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는 ‘사회복무요원’ 이야기
“3급입니다”
군의관이 말했다. 가야 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군의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지금 몸 상태나 비디오 보면 현역으로 가는 건 확실히 무리예요.
그런데 규정상 치료기록이 없으면 4급 판정을 내 줄 수 없어요.
요새 비리다 뭐다 말이 많아서 규정이 좀 까다로워졌어.”
그의 설명을 듣고 나니 오히려 납득하기 더 어려워졌다. 현역은 무리인데 군대를 가라니.
그러나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스타도, ?금뱃지도 없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아픈 몸을 이끌고 현역생활을 하느냐, 치료를 받고 재검을 받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내 몸으로 군생활을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군대가서 아프면 병신 취급받는다는 군필 친구들의 말도 결심에 큰 영향을 미쳤다.?예정 치료기간은 1년 이상. 백만 원이 넘는 돈이 깨질 예정이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군대 안 가는 비용 치고는 싼 거라고. 하지만 알바로 대부분의 생활비를 해결하던 나에게 그 돈은 절대 적지 않은 돈이었다.?병원에 가기 위해 도시락에서 삼각김밥을 고르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과 다름없이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내일 점심 값까지 탈탈 털어 병원비를 내고 나니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국가의 필요에 따라 사람을 ‘사용’하기 위해 분류하면서, 왜 그 분류에 드는 돈은 사용되는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걸까. 인터넷에 물었다. 이거, 국가에서 좀 지원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답변이 달렸다. 그것은 당신이 선택한 일이지 않느냐고.
"4급입니다"
해가 바뀌었다. 대구에 있는 중앙신체검사소에서 재검을 받았다, 4급 판정이 나왔다. 치료를 받기 전이나, 받은 후나 여전히 내 허리는 아팠다. 그리고 빈 주머니에 남은 것은, 병무청에서 신체검사 후에 쥐어준 교통비가 전부였다.
사회복무요원 첫 월급이 나왔다. 28만원 정도. 출퇴근 차비와 식대로 쓰면 딱 떨어질 돈이었다.?다른 데 눈을 돌리기엔 턱 없이 부족했다.?복무 중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르바이트는 할 수 없었다.?피곤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과 약속을 미뤘다.?사정도 모르는 친구들은 공익이 뭐가 그리 바쁜 척이냐며 나를 구박했다.
퇴근하자 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도 딱히 할 일은 없다.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아픈 허리를 만지다가 잠이 들고, 그렇게 내일도 이런 하루가 반복될 것이다
사회복무요원일 수 있는 것도 일종의 경제적 바탕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인 남성 한 명의 생활비를, 2년 정도는 그가 전혀 노동하지 않아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바탕. 훈련소에서 분대장에게 들었던 한 훈련병의 얘기가 생각났다. 몸 상태가 현역으로 복무하기에는 부적절해 사회복무요원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 사정이 좋지 못해 현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군대에 가 있는 만큼 집안의 '입'을 덜게 되는 거니까. 나는 이제 그의 심정을 알 듯도 하다.
하지만 현역이라고 해서 나와 같은 종류의 곤란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동네 친구는 근무환경이 좋다고 알려진 공군 특기병에 합격하고도 복무 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육군을 선택했다. 복학 전에 등록금을 모아야 했기 때문이었다.?학교 동기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아픈 동생이 걱정되어 비교적 외출이나 외박의 기회가 많은 의경을 선택했다. 하지만 받는 월급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빈손으로 가기 뭐해서 케이크라도 하나 사려고 결심하려면 한 달 전부터 부대 매점에 눈길도 주지 않아야 했다.
정훈교육말고 현실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가장 큰 문제는 현역으로 복무하는 우리 모두가 너무 턱없이 낮은 금액으로 '봉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이런 말에 정훈교육은 늘 '숭고한' 의무라고들 답하지만, 역사적으로 숭고함이 인정되는 경우는 희생에 걸맞은 대가가 주어질 때였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일단 돈이 없다는 사실을 입에 올리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행여나 답답한 마음을 위로라도 받고 싶어 겨우 말을 꺼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런 말을 꺼내기만 하면 기본이 종북이요, 힘들게 복무한 정도에 따라 계급이 나누어진다. ?너보다 더 심한 애들도 많아. 적어도 너는 밥은 안 굶잖아. 요즘 니가 편하구나. 전방부대는 힘들어서 그런 생각도 안 들어.
그러니 어쩌겠는가.?다음 주로 다가온 친구 생일에는 무슨 핑계로 미룰까 생각하면서, 특기와는 전혀 무관하게 삽질을 하면서, 김 상경은 매점에서 제대로 쏜 적이 없다는 후임들의 투정을 들으면서도.
나는, 우리는.
오늘도 조용히 견딜 뿐이다.
의 이름으로 나온 최근 기사 (모두 보기)
- 이 시대의 수많은 ‘사이먼 D’에게 - 2018년 9월 16일
- 소확행이 아니꼽습니다 - 2018년 9월 16일
- “창업하는 각오로 진지하게 랩 하고 있는거에요” - 2018년 9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