미안하여 더 높은 값을 쳐주는 것이다. 이야말로 경제의 一面(일면) 創造(창조)에 다름 아닌가.

이러한 근면함이 위대한 황국군의 자태를 만든 것임에 분명하다

 

반면 조선인은 오직 금전만을 바라고 품삯에 불만을 가질 뿐, 勤勉(근면)을 꾀하고저 一(일)도 힘을 쏟지 아니한다. 吾等(오등)의 인류는 資本主義(자본주의)라 하는 서구의 원리에 의거하여 자신의 노력만큼의 삯을 받아갈 것인즉, 이를 부당하다 마음 깊숙이 여겨 쟁의를 벌이는 것은 盜賊牌黨(도적패당)의 속셈과 무어가 다른 것이냐고 하늘이 물을 것이로다.

지금의 달콤한 宣言(선언)을 속삭여 무엇 모르는 산골 아범과 계집들을 衝動(충동)하는 것이 진정 한 실력 양성이 아닐 것이요, 胸中(흉중)에 또아리를 틀고 독을 내뿜는 독사와 같을 뿐인듸 나 역시 조선 민족의 일원으로 동포를 모멸하려 함이 아니요, 다만 朝鮮朝(조선조)에 이어 내려온 부패한 정신을 개조하고, 환멸의 習俗(습속)을 탈하야 一等民族(일등민족)으로 새로이 거듭나는 것만이 진정한 民族改造(민족개조)에 달하는 일임을 믿기 때문이다.

조선 민족은 그런 然後(연후)에야 비로소 自强(자강)과 實力養成(실력양성)을 논할 것이요, 五大洋(오대양) 앞에 나아가 獨立(독립)을 구하든지 日人(일인)과 同等(동등)한 權利(권리)를 누리든지 할 것임을 이천만 同胞(동포) 앞에 진실로 목 놓아 외치는 바이다.

 


 

임금 수준을 보면 1937년에 일본인 남자 노동자의 하루 평균 임금이 2원 3전이었는데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은 1원 3전, 즉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부산 고무공장 같은 데서는 조선인 남자 노동자들이 하루에 평균 46전, 최저 10전이라는 기아임금을 받았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은 일급 최저 6전까지 받은 사실이 있었다.

비교적 대우가 낫다고 한 관영 철도 공장들에서도 조선 사람의 월 수입은 최고 78원 30전, 최저 15원, 평균 48원 28전이었고 일본 사람의 월수입은 최고 111원, 최저 17원 70전, 평균 72원 57전이었다. 평균적으로 보아 조선 사람은 일본 사람보다 반이 좀 넘는 임금을 받았을 뿐이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제강점기의 노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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