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탄생] 4화: 회사는 삼켜버렸다… 우리의 관계를

 

“원래 다 그런 거야”

언제나 그랬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어도 누군가의 희생과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도, 이 말 한마디에 많은 것들이 용서받았고, 부조리 앞에서 조용히 눈 감기를 요구 받았다.

누가 처음 만들어 낸 말일까? 나라를 지키러, 가족을 지키러 떠난 군대에서 모진 구타와 괴롭힘을 당해도 원래 다 그런 거니 참으라던 말은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눈물이 되어 돌아왔다. 아등바등 살아 보겠다고 들어간 회사에서는 어떠한가. 상사가 프로젝트를 통째로 가로채도, 친구들과 소주 한 병 놓고는 '원래 다 그런 거야'라며 그저 삼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원래 다 그런 거야’라는 말 앞에서 무력하게 끝나버린 어떤 연애가 있다.

 

인터뷰이 소개

희주(가명). 24살. 서울 소재 4년제 대학교 졸업 예정.
스무 살 새내기 때 같은 학교를 다니던 6살 연상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1년 3개월 가량 교제 후 이별하였다.

 

갓 대학에 발을 들였던 그녀는 이제 졸업을 앞둔 취준생이 되어 있었다.

6살 연상이면, 쉽게 만나기 힘들었을 텐데?

그때 좀 빡빡한 교양수업을 듣고 있었거든? 조별 프로젝트로 성적이 나오는 수업이었는데 와, 나는 그 때 진짜 충격이었어. 매번 조모임 할 때마다 다섯 명 중에서 딱 두 명 오더라고. 조장이랑 나.

 

그럼 그 조장이?

응. 만나게 된 오빠지. 나야 갓 입학했으니까 아무 것도 몰라서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았고 오빠는 이제 취업이 코앞이라 학점에 한참 신경 쓸 때였지. 그렇게 맨날 둘이서 준비했어.

 

나머지 사람은 뭐하고 있었나 몰라

다들 참여는커녕 학교에도 안 나오던데? 심지어 발표날에도. 아무튼 둘이 다 하느라 자료 쌓아두고 도서관에서 같이 밤도 새고, 맨날 전화하면서 내용 조율하고 주말이면 늘 만나서 회의하고. 거의 한 학기를 함께 붙어 다녔지.

 

그러다가 정도 들고…

서로 잘 맞았나 보다.

사람은 괜찮았어. 자기 미래 잘 준비하고 허튼 짓 안 하고. 막 ‘대단히 좋은 사람’은 아니어도 어느 한 구석 빠지는 데는 없는 사람이랄까? 그보다 사소한 것들을 정말 잘 챙겨줬어.

 

이를테면?

내가 이 사람한테 마음이 갔던 이유이기도 한데, 사실 나는 화려한 거 부담스러워. 막 무슨 날이라고 촛불 켜두고 그러는..으, 진짜 싫다.

근데 이 오빠는, 내가 샤프심 떨어졌던 걸 귀신같이 기억하고선, 다음날 HB/B까지 맞춰서 사다 주는 그런 타입. 내가 지나가는 말로 좋아한다 했던 가수 신곡 나오면 제일 먼저 찾아주기도 했고. 이런 것들이 너무 좋았어. 언제나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증거니까.

 

다만…

다만?

그냥 데이트 자체를 하는 일이 좀 드물고 어려웠어. 그래도 CC니까 학기 중에는 한두 시간씩 보긴 했는데, 그때 오빠는 졸업반이라 취업 때문에 대외활동에 스터디까지 하니 늘 시간이 없었고. 그래서 어디 멀리 놀러 다니거나 그런 건 엄두도 못 냈지. 거의 카페에서 만나 잠깐 이야기하고 그런 식이니까.

나는 데이트를 하면서 서로 더 알아간다고 생각하거든. 이것저것 많이 해 볼 수 있으니까. 근데 그러질 못했어. 대학 와서 첫 연애였는데, 하고 싶은 것들을 다 못하다 보니 많이 아쉽기도 했지. 그래도 무얼 하고 사는지, 얼마나 바쁜지 뻔히 아니까.

 

괜히 징징거리는 어린애로 보이기 싫었어

그래도 나 같으면 많이 서운했겠는데

상황을 이해하니까 또 거기 맞춰서 적응하기도 했던 거지. 요즘 취업이 얼마나 어려워. 그리고 굳이 하루 종일 같이 있지 않아도 좋았어. 그냥 옆에만 있어도 좋았고, 그러다 오빠도 도와주고.

 

어떤 것들?

오빠가 이과라서, 자소서 같은 것들이 약했어. 그런 건 내가 문장이나 내용을 잡아주기도 하고, 취업 준비 한다고 알바도 못 하는데 학원비랑 시험 응시료 때문에 힘들었지. 그래서 데이트 비용은 내가 거의 다 냈던 것 같아. 그래서 라면이나 김밥을 많이 먹었지만..

그리고, 본격적으로 공채 시즌 되니까, 정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니더라. 그게 안쓰러워서 도시락 싸서 갖다 주기도 하고, 카페에서 자소서 쓰고 있다고 하면 찾아가서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거 쥐어주고 나오고 그랬지.

 

요즘 남친 없다고 했지?

뭐래 (웃음).

 

아니 부러워서…

아냐. 나도 솔직히 말하면 ‘취업할 때까지만’ 이라는 생각 하나로 버틴 거야. 취업하고 나면 최소한 주말은 여유가 좀 생기고 달라지지 않을까,

 

“자리만 잡히면
모든 게 좋아질 거라 생각했어.”

 

그랬는데?

하반기에 취업에 성공했어. 오빠가 제일 가고 싶어했던 회사이기도 했고. 카페에서 같이 결과를 확인했는데 보는 순간 내가 먼저 울었어. 그러니 당황해서 왜 우냐고, 좋은 일이니까 웃자고 하는데 오빠도 막 울고..

 

서로 고생 같은 거 생각나서?

그것도 그거고, 그냥 짠했어.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마음 졸이고 고생했는지 아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잘 돼서 좋기도 했고. 여하튼, 신나서 바로 근처 백화점 끌고 가서, 정장 양말도 여러 켤레 사주고 그랬지.

 

왜 하필 양말이야?

남자는 안 보이는 데도 깔끔해야 하니까.

 

세심하구만. 여튼, 그래서 해피엔딩?

아냐. 신입사원이 시간 쉽게 낼 수 없다는 거 알지. 다만, 마음의 여유. 조금 더 나를 신경 써 주고 더 이상 무언가에 쫓길 필요는 없겠다 싶었지. 사실 그게 제일 불만이었어. 오빠는 뭔가 덜 하면 그만큼 뒤쳐지는 것 같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근데 취업하고 나니까, 오히려 그런 여유가 더 없어진 것 같더라. 예전에는 쫓기고 있었다면 취업 후에는 완전히 빨려 있더라고.

 

그런 모습을 확인하면서 뭔가 탁, 끊긴 것 같아.

음…

나도 폰 붙잡고 사는 편 아니고, 연락 크게 신경 안 써. 1분 1초 단위로 폰 붙잡고 있었으면 내가 진작에 싫어했을 걸? 그냥 다 끝나고 가는 길에 문자 한 통 전화 몇 분 이런 걸로 충분해. 그만큼 마음을 쓰는 게 보이니까, 또 어차피 남자들 연락 그렇게 안 하잖아.

근데 연락을 못하는 거랑, 방치하는 건 다르지. 저녁 9-10시쯤 그래도 여유 있겠다 싶은 시간에 전화하면, 목소리가 잔뜩 쳐져서는 뱉는 말 하나하나마다 피곤에 완전 절어서 응, 응 대답만 하더라. 처음엔 무슨 고생을 하나 싶어 마음 아팠지. 하지만 그런 것들이 계속 반복되니까. 일 끝나고 집에 갈 때도 연락 한 통 잘 없었고. 그러다 보면 또 싸우고.

 

그래도 데이트는 좀 더 여유롭지 않았어?

평일에는 회사 끝나면 내가 기다리고 있다 진짜 잠깐 얼굴 보거나, 아니면 주말 밖에는 만나질 못했지. 야근 때문에 평일은 진짜 얼굴만 보는 수준이었고, 심지어 무슨 놈의 회사가 주말에도 전화를 해서 사람을 볶더라.

취업 후엔 극장엘 가본 적이 없어. 업무 특성상 상사 전화 못 받으면 무조건 오빠 잘못이래. “상사가 대체 왜 그래?” 하고 물으니까 되게 슬프게 웃으면서 그러더라고, 이 사람이라고 주말에 일 전화하는 게 좋아서 했겠냐고, 다 클라이언트가 쪼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계속 어쩔 수 없는 상황의 반복이었어”

 

지쳤겠다.

그렇지, 결론적으로는. 지친 건 지친 건데 사실 맥이 풀려서 그랬던 것 같아. 상황이 좋아지리라 믿었는데, 취업만 되면 뭔가 나아질 거라 기대했는데 나아지긴 무슨. 그러니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던 거지 뭐. 그렇게 힘 없는 모습만을 보는 것도 너무 힘들었어.

 

예전도 지금도, 혼자인 것은 똑같더라고

그 문제로 진지하게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어?

없진 않았지. 그런데 결론은 늘 똑같았어. 지금 신입이라 그러니 내가 더 올라갈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거나, 너무 힘들고 내가 더 지치고 피곤해서, 그렇게 신경을 더 쏟을 겨를이 미처 없다는 말로. 결국 예전처럼 나더러 양보하고 이해해 달라는 말로만 끝나니까.

사실 헤어지기 전에, 친한 언니랑 술 마시면서 이런 것들을 울면서 다 털어놓은 적도 있었어. 취준할 때나 지금이나 바쁜 건 마찬가진데, 회사에 가니까 왜 사람이 바뀌는 거냐고. 그런데 그 언니가 웃으면서 그러더라, 네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라고.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정말 비교도 안 되고 그렇게 피곤해하는 게 당연하다고.

 

‘당연하다’

알아 나도, 이런 얘길 하면 다들 그러더라고. 그건 네가 좀 참고 기다려야 하는 건데, 사회생활을 몰라서 그렇다고. 그걸 못 버틴다면 그냥 마음이 거기까지였다는 거라고. 근데 그런 말 들으면 진짜 어이가 없더라.

따져보자고. 남의 돈 먹는 거 쉬운 일 아닌 것도 아는데 꼭 그렇게까지 사람을 몰아야 했을까? 한 사람을 이렇게 ‘갈아 넣어’야 되는 일이라면 과연 그게 정상적인 일일까? 쉽게 들어온 것도 아냐. 죽도록 스펙 따고 취업해도 행복하지가 않아. 거기다 등록금 대출도 갚아야 하는데. 남들도 다 하는 거니 그냥 하래. 뭐 그럼 대체 언제야 마음 편할 수 있는 건데?

 

기대라도 가질 수 있던 예전이 차라리 좋았어

그래서, 그렇게 헤어진 거야?

응. 헤어졌지. 그날도 평일 밤에 퇴근할 때 잠깐 보려고 갔는데, 짧게 말하려고 갔는데 나와서도 계속 핸드폰만 보고 있더라. 아마 회사 연락인 것 같았어. 헤어지자고 말하는 순간에도 회사에 붙잡혀 있던 거지. 그렇게 난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하고. 그래도 꽤 길게 만나서 그런지, 뒤돌아서 나오는 순간엔 눈물이 좀 나긴 하더라.

많은 거 바란 거 아니잖아. 난 그저 내 생일에는 눈치 안 보고 월차를 쓸 수 있었으면 했고, 6시 칼퇴는 아니더라도 7시쯤 돼서는 눈칫밥 안 먹고 퇴근해서 같이 저녁이나 먹었으면 했던 거고. 이게 그렇게나 과분한 일이야?

 

그 사람,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랑 6살 차이니까, 지금은 서른이겠네. 뭐 잘 지내겠지. 결혼할 사람도 있을 거고. 그냥, 잘 지냈으면 좋겠어. 헤어질 때도 그랬고, 지금도 나쁜 감정은 없어. 다만 내가 너무나 힘들었고 고작 둘이서 이런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끝냈던 거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 진짜 죽을 듯 사랑한다면 나와 계속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연애를 그렇게 로미오와 줄리엣 찍듯 해야만 해? 그냥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거잖아? 왜 그렇게까지 절박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걸까?

 

모르겠다. 그냥 잘 살았으면 좋겠어.

이별을 고했던 한 사람은 상대방의 입장과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또 많은 부분을 양보했다. 하지만 건너편의 한 사람은, 자신의 것을 내줄 수 없었다. 아니, 불가능했다.‘원래 다들 그러는’ 취준 생활을 했고, ‘원래 다 그런’ 회사 생활을 했다. 그 결과로 돌아온 것은 이별이었다.

여전히 누군가는 자신의 과거를 훈장처럼 내보이며 그게 뭐 대수냐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 모든 것을 철없는 아이들의 사랑놀음 정도로 치부할 것이다. 잘 알겠다. 더 열심히 살도록 하겠다. 노력하겠다.

참고로 2014년 집계된 서울시 출산율은 0.968명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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