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탄생] 2화: 사람은 보지 않고 오로지 학벌만 보더라
"마음이 식었으니 헤어지는 거지 무슨 놈의 이유가 필요해?"
‘어느 겨울, 한 노인이 길에서 얼어 죽었다’ 라는 문장이 있다고 하자. 겨울이니 밖에 있으면 체온이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한 노인은 얼어 죽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고,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이 문장으로는 뭔가 아쉽다.
잠시 문장의 앞을 상상해보자. 만약 ‘아들에게 쫓겨난’과 같은 사연이 있다면 어떨까. 이때부터 이 문제는 단순한 객사가 아니다. 이 시대의 비정함이 만들어낸 윤리적 문제다. ‘겨울이니 밖에 있으면 얼어 죽는다’라는 건조한 사실 안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사연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이별을 두고 ‘사랑이 부족해서’ 라거나, ‘그만큼 좋아하진 않았으니까’라고 말하는 일은 쉽다. 그리고 이런 대답은 딱히 틀린 말이라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계속 되던 맑은 날씨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하늘은 제법 흐렸다. 물컵을 하나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스물한 살의 기억은 이미 지난 지 오래. 이제는 현실의 한 가운데서 신경 쓸 것 많은 20대 중반에 도착해 있었다.
인터뷰이 소개
혜진(가명). 서울 소재 4년제 대학교 재학 중.
수도권 소재 전문대학에 다니는 남자친구를 만났다. 당시 21살, 남자는 25살.
2년 반 가량 교제하다가 이별하였다.
"왜 그런 사람 만나냐고 다들 묻더라"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명문 고등학교를 나와서, 번듯한 '인서울' 4년제를 다니던 혜진의 연애는 축복받지 못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남자친구가 ‘전문대생’이라는 이유였다.
접점이 별로 없었을 텐데, 처음엔 어떻게 만났어?
동아리에서 영화를 찍는데, 남자배우를 구하고 있던 상황이었어. 마침 동아리 친구네 이모가 남자친구네 학교 앞에서 고깃집을 하셨는데, 그 이모가 남자배우 섭외해 놓았다고 고깃집으로 오라셔서 갔었지. 그때 만난 게 처음이었고.
그리고 그리고?
흔하게 밥 먹고 영화 보는 데이트는 잘 못했어. 둘 다 어렸고, 돈이 없었으니까. 근데 불편함은 없었어. 없으면 없는 대로 주로 오빠 연습실에서 놀거나 친구들이랑 같이 사는 자취방에서 음식 만들어 먹고 그랬어. 집 아니면 연습실이 전부였던 것 같아. 카페도 안 가고, 영화관도 안 가고, 딱히 뭘 사먹지도 않았어. 그래도 불만은 없었어. 그냥 같이 있는 게 좋았거든. 오빠 공연 있으면 전부 따라다니고. 사귀는 동안 이런 것들엔 불만이 없었어.
둘은 별 문제가 없었네?
응. 그런데 내 주변 사람들이 많이 더 뭐라고 하더라. 같이 자리에 있었던 동아리 친구는 원래 오빠랑 알던 사이니까 별 말이 없는데, 다른 한 언니가 되게 뭐라고 하더라고.
뭐라고 했는데?
대뜸 ‘혜진아, 왜 그런 사람 만나?’라고 하더라. 솔직히 기분도 상했고,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
‘그런 사람’?
네가 뭐가 부족해서 4년제 다니면서 그런 애를 만나냐는 식으로. 참고로 그 언니 남자친구는 이름 들으면 다 아는 명문대 학생이었어.
속상했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아냐. 나만 좋아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여차하면 내가 먹여 살리면 된다는 생각도 있었을 정도니까? 근데 주변 사람들은 그게 아니더라. 친언니도 뭐라고 했고, 엄마도 말리셨고. 그래도 그냥 웃었어. 다른 생각 안 들만큼 너무 좋아했으니까.
"딱히 축복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건 분명해"
이왕 만나는 거 '번듯한' 사람이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는 걸까.
그랬겠지. 한번은 친척들과 식사를 했는데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어보시더라고. 있다고 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어느 학교 다니는 애냐고 또 물으시고. 그전에 내가 사귀었던 사람이 의대생이었다는 걸 알고 계셨거든.
근데 그 순간 나도 자신 있게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야. 그 사람이 창피해서라기보다 이모가 어떤 반응을 보이실 지 알 것 같으니까. 그래서 머뭇거리다가 A대 다닌다고 말씀 드리니까 역시나 표정이 갑자기 싹 굳으시더라. ‘왜 그런 애를 만나?’라는 그런 표정이었어.
반대로 남자친구는 처음 만났던 고깃집에 놀러 가서 자기 친구들에게 날 여자친구라고 소개하고, 내 학교를 얘기해주니 다들 ‘우와~어떻게 B대생을 만나?’ 거의 100% 이런 반응? 다들 신기해했어. 남자친구는 뿌듯해했고.
너는?
민망했지. B대 별거 없다고 손사래 치고. 사실 나는 무대에 올라가는 그 사람들이 더 대단해 보이기도 했는데, 그런데도 계속 그러니 '다들 왜 그렇게 학교 간판에만 신경을 쓰지? '라는 생각이 들더라.
주변 반응은, 전공이 너무 낯설어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잖아.
전공은 얘기 안 했어. 일단2년제를 안 좋게 생각하신 것 같아. 그냥 어른들 생각엔 전문대는 좀 공부 안 했던 애들, 막말로 '놀았던' 애들로밖에 안 보이니까. 아무런 생각이 없다가도 그런 말을 계속 듣다 보면…
맞아.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도 요즘은 아파트 평수끼리 논다던데. 주변에서 하도 프레임을 씌우니까 없던 편견도 생겨나는 것 같아.
응. 내가 그렇게 귀가 얇은 편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한테 ‘걔는 별로야’ ‘더 괜찮은 사람 만나라’ 이런 얘길 하도 들으니까 그런 말들이 어딘가 맘속에서 자꾸 걸렸어. 사람들에게서 ‘좋은 애인’의 기준은 조건이 80% 이상이었던 것 같아.
그러니까, 더 능력 있고, 더 학벌 좋은 사람. 학교 친구들한테도 남자친구 있다고 하면 ‘어디(학교)야?’가 제일 처음 나오는 질문이었고. 대놓고 학벌 비교하는 애들도 있었어.
어떻게?
너 ‘전 남자친구는 의대생 아니었어?’ 뭐 이런 식.
그런 반응들에 화내거나 하진 않았어?
자기 전공에 열정적인 남자친구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들이 얼마나 노력해서 그 자리에 갔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저렇게 쉽게 무시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일일이 대꾸하지도 않았지.
그래도, 그런 상황들은 계속 스트레스였을 텐데.
어쩔 수 없지. 그런 커다란 편견들을 나 혼자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가 좋아서 시작한 연애였지만, 정작 둘을 괴롭힌 것은 그 사랑을 바라보는 주위의 눈빛이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여대생에게 그런 압박들은 현실이었고, 실제로 그 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왜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서로가 좋아하는 마음 하나만으로는 편히 만날 수 없었던 것일까?
없다가도 자라나는 편견들
부모님과 남자친구, 만난 적 있어?
응. 같이 식사도 했지.
어머니가 남자친구 싫어하셨다며?
초반에는 학벌도 학벌이고, 여러모로 걱정하셨는데 오래 잘 사귀니까 별 말씀은 안 하셨어. 근데 헤어지고 나서 엄마한테 ‘나 헤어졌어’ 하니까 엄마가 ‘네가 올해 들어 한 일 중에 가장 잘했다’고 하시는 거야. 비전도 없고, 술 많이 마시는 것도 싫었다면서.
근데 사실 술은 뭐 학벌 이런 거랑 별로 상관 없는 문제 아니야?
오빠가 좀 술을 좋아하기도 했어. 그런데 그건 그냥 사람마다 다른 거잖아? 그런데도 엄마는 그런 것도 학교랑 연관지어 생각하셨던 것 같아.
헤어진 이유도 술 때문이었다고 했던가?
연기라는 학과 자체가 그런가 봐. 4년제 연기과도 다르지는 않더라고. 다만 난 술에 빠져서 사는 자체가 너무 싫었던 거고. 그래서 많이 싸웠지. 남자친구가 진로도 딱 정하지 않고 그렇게 시간 보내는 게 한심해 보이기도 했어.
무엇보다 술만 마셨다 하면 절반은 연락이 끊기고… 몇 차례 말을 했는데도, 실제로 고쳐지진 않더라. 그러니 종종 ‘만약에 4년제를 다녔어도 이렇게 술을 마셨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무서웠어. 어느새 내가 남자친구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한 번 그렇게 생각하면 끝도 없을 텐데….
그래서 계속 부딪혔던 것 같아. 한번은 ‘공연이 없는 기간에 알바 좀 하면 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가 그게 자존심이 상한다고 그걸로도 싸운 적도 있었어.
자길 무시했다고 생각한 걸까?
나쁘게 말한 것도 아니었거든. 그냥 1,2월에는 공연이 별로 없으니까 단기 알바라도 하라고 권유한 정도였는데. 왜냐면 나도 여름방학 때 단기 알바로 번 돈으로 거의 반년을 쓰니까. 그런 식으로 벌어두면 나중에 좀 여유롭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던 건데 되게 화를 냈어.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아…
주사도 많이 늘었던 것 같아. ‘나는 너 부귀영화 누리게는 못해준다’ 이런 식으로 말하거나 ‘나 돈 많이 못 번다’고. 내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젠, 좋아해도 못 만날 것 같아
그래도 2년이나 넘게 만났잖아. 사실 요즘엔 그렇게 짧은 기간도 아닌데, 결정적으로 헤어지게 된 건 무엇 때문이었어?
그렇게 계속 싸우다가 잠깐 헤어졌는데, 처음엔 내가 다시 잡았어. 근데 술 취한 채로 전화해서는 그간 뭐가 많이 쌓였었는지 갑자기 막 말을 꺼내는 거야. ‘내가 너를 왜 먹여 살려야 되냐’, ‘나는 너를 먹여 살릴 자신도,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끝내자.’ 이런 식으로 말하더라고. 2년을 넘게 만났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너무 어이가 없었지. 그때쯤 헤어지길 결심한 것 같아. 그 말을 하니까 친언니가 얘기를 꺼내더라.
어떤?
사귄 지 100일쯤 됐을 때 오빠랑 친언니랑 같이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남자친구가 술에 만취해서는 언니더러 하는 말이… 날 책임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더라.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받은 압박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오빠도 많은 압박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몰라.
만약 그 오빠가 학벌이 좀 더 좋았다거나 능력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우리 모습이 좀 다르게 보였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사람들의 편견을 계속 마주하면서 나도 모르게 ‘얘는 그 학교 나와서, 어떤 식으로 먹고 살까?’ 이런 생각이 계속 피어났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겠어.
지금 만약에 학벌 차이가 나는 사람 만나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다시 그 시선들을 견딜 자신이 없어. 그 시절 내가 겪었던 그런 부담과 시선들이 과연 이제 와서 사라진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나도 이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입장에서, 더 크게 찾아온다면 모를까.
정말 좋아해도 안 만날 것 같아?
안 만나. 아니 못 만나.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건 어렵지 않다. 열등감에 빠져 현실과 관계에 무책임한 남자가 잘못이라고 할 수도, 부담에 짓눌린 남자를 이해하지 못한 여자가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 좋아 만났다던 그들을 짓눌렀던 ‘현실’의 무게는, 결코 그들만의 탓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만큼 좋아하진 않아서 헤어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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