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리 덕질을 이롭게 하라
“덕질할 통장을 준비했는데 왜 받지를 못하니…?”
몇 년 전, 대학로에서 어떤 연극을 보고 집에 온 날. 절정의 부분에서 감정을 토해내던 그 배우의 연기가 눈에 아른거렸다. 가방 속에 있던 팜플렛을 꺼내 이름을 알아내고, 포털 사이트에 그 이름을 검색해 봐도 네이버 인물 검색에도 나오지 않고 흔한 이름이라 그런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만 가득하다. 이 배우를 좋아하려면 계속 공연만 찾아가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는 건가? 결국 난 포기하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접하게 된 화보 잡지 <덕지덕지>는 배우들의 다양한 화보들로만 200페이지 넘게 가득 찬 화보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잡지의 편집장인 원종은 씨도 연극 배우들에게 반해 덕질을 시작했지만 저장할 짤도 없고 포털의 프로필 사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 직접 화보집을 기획하고 제작한 것이었다. 이런 능동적인 덕후라니, 이분 최소 배우신 분..
실제로 나온 사진들도 원래 그들을 알고 있었거나 좋아했던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충분히 심쿵하게 만들 만한 너무나도 예쁜 사진들이었다. 배우의 집, 첫사랑, 공주님, 건달, 동물(모에화)과 같은 다양한 컨셉들을 보면 한 장 한 장을 덕심으로 만들고 덕심으로 감상할, ‘덕심으로 대동단결’이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잡지였다. 대동단결할 그 중심에 있는 <덕지덕지>의 편집장 원종은 씨를 인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인터뷰이 소개
원종은. 28세.?인하대학교 한국화 전공, 개인전 준비 중.어쩌다 보니 갑자기 덕심으로 대동단결 잡지 <덕지덕지> 편집장을 하게 됨.
나부터, 모두가 함께 심쿵할 잡지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궁금해요.
원래는 개인전을 준비하다가, 개인전 준비하다 보면 원래 집에 틀어박혀서 그림만 그리거든요. 너무 답답하고 우울해서 동생이랑 뒹굴거리다가 원래는 ‘만화방을 차릴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가 ‘지금 우리가 했을 때 재밌는 게 뭘까’ 생각을 하게 되고, 진짜 갑자기 생각난 거거든요. 그래서 주위 작가들한테 연락하고, 갑자기 배우들한테 연락하고. 그렇게 갑자기 만들어진 거에요.
원래 작가 분들이나 배우 분들은 알고 계신 분들이었나요?
네. 원래 알고 있던 분도 있고 새로 소개 받은 분도 있어요. 사실 저는 연극을 잘 모르다가, 남자친구가 연극 영상 작업을 많이 해서 저도 도와주러 가고 뒤풀이도 가면서 친해졌어요. 그렇게 친해졌는데 되게 멋있는 배우분들이시더라구요. 근데 막상 인터넷에 정보가 없어요, 팬들은 꽤 있는 것 같은데. 마음껏 덕질 할 정보가 없구나. 그런 거 만들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럼 그 전에 따로 덕질했던 건 뭐였나요? 만화?
저희 부모님이 덕후셔서 태어날 때부터 절 만화가로 키우려고 하셨거든요. 만화를 물론 좋아하지만 제가 덕심이 하나로 깊지가 않아요. 얇고 다양해요. 그래서 제가 이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제가 하나로 깊었다면 거기에 미쳐 있었겠지만 저는 이 사람이 좋아하는 것도 재밌어 보이고 저 사람이 좋아하는 것도 재밌어 보이고, 이렇게 항상 이것저것 보다가 이런 걸 한데 묶으면 여러 사람들이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맞아요, 재밌어요.
그래서 저는 한 번도 한 아이돌을 좋아한 적이 없어요. 얘도 좋고 쟤도 좋은데… 애들 막 싸우잖아요. 저희 때는 H.O.T랑 god 팬들이 싸웠을 때에요. 고등학교 때는 빅뱅이 막 나오기 시작하고… 빅뱅이랑 2PM 다 좋은데 너네 왜 싸우냐? 솔직히 좋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맞아요. (뜨끔)
솔직히 이 배우만 좋아하는 팬들이라도 저 배우가 입질이 오면 좋긴 좋거든요. 근데 그냥 자기 소신을 지키는 것뿐이지. 근데 전 소신이 없거든요. 소신이 없어서 이런 걸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ㅎㅎㅎㅎㅎ 근데 이렇게 말해도 되나요…?
ㅋㅋㅋㅋㅋ 저도 공감해요. 저도 어떤 아이돌을 오래 좋아하고 있지만 다른 가수들도 계속 보면서 좋거든요. 그리고 특히 배우는 드라마 나올 때마다 바뀌고… 다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맞아요.
재밌으니까 만들 수 있었어요
이런 식으로 화보나 매거진 만드신 건 처음이세요?
퍼포먼스 작업은 좀 했었어요. 전 원래 여럿이서 하는 작업을 좋아하거든요. 대학생 때도 한국화를 전공했지만 그리라는 그림은 안 그리고 영상 작업, 프로젝트 작업을 벌이거나 퍼포먼스 작업을 하는 식으로 해왔었는데 출판물을 만든 건 처음이라 어려웠어요.
출판물 만들어보시니까 어떠세요?
만드는데 힘든 점도 많았고 실수가 너무 많아서 아쉬워요. 작업할 때 재밌는 것들이 많아서 다행이었어요. 아니었으면 못 만들었을 거에요… ㅋㅋㅋㅋ ㅠㅠ
이번 1호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리신 거에요?
저희가 3월부터 시작해서 6월에 나왔죠. 6월 22일에 한 출판 기념회 3일 전에 나왔거든요. 긴 여정이었죠. 근데 되게 짧게 느껴졌어요. 재밌었으니까.
결과물도 만족스러우실 것 같아요. 저는 평소에 인터뷰나 글 많은 잡지를 주로 보는데 이런 화보집도 좋더라구요.
사실은 원래 인터뷰를 넣으려고 해서 첫 촬영 때 제가 인터뷰를 했어요. 인터뷰를 하는데 상투적인 질문밖에 안 하게 되고 너무 지루한 거에요. 제가 이 배우에 대해 알고 싶은 건, 언어로 딸 수 없겠다 싶더라구요. 그래서 그만뒀어요. 저는 글을 그렇게 잘 쓰는 편이 아니라 자신이 없고, 저희 멤버 중에서도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없어서 여기까지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잘 해보자.
그런데 저는 보면서, 글이 없어도 뭔가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아서 좋았어요.
이야기를 많이 넣으려고 했죠. 김보리 작가님의 ‘사진 찍어줄게요’ 같은 경우엔 원래 모델이 편하게 생각하는 장소에서 편한 모습만 찍는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화보였고, 금시원 작가님의 ‘밤의 꽃’ 같은 꼴라쥬 화보도 있고, 송곳 작가님과 함께한 화보는 첫사랑이 컨셉이었고. 그리고 저희가 제일 밀고 있고 예정된 일곱 편 동안 계속 나올 화보가 동물 모에 화보에요.
아, 봤어요. ‘오피스 바니걸’이랑 ‘사슴이 다쳤어요’ 맞죠?
네. 이 사슴뿔도 자체 제작했어요. 나뭇가지 주워서 끝부분은 지점토로 만들어서 물감으로 칠하고… 귀랑 꼬리는 제 동생이 제작해 준 거에요.
와, 진짜요? 저는 어디서 이런 사슴뿔에 최적화된 나뭇가지를 구했지? 샀나? 했거든요. 지점토로 수작업 하셨다니… 저 이 사슴 화보 정말 좋았어요. 눈물 흘리시는 거.
김현식 배우가 감정을 너무 잘 잡아서 잘 나왔어요. 작가님들이랑 다들 감동 받았어요.
저는 여자 배우 화보들도 너무 좋았는데, 여자 동물화는 오피스 바니걸이잖아요. 엄청 섹시해요.
좋죠? 이 화보 때문에 엄청 많이 후원하신 분 계세요. 이 책상 밑에 들어가서 다리만 나온 사진. 사실 그냥 바니걸만 하면 재미없잖아요. 박주현 배우가 너무 잘해 줘서 환호성도 막 질렀어요.
배우 분들도 사진 찍으면서 좋아하셨을 것 같아요.
일단은 배우들이 영상 카메라엔 익숙하지만 사진 찍는 거엔 익숙하지 않으셔서 신기해하시더라구요. 원래 이 정도 찍어주면 돈을 받아야 하는데 ^^ ㅋㅋㅋㅋㅋㅋ 사실 참여한 배우 분들은 돈 받는 것도 잘 모르더라구요. 관심이 없어요. 그냥 찍는 것 자체가 재밌었다. 그 사람들은 그걸로 끝인가 봐요.
팬 분들도 엄청 좋아하실 것 같아요.
지금까지 반응을 보면 그런 것 같아요. 배우 분들도 그렇고 작가 분들도 다들 프로셔서 각자 팬층이 있거든요. 다들 좋아해 주시죠. 많이 후원해 주신 팬 분들도 출판 기념회에 초대했는데 재밌었어요.
아, 정말 좋아하셨을 것 같아요. 배우 분들이 기타랑 젬베 들고 오셔서 축하공연도 하시고. 배우 분들도 팬 분들도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원래는 이번에만 하려고 했었는데 다음 호 때도 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다음부턴 좀 더 세게
지금은 다음 편을 준비하고 계시겠네요.
네. 저희 지금 배우 분들이랑 작가님들 새로 섭외 중에 있어요.
다음 편은 제복 특집이라면서요! ㅋㅋㅋㅋㅋㅋ
맞아요. 제복에도 온갖 다양한 제복들이 많잖아요.
저도 제복 참 좋아하는데요… ^^
원래 <덕지덕지>의 취지가 그렇게 약간 세게 가는 거였는데 처음부터 너무 세면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배우 특집으로 관심을 유도하고, 지금부턴 다양하게 준비하고 있어요.
제복 특집 말고 다른 특집은 어떤 거 생각하세요?
교회 오빠 특집이요. 교회 오빠만 있는 건 아니고 절 오빠, 성당 오빠, 여호와의 증인 오빠, 이슬람 오빠…
ㅋㅋㅋㅋㅋㅋㅋㅋ 여호와의 증인 오빸ㅋㅋㅋㅋㅋㅋㅋ
그런 다양한 종교 오빠 언니들이 나오시는 거죠. 그래서 화보는 교회나 절 성당에서 찍고.
진짜 재밌겠다.
그래서 스트릿 화보처럼 실제 이 교회에서 제일 잘 생긴 오빠, 이런 것들도 조금씩 집어넣을 예정이에요.
제가 다니는 성당에 좋은 오빠 있으면 소개드리고 싶네요.
제보해 주세요.
회의할 때 진짜 재밌을 것 같아요.
이번에도 계속 논의 중인 게 ‘교복을 제복 안에 집어넣느냐’ 에요.
아, 저도 선뜻 답이 안 나오네요.
그죠? 이게 중요한 문제거든요. 교복을 따로 다룰 것인가, 제복 안에 포함시킬 것인가.
저는 따로 빼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아닌가? 왜냐면 교복은 제복 중에서도 제일… ㅋㅋ
가장 핫한 분야기 때문에…!
또 생각하고 계신 특집 있으세요? 이거 생각하는 거 너무 재밌어요.
아이돌 연습생 화보도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이건 남자친구가 생각한 거에요.ㅋㅋㅋㅋㅋ
좋은 것 같아요!!
교복 편일 때는 직접 고등학교로 취재를 나갈 생각이에요. 근데 정작 교복 입고 주로 화보를 찍을 건 나이 든 배우들이에요. 학생의 교복은 너무 뻔하고, 나이 든 사람들이 교복을 입었을 때 그 갭이…
갭 모에…? ㅎㅎㅎㅋㅋㅋㅋㅋㅋㅋㅋ
그쵸ㅋㅋㅋ 제복이 끝나고 다음 호는 강력하게 나오는 게 종교 오빠니까 그거 하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게 교복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진짜 계속 사야겠다.
일곱 권까지 생각하는데, 미중년 편을 해야 해요. 사실 제가 <덕지덕지> 처음 만들게 된 계기가, 제가 미중년 배우들 때문이에요. 제가 특히 일본 미중년 배우들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근데 일본은 연극 배우들이며 영화 배우들이며 화보를 되게 많이 찍더라구요. 잡지도 다양하고, 떡밥도 많고 덕질할 것도 많고 되게 신나는데 한국에는 너무 없어요. 그리고 우리 나라 미중년 화보들은 다 똑같아요. 남자는 수트 입고 담배 물고 있고, 여자 배우들은 드레스 입고 젊은 남자랑 섹시한 포즈 취하고. 이런 것밖에 없는데, 저희가 미중년에게 원하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다양한 화보를 만들고 싶어요.
맞아요.
근데 우리가 그걸 하려면 <덕지덕지>의 입지가 잘 다져져서 인기가 좀 쌓여야 해요. 그래야 제안을 해도 ‘아 그래? 덕지덕지라면 찍어도 되지.’ 이렇게 돼야 할 텐데.
덕후의, 덕질을 위한, 덕질에 의한
처음에 만드시는 것 보고, ‘떡밥이 없으니까 직접 만든다.’ 이런 부분이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덕후의 주체성 같은 느낌도 나고.
사실 저희 화보들도 다 작가님들의 덕질이에요. 왜냐면 저희 시스템이, 작가님들은 배우를 선택할 수 있는데 배우는 작가를 선택할 수 없어요. 그리고 저희가 컨셉 회의를 할 때 배우는 그 회의에 끼질 못해요. 배우는 시키는 대로 해야 돼요.ㅎㅎ 저희는 덕질이 먼저니까요.
원래는 그 쪽에서 나오면 사고, 주는 대로 열심히 받는 거잖아요. 근데 여기는 좋아하는 사람이 주는 거네요. 그러면 다른 팬들 마음도 잘 알 거고.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어. 이런 느낌이죠.
ㅋㅋㅋㅋㅋㅋ 좋다. 그래서 저도 입덕 위기인가 봐요.
입덕 해주세요.ㅎㅎ 사실 이민지 배우나 김꽃비 배우, 전석호 배우 같은 경우는 그래도 좀 유명세가 있잖아요. 근데 다른 배우들은 아직 유명세가 별로 없으니까, 이번 기회를 통해서 좀더 유명해졌으면 좋겠어요.
책은 몇 부 나갔어요?
저희가 500부를 인쇄했는데, 텀블벅으로 예약하신 분들이 160부 정도, 그리고 관계자 분들 드리면 200부 정도 나갔구요. 300부 더 팔면 되는데 지금 독립 출판 서점들에도 입고를 할 예정이라서 빨리 끝날 것 같아요. 다 팔리면 2쇄도 찍을 수 있는데…
와, 2쇄! 축하드려요.
근데 그것도 하려면 다시 모금을… ㅎㅎㅎ 요즘은 제 사비로 제작하고 있어요. 후원을 받으면 제 사비를 회수할 수 있을줄 알았는데… 흡. 근데 그게 안 되더라구요. 제가 너무 무지했어서, 이렇게까지 돈을 많이 쓸 줄은 몰랐어요. 근데 또 퀄리티를 포기할 순 없으니까.
고민 많이 하시겠어요. 그래도 너무 예뻐서 힘드시다가도 나온 거 보면 또 기분 좋아지고 그러지 않으세요?
근데 약간, 약!간 질려요. 계속 봐서… 약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다음 호는 더 다양하게 준비하려구요.
잘 될 것 같아요.
잘 되면 좋죠. 잘 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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