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탄생] 1화: 사랑으로 감당하기 힘든 군대라는 변수
아직도 후회가 많이 남아요
그를 만난 건 홍대 앞 작은 카페에서였다. 어느덧 7년이라며 멋쩍게 웃는 입가로 왠지 모를 회한이 번져나가는 듯했다. 순간 갓 군대를 전역한 듯한 냄새를 느낀 것은 단순한 착각이었을까.
"누나를 처음 만난 건, 2007년이었어요. 수능 끝나자마자 미대 입시 준비한다고 올라왔으니까..한참 추운 겨울이었지요"
단어의 사이에서 당시의 온도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방은 좁은 고시원이었고, 하루 종일 학원에 앉아 있자니 그것도 고역이었지만 저는 아직까지도 그때의 기억이 좋습니다. 제겐 누나와의 소중한 기억으로 채워진 시간이거든요"
한참이나 천장 한 구석을 응시하던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밤낮없이 실기에 매달려 있다 보니 어느덧 제야의 종이 울리고 있더라구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아 학원 빠지고 집에 있었는데, 친구가 나오라고, 술이나 한잔 하자고 불러냈지요. 정말 대충 입고 나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대충 입었던, 그 옷차림까지도 후회가 돼요"
내내 멋쩍은 웃음만을 비추던 그는 들릴 듯 말듯, 짤막한 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나갔더니 홍대 6번출구, 아, 지금은 9번출구 앞 말이에요. 친구 말고도 누가 더 있더라고요. 아직도 생각나요.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따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친구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그게 제가 기억하는 누나의 첫 모습입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그날따라 유달리 더 많은 술을 마셨다고 했다.
"긴장한 탓도 있고, 어쩐지 정면으로는 얼굴을 쳐다보질 못하겠으니 잔을 주고받는 핑계로 슬쩍슬쩍 얼굴을 쳐다봤어요. 뻔히 보이는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그렇지 않았을까요.
술자리가 파하고 이제 헤어지는데, 그 땐 무슨 용기였는지..무턱대고 쫓아가 어깨를 잡았어요. 번호라도 좀 달라고. 황당한 눈으로 잠시 쳐다보다가, 번호를 주더라고요."
사실 일어난 다음날엔?그냥 죽고 싶었어요.?창피해서
멋있는 멘트도 아니었고, 모습도 대충 주워 입고 나간 옷차림. 갓 스무살의 기억은계속 되었다.
"그래서..연락을 하지 말까도 고민했지요. 그런 모습이 첫인상이라는 게 너무 창피했어요. 알잖아요?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거. 애니콜 40자 문자창에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물론 먼저 연락이 오지도 않았죠"
그 다음 말을 어떤 식으로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던 그의 입으로 커피 한 모금이 스쳤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고, 다시 만난 건 중간고사 직전이었을 겁니다. 팀플 중이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오더라고요.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나갔어요.
막상 만나고 보니 서로 얘기도 잘 통했고, 아니 통했다기보다 잘 들어줬어요. 어린 마음에 수줍기도 하고 부끄러워서 주로 듣고만 있었고, 누나는 그런 점들이 좋았다 하니 오히려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식상한 이야기.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만큼은 전형적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사귀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계속 만났어요. 요즘 말로 하자면 '썸'이랄까? 특별한 일 없어도, 그 자체가 좋아서 다음부턴 괜히 문자도 하고. 마침 누나 회사도 홍대 근처였고, 저 역시 그쪽에 살고 있었으니 종종 우연인 척 회사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어요.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을 텐데, 모른 척 맞춰준 게 고맙죠"
그러다 사귀게 된 것은 9월, 누나의 회사 회식자리였다고 했다.
"마침 연락이 왔는데, 근데 왜 있잖아요. 취한 사람들 오타 나는 거. 사실 그거 보고는 더 걱정돼서 챙기려는 마음에 찾아갔어요.근데 회사 회식 자리니까 남자들, 그러니까 직장 동료들도 많고 저는 아직 새파란 대학생이었으니 괜히 위축돼 있었어요.
그런데 자꾸 가라고, 알아서 잘 챙길 거라 하는 말들을 듣다 보니 짜증이 나서 홧김에 말해버렸죠. 누나랑 제가 사귀는 사이인데 챙기기는 누가 챙기냐고"
지금 생각하면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며 그는 부끄러워했다.
"그대로 손을 잡고 나왔어요. 나오자마자 누나가 묻더군요. 방금 그 말. 내가 무슨 의미로 생각해야겠냐고. 평소라면 절대 못할 말을, 흥분한 상태로 대꾸했어요. 난 누나가 그런 사람들 앞에서 비틀거리는 거 보기 싫다. 내가 앞으로 쭉 챙겨주고 싶다고.
사실 고백이랄 것보다는 오히려, 푸념이었다고 해도 되는 말이었고요. 그랬더니 누나가 제 고개를 잡고 눈을 똑바로 마주쳤어요. 그 말 들으러 부른 거라고, 내일부턴 확실히 말해 달라고.."
쉬지 않고 내내 말하던 입을 잠시 멈추고, 그는 다시 목을 축였다. 그의 다음 말이 나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기억을 되살린다는 것은 그날의 감정선과 흐름, 그리고 뒤이어 나올 모든 것들을 함께 마주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의 호흡을 충분히 존중하기로 했다.
누나는 나이도 있었고,?저는 이게 첫 연애였지요
그렇게 시작된 연애 이야기가 궁금했다.
"어떻게 해야 할는지도 몰랐고, 어디가 좋은지도 몰랐어요. 한번은 남산에 갔는데, 나름 알아보고 가도 헤매던 저를 누나는 자연스럽게 근처 맛집이라든가 그런 곳으로 안내했어요.
사실 서툰 저에겐 고맙고 감사한 일인데, 그땐 어린 마음에 이전에 누구랑 왔을까 싶어 짜증 낸 적도 꽤 많았었지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당시의 감정이 묻어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내가 좋다고 말하는 누나가 참, 고마웠죠. 생각할 수록.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 귀엽다면서..참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말 그대로, 세상을 다 가진 기분. 하루 하루가 즐거웠죠. 내가 이 사람과 만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꺼내기 힘든 말을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왜, 그러니까 무엇 때문에 갈라선 것일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에게 아쉬움을 아로새긴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입대를 준비할 때였어요. 집안 사정 때문에 군대를 가야 했는데,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든 미뤄보려고 했는데..집이 어려워졌단 말도 말이지만, 군대도 해결 못한 '어린애'처럼 비춰지는 게, 그게 제일 싫었어요.
말하면 실망할 것 같고..그게 뭔지 참 사람 미치게 만들더라고요. 결국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에야 간신히 말을 꺼냈어요. 나 군대 간다고.."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그는 말을 이어갔다.
"누나는 크게 놀라지도 않았고, 그러냐며 짧게 말했어요. 무덤덤했고, 그런 모습에 왠지 또 울컥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어요. 역시 덤덤하게 말하더라고요. 어쩌기는, 우리도 슬슬 정리해야 하지 않겠냐고..할 말이 없었죠"
내 잘못이 아닌데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냥 무기력하게 만들어요
"물론 알고 있고, 그때도 알고 있었어요. 내가 군대에 가지 않는다고 해도 앞으로 이대로 계속될 거란 보장은 할 수 없다는 것쯤은요. 하지만 적어도 그건 내 문제, 그러니까 내 손 안에 있는 문제인 거잖아요.
하지만 군대라는 건,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냥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주어진 선택지가 없다는 데에 너무 힘이 빠졌습니다"
누나의 얼굴을, 목소리를 마주한 것은 그 자리가 마지막이라 했다. 입대일이 가까워져도,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에 연락해도 닿지 않았고, 업데이트가 싸이월드만 계속해서 들락거렸다며 말하는 그는, 어느새 20대 초반의 남학생이 되어 있었다.
"저라고 왜 다시 만나보려 하지 않았겠어요.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마지막으로 소식을 들은 건 첫 휴가 때, 자대가 광주였는데 본가인 대구로 안 가고 그 길로 바로 서울로 올라갔어요.
집으로 찾아가면서 무턱대고 음성메시지를 남겼어요. 구질구질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으니까.
첫 휴가 나왔다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까 한 번만 보자고, 그럼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을 것 같다며 우리가 무슨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하나 들어온 것뿐이라고, 같이 생각해보자고 했어요. 늘 함께 있었던 그 공원에서 기다린다며….
반나절쯤 지났나, 아니 더 지났을 겁니다. 밤이 된 것도 모르고 쭈그려 앉아 있었는데, 누가 오더라고요? 누나는 아니었고, 누나 동생이었어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지만, 끊을 수는 없었다. 시계를 흘긋 본 그는, 이제 거의 다 끝났다며 조그맣게 웃어 보였다. 어느새 커피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그의 또래였던 동생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랬다. 그 날 이후, 그러니까 군대를 간다고 처음 말한 그 날 이후로 언니가 정말 많이 울었다고.
무척 힘들어했다며 조금만 빨리 만났다면 정말 아무 후회 없이 기다릴 수 있는데, 자기 의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에 자기가 어떤 식으로 변할지 자신이 없었다고,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줄까 봐 힘들어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 말했다.
"할 말이 없었어요. 많이 어렸죠. 정말로 덤덤했을 리가 없었을 텐데. 어떤 사람인지는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었는데..알았다고 하고 그 길로 버스를 탔어요. 제가 군대를 해결하지 못한 시점에서 이미 정해진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그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어른스럽게' 사정을 설명했다고 해서, 이별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의 문제도 아니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다만 '그저 통제할 수 없는' 입대라는 변수는 어떤 사랑에겐 너무나도 큰 재해였다.
그럴 수도 있다고 할까, 괜찮다 힘내라고 할까. 지금 꺼내기엔 모든 말이 다 어설펐다.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단지 까맣게 물든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일 밖에는 주어진 선택지는 없어 보였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말했다.
"딱 8개월이었어요. 절대 길다고는 못할 시간이고, 누군가 한테는 그냥 스쳐 지나간 연애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그래요. 읽다 보니 2부가 찢겨나간 만화책 같은, 그 일이 아니었으면 우리 사이에 어떤 일들이 더 있었을까, 어디에서 무엇을 더 했을까, 어떤 이야기를 더 나누고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었을까.."
어느새 그의 눈가가 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완성하지 못한 그때 그 가능성이 너무 아쉽고,
또 많이 속상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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