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탄생] 3화: 우린 잠시 재수라는 같은 출발선에 있었지
당신에게 “재수를 준비하고 있는 어떤 사람을 상상해 보라”고 주문한다면 어떤 사람을 그리겠는가? 꽉 막힌 ‘합격의 문’ 앞에 잔뜩 긴장한 듯 굳은 표정, 연애와는 담을 쌓았을 것 같은 패션, 묵직한 책가방, 축 처진 어깨, 옆구리에 낀 너덜너덜해진 기출문제집, 뉘엿뉘엿 지는 해를 등지고 무거운 걸음으로 걷는, 그런 모습을 그리고 있는가?
노량진 학원가의 어떤 강의들은 그냥 줄만 서면 들어가서 수강해 볼 수 있다. 그 안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방금 전까지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하드 왁스로 세팅한 머리에 세미 정장 차림으로 한껏 멋을 낸 사람들이 보인다. 바로 앞에 선 앳된 여학생들은 시험 범위와 경쟁률 대신 오늘 점심 메뉴를 고민했고, 강의실 맨 뒷자리 모자를 눌러 쓴 어떤 학생은 폰 게임에 푹 빠져 있었다.
그렇게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20대라는 우연한 연령상의 공통점만 가진 채 노량진 학원가에 들어온다. 기다리면 자신을 저 위로 올려 줄 엘리베이터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그들은 계속해서 이른 아침의 학원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시간에서만 시작되는 인연도 있다.
인터뷰이 소개
정훈(가명). 25세. 재수해서 서울 소재 대학교 입학.
재수학원에서 동갑 여자친구를 만나 약 1년 정도 만나다가 이별.
일단 궁금한 건, 어떻게 만났는지?
학원이나 학교에 있다 보면 서로 같이 다니는 애들이 생기잖아요. 저도 한 예닐곱 명 되는 그룹에 끼게 됐는데, 그 그룹에 같이 있던 걔가 저를 본 거죠. 보고서 아, 괜찮은 거 같다, 싶었나 봐요. 그렇게 함께 다니다 걔가 먼저 저보고 사귀자고 했었어요.
걔가 먼저?
그랬죠.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부터 걔는 저한테 진작부터 신호를 줬었는데, 제가 그걸 전혀 포착을 못 하고 그냥 한 몇 달은 계속 받기만 했던 것 같아요.
그런 거 있잖아요, 지우개 없어서 ‘지우개 있는 사람?’ 찾으면 걔가 맨날 제 뒷자리에 있다가 주고, 아니면 뭐 밸런타인 데이다 그러면 걔가 초콜릿을 쫙 돌리는데 저한테는 편의점에서 파는 거 말고 좀 더 좋은 거 있잖아요. 대형 마트에 가야 사는 거. 막 포장에 일본어 써 있고 그런 거를 주거나. 아무래도 학원이다 보니까 그런 사소한 거에서 시작하죠.
신기하다. 재수학원이면 “연애 금지” 규칙 있고 그럴 줄 알았는데.
엄격한 데는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제가 있던 곳은 그렇게 엄격하게 간섭하는 데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연애 자체는 금지되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근데 솔직히 어디든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 것 같아요. 연애할 사람들은 거기서도 다 해요. 같이 놀고 뭐 먹고 나름대로 데이트도 하고.
걔는 널 왜 좋아했던 것 같아?
글쎄, 그렇게 물어보니까 잘 모르겠는데, 얘 말로는 가볍지 않고 진중하게 행동하는 것들이 좋았대요. 놀 땐 그래도 신나게 놀았던 것 같은데… (웃음) 사실 이 친구가 정말 저를 많이 좋아해줬던 게, 본인도 많이 힘들었을 재수 시절 그렇게 먼저 다가오고, 재수 끝나고 대학 가서도 계속 만나고 그러는 거 보통 일은 아니잖아요. 진짜 걔가 잘 해준 거였죠. 정말 좋은 애였어요.
그럼 넌 그 친구 어디가 맘에 들었던 거고?
애가 또 수지 좀 닮았거든요. 농담이고, 사람들한테 예의 바르고 또 적극적이고 밝은 모습들?? 사실 서로 마음만 주고받다 사귀자고 한 것도 얘가 먼저였고, 그래서 그러자 하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저희도 연애를 했으니까요. 근데 이게 되게 딱 그랬어요. 사람이 세상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 진짜 여자친구가 있으니까, 진짜 그렇게 힘이 날 수가 없었죠. 그러니 저도 받은 만큼 더 잘해주고 싶더라고요.
합격 여부가 죄의 유무를 결정하는 '죄수생' 신분에, 연애는 흔히들 말하는 '망하는 지름길'이며 '절대금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길을 돌아간다는 이로 모든 것을 부정 당하는 그 시절, 적어도 학원 안에서만큼은 같은 '죄수'였던 서로만이 온전히 서로를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부모님들은 너네 사귀는 걸 알았어?
왜요?
아니 뭐, 그냥 궁금해서. 그래도 재수할 때는 부모님들 간섭이 좀 있잖아.
저희 집은 제가 누굴 만나건 그런 걸 원체 신경을 안 쓰는 집이라서… 그리고 걔는 재수하던 동안엔 부모님한테 말씀 안 드렸다고 해요. 그래도 집안 수준에 어울리는 남자랑 사귀어야지 왜 그런 애를 사귀고 있냐고 헤어지라고 할 게 뻔했으니까. 애들 연애라고 해도 솔직히 그런 걸 쿨하게 두는 부모가 얼마나 있겠어요.
집안 수준? 걔네 집안이 어땠는데?
뭐랄까, 일단 그때 저희 집은 광명 사는 평범한 집이었고 학원도 광명에 있었는데, 걔는 저기 좋은 동네에 사는 애였어요. 재수해서 간 곳도 세 손가락에 꼽힌다는 학교 음대를 갔거든요. 알고 보니까, 걔네 부모님 포함해서 집안이 다 교수님이시고 그랬던 거예요. 재수를 해서라도 그 정도는 가야 체면이 선다고 말하더라구요.
“제가 어디 가서 그런 앨 만나겠어요.”
와, 어쩌면 서로 평생 못 만날 수도 있었네?
그죠, 진짜 재수학원 같은 데서나 그렇게 조건 없이 만나고 친해지고 그러는 거지, 당장 둘 중 하나가 재수 안 하고 바로 대학 붙었어도 뭐 영영 못 만났을 거구요. 사는 모습이나 환경 자체가 다르니까. 그래도 재수하면서 학원 다닐 땐 매일 같은 곳에서 수업 듣고 쉬는 시간이면 함께 떡볶이 먹고, 그렇게 같은 생활을 하니까 함께 친해질 수 있었죠.
대학 가서도 계속 사귀고 한 거지?
네. 대학 들어가고 나서 저 군대 갈 때까지 반 년 동안은 제가 꼬박꼬박 걔네 학교 근처로 갔어요. 일주일에 한두 번씩 학교 끝나고 만나서 밥 먹고, 어디 가게 구경 다니고 극장 가고 백화점 돌아다니고, 가끔 오락실이나 노래방 가고 그러다가 입학하고 봄 되니까 남산 가고 여의도 가서 자전거 타고 놀고… 그렇게 만났죠.
대학 와서도 되게 잘 맞았던 것 같네?
매 순간이 즐거웠어요. 진짜, 이런 게 사귀는 거구나 싶더라고요. 걔도 연인들끼리라면 꼭 한 번쯤은 해볼 법한 거 다 해 보려고 그랬고. 그렇게 계속 만날 거라 생각했는데, 근데 이제 재수도 끝났고, 대학생이 돼서 만나다 보니 어느 순간 그런 걸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런 거?
두 가지 부담감이 막 생기는 거예요. ‘얘가 지금 나랑 만나는 것 때문에 다른 생활 다 포기하고 이렇게 날 보는 건가?’ 랑, 또 ‘내가 다른 알바를 더 늘리지 않고, 얘를 지금 하는 대로만 계속 만나서 놀 수 있을까?’ 같은.
전자는 이해가 잘 안 가는데.
사실 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대학 붙고 나서 부모님께 저랑 만나는 걸 말씀드렸대요. 그러니까 헤어지라고 대놓고 그러신 건 아니었지만 별로 좋지는 않게 말씀하셨대요. 뭐하러 만나냐는 식? 서운하다고 표현은 안 했지만 좀 씁쓸했죠.
그리고 얘 고등학교 친구들 이야기를 들을 때면 다른 세계 이야기 같았어요. 왜 우스갯소리로 우동을 먹고 싶으면 비행기를 타고 일본을 간다는 말 있잖아요? 근데 충분히 그런 것들이 가능할 법한? 주말에 홍콩 가서 쇼핑하고 온다든지 학교에 차를 끌고 온다든지… 아 확실히 나랑은 뭔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 관계에도 영향이 있었어?
예전에 제가 밥 먹자 어디 갈까 하고 살펴보다가 김밥집을 갔어요. 재수하던 시절엔 자주 갔었으니까, 습관적으로. 그러다 나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얘는 나 아니면 일식집을 갔을 텐데.
에이, 너무 피해의식이다.
아뇨아뇨. 그게 아니라, 걔네 집 수준에선 그게 당연한 일상이었을 거고 사실 얘가 저한테 되게 맞춰 준 건데, 그런 차이가 하나 재수가 끝나면서 둘 느껴지기 시작하니 나도 거기에 맞춰줘야 하는데 하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드는거죠. 눈치가 있다면 당연한거고.
“사실 재수라는 시간이 특수한 시간이었죠”
음…
이 연애를 하면서 느낀 부담들을 더는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서 이건 빨리 헤어지는 게 낫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먼저 헤어지자 말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먼저 정리하려고 마음 굳게 먹고 딱 전화를 걸었죠. 근데 얘가 전화를 받자마자, 저한테 먼저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먼저?
말은 안 했지만 제가 부담스러워 한다는 거나,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당당한 모습을 바랬을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명백한 차이가 느껴지는데… 그러기 힘들죠.
어떻게 보면 그렇게 좋은 애를 놓친 제가 바보 같은 거고. 재수 땐 다 같이 떡볶이 먹고 같은 데서 공부하고 그랬는데, 그것만으로도 좋았는데, 그렇게 계속 살 순 없잖아요? 그래도 그렇게 함께 했던 기억이 정말 고맙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한테 털어놓은 적은 없었어? 재수학원 친구들이라든가.
솔직히 저, 걔 포함해서, 재수 때 알게 된 애들 아무도 안 만나요. 걔들도 이제 대학 가고 나서는 각자 자기 살 길 찾아 가서 바쁘니까 별로 그렇게 안 친하게 됐죠. 그리고 그때 좋았던 친구들을 지금 만난다면, 서로 달라진 것들을 확인하는 그것도 사실 무서워요.
지금은 감정 정리가 된 거야?
어느 정도는요. 그리고 사실 그런 집안에서 그렇게 자란 애가 자기 의지로 절 선택했던 거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마음 주고, 원 없이 연애하고 깨끗이 그만둔 거니까 제가 누굴 원망하거나 미워할 순 없다고 생각해요.
너랑 걔가 어떻게 잘 했더라면, 안 헤어질 수 있었을까?
음, 이미 헤어진 관계에 그런 가정 자체가 무의미한 거 아닐까요?
그리고 재수학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평생 쭉 간다는 건, 솔직히 그거는, 그냥 제 이기심이고 꿈이죠. 재수가 끝났을 때는, 다들 자신의 원래 세계로 돌아갈 테니까요.
엘리베이터1층에서 서로의 목적지를 꿈꿀 동안, 잠시 동안의 인연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내릴 층수는 모두 다르다. 다들 언젠가는 그곳을 비집고 나와 다시 각자의 갈 길로 간다. 마치 그 좁은 재수 강의실에 옹기종기 모인 학생들이, 수업만 끝나면 모두 우르르 나가 버리는 것처럼.
인터뷰가 끝나고 오는 길, 대형학원의 현수막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1년 뒤에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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