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보면서도 장유유서?

옛 어른 말씀하시길

유교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실천 덕목인 오륜(五倫) 중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어른과 어린아이 사이에는 사회적인 순서와 질서가 있음을 뜻한다. 이를 조금 더 쉽게 풀면, ‘웃어른을 공경하라’라는 말로 치환할 수도 있다. 특히 ‘예’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현재까지도 활발히 통용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하지만 연장자를 받드는 경향을 아름다운 미덕을 제멋대로 쓰는 어른들을 볼 때가 있다. 그들은 대개 형식적으로 일정 이상의 나이를 먹은 덕분에 어른이라 불린다. 하지만 지나온 세월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어른’이 보여야 할 성숙한 모습은 찾기 힘들다. 오로지 연장자라는 이름에 기대어 상대적으로 어린 사람들과의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고만 한다.

 

욕쟁이 할머니가 밖으로 나오는 순간

욕쟁이 할머니는 기본적으로 ‘고연령’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다. 여기에는 상대방이 자신보다 나이가 적으니 의도가 어떻든 간에 욕설이 섞인 발화도 괜찮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누군가는 이를 구수하다거나 정이 넘친다는 등의 표현을 써가며 긍정적으로 포장하지만, 그것은 욕쟁이 할머니가 가진 맥락에 동의했을 때 가능한 합의다. 맥락을 모르는 이에게는 그저 격렬한 언어폭력으로만 느껴질 뿐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연장자의 행동으로 야기된 불편한 상황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만 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사실 정상적인 대화는 아니다 ⓒ웹툰 '츄리닝'

언젠가부터 김수미는 각종 영화, 드라마에서 ‘욕’을 찰지게 잘하는 캐릭터를 맡아왔다. 2003년, 영화 <오! 해피데이>를 시작으로 <마파도>, <가문의 부활>, <사랑이 무서워>, <육혈포 강도단>, 최근작 <헬머니>까지, 수많은 작품에서 과감한 수위를 자랑하는 쌍욕을 선보여왔다. 20년 넘게 ‘일용엄니’로 함께한 <전원일기>가 종영된 다음 해부터 일어난 전격적인 캐릭터 변화였다.

우리나라의 많은 중년/노년 여성 배우들이 작품에서 자주 부여받는 '모성애 넘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전형적인 어머니/할머니 상'에 머물러 있을때 김수미는 독특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그 이상을 소화하는 배우로 거듭났다. 전통적인 역할을 탈피한 김수미의 노력은 인정받아야 마땅하다.?하지만 최근 현실 속 김수미의 몇 가지 행동을 비추어 보면, 이 모든 것이 작품 속에만 존재하는 ‘기믹’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어느새 '욕'은 김수미의 정체성이 되었다. ⓒ영화 '헬머니'

 

어른 말씀이니 들어야 한다?

김수미는 KBS의 파일럿 예능 프로그램인 <나를 돌아봐>에 장동민과 함께 출연한 적이 있다. 그리고 당시 여성혐오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있던 장동민에게 '앞으로 조심하라, 지금 터진 게 차라리 다행이다, 상처받지 말고 기죽지 말라'는 등 특유의 구수한 욕을 섞어가며 그를 위로하는 말을 건냈다. 이 말에 개인 '장동민'은 위안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장동민의 발언을 통해 피해받은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다. 아직 현재진행형인 이슈에 대해서 김수미가 무슨 권리로 면죄부를 발급하는걸까?

김수미의 이 발언은 욕쟁이 할머니가 누구든 자신의 욕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판단하는 오만과도 같다. 그리고 그 오만함 덕분에 우리 사회는 어떤 것이 문제였고, 또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기반으로 사회적인 논의를 진행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겼다. 아직 충분한 논의가 필요한 이슈가, 그것도 공영방송에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 식으로 퉁치듯 취급되고 만 것이다.

김수미는 용서할 권리가 없다 ⓒKBS '나를 돌아봐'

최근 문제가 된 <나를 돌아봐>의 제작발표회를 살펴보자. 김수미는 박명수, 이홍기, 조영남에게 폭언을 퍼부으며 중도 퇴장, 하차, 그리고 하차 번복으로까지 이어진 해프닝을 일으켰다. 물론 이 행동의 배경과 맥락은 존재한다. 제작발표회 전, 김수미는 자신에게 쏟아진 지역 비하 악플에 정신적 충격을 받아 삭발을 감행했고, 실제로 자신이 현장에서 보인 행동은 자신이 봐도 비정상이었다고 인정하였다. 이후, 김수미는 조영남의 회유에 출연 거부를를 철회했고 프로그램은 정상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볼 일이 있다. 실제 프로그램의 연장 선상이라 할 수 있는 제작발표회에서 박명수에게 ‘병신’이라 하고, 조영남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가한 건 막무가내 그 자체였다. 무한도전 토토가가 낳은 히로인 예원이 '언니, 저 마음에 안들죠?' 라는 말 한마디에 나락으로 떨어진 것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대비는 더욱 선명해진다. 과연 김수미가 연장자, 대선배라는 타이틀을 벗어놓고도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예원이 저기에 있었다고 상상해보자. ⓒnewsen

우리, 선은 지킵시다

부부싸움으로 상한 기분을 회사에서 푸는 상사를 아무도 좋아하지 않듯, 아무리 경력이 많고 나이가 많다고 해도 공적인 공간에서 분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특히 방송은 출연진과 수많은 제작진이 함께 약속한 일정에 맞추어 만들어 나가는 무척이나 전문적인 일이다. 이 모든 이와의 약속을 깨고, 아무런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쉬겠다고 선언했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함께한다는 것은 '어른'을 떠나 쉽게 용납될 일이 아니다.

‘웃어른을 공경하라’는 절대 원칙이 아니다. 어린 사람에 비해 웃어른은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것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공경이 성립된다. 하지만 지금의 막무가내 식인 김수미를 통해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도리어 이번에 생긴 선례를 통해 또 다른 무례함이 용인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다. 우리는 어디까지 이런 불편함을 캐릭터로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언제까지 이러한 불편함을 묵과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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