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인력거꾼 김첨지의 一日

경성에 사는 김첨지(32)씨는 근 열흘간 돈을 벌지 못했다.

시내에 좀처럼 인력거를 찾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내버스 요금은 7전이며 사대문四大門 안 택시요금은 4인 기준 1원인데 인력거요금은 하루에 5원(10리(里)에 80전)이니 대수로울 일도 아니다. 닷새 전에는 신식학교의 입학날이라 종로거리를 부단히 돌았으나 소수의 부유한 가정은 자동차를 끌었고, 보통은 전차(1구간에 5전)를 이용해 허탕을 쳤다고 한다.

손님은 받지 못하고 동료와의 친목만 쌓인다

전에 없던 새로운 개념槪念인 자유연애自由戀愛 사상이 널리 퍼지며 여관이나 호텔 등 숙박시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심지어는 야반도주를 하는 남녀들을 실어 한강다리를 건너는 택시들은 벌이가 제법 된다고 하나 인력거는 그 호황에 비켜나있다.

“오라질- 연놈들. 싼 값에 모시겠다고 하면 요금이 부담된다고 손사래 치더니?곧장 일반여관(숙박비는 40전~2원)으로 들어가지 뭐유.”

쌀은 한 가마에 13원. 꼬박 2~3일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인데 며칠째 허탕을 치고 있으니, 가정의 안위만 걱정할 뿐이다. 집에 있는 아내와 아이가 굶고 있어 김씨의 시름은 더욱 깊어만 간다. 카페, 극장, 선술집등 신식문화가 많이 들어와도 김씨와는 상관없는 얘기다.

"아니, 뭐벌이가 있어야 쓸 텐데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입이 있어도 먹지를 못하니!”

최근 사정이 더 어려워진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고 인력거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나빠진 것. 김씨와 같이 다른 인력거꾼들의 사정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인 듯 했다. 일부 악덕 인력거꾼들이 인력거 삯을 멋대로 올린 것이 경찰에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어찌나 속이 터지는 지 무려 1원이나 주고 신문을 사보았다고한다.

“이것 좀 보소! 지들만 힘든 줄 아는 건지. 에잇 육시럴 놈들.”

근래에는 인력거군이 삭전을 과하게 청구하는 버릇이 많다. 이들이 경찰 당국에게 발견되어 과태료 삼원에 처해졌다. 이유는 규정가격의 배 이상을 받았기 때문. 남대문에서 아현동까지 규정은 42전인데 1원 50전이나 청구하였다 ? 1920년 4월 12일 동아일보

 

부당한 취급에 속이 상해 술이라도 마시고 싶지만 동료들에게 얻어먹기만 하는 것이 미안해 근래에는 그저 일찍 집으로 들어가 조팝이나 주워먹는 수준이라고한다.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냐고 마지막으로 묻자

?“따끈한 설렁탕이나 한 대접 했으면 좋겠구먼. 삐쩍 꼴은 아내가 설렁탕 노래를 부르는데 어찌나 가슴이 미어지던지. 껄껄”

하며 김씨는 쓴 웃음을 삼켰다.

 

 


1900년 - 경인선 여객 운임은 3등 40전
1900년 - 공중전화 5분당 50전
1910년 - 사진관의 사진값은 1원~ 5원
1919년 - 단성사(극장) 입장료는 특등 3등 40전
1921년 - 전차 요금 1구간 5전
1922년 - 인력거요금은 10리(里)에 80전, 하루에 5원
1922년 - 공립보통학교 수업료 1개월에 1원 이내
1926년 - 소금(천일염) 100근당 1원 50전
1928년 - 경성 시내(4대문 안) 택시요금은 4인 기준 1원
1928년 - 시내버스 요금은 7전, 교외 1구간 10전
1928년 - 서울 인천간 버스요금 95전
1929년 - 최고 시설이었던 조선호텔의 숙박료(1인1실)는 3원~45원
1929년 - 일반여관 숙박비는 40전~2원 사이
1930년 - 전화가설비는 5원~20원 사이
1930년 - 쌀 한가마는 13원

그리고,
당시 경성 극빈자의 하루 생활비는 5∼20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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