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가을밤, 이 노래를 꺼내먹어요
그런 노래들이 있다.
듣다보면 기억의 책장 하나가 들춰지듯, 그때의 감정과 기억을 온전히 떠올리게 하는 노래가. 흔들리는 낙엽만 봐도 진한 쓸쓸함마저 느껴지는 이 계절에 선선한 가을밤을 닮은 노래 한 곡을 곁들여보자. 추억이 담긴 노래가 함께하기에 우리의 계절은 더욱 아름답게 무르익는다. 가을의 문턱에서, 이 노래들과 함께 각자의 그날을 꺼내먹어 보자.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위로 대신에
2015 월간 윤종신 8월호 <사라진 소녀> with 루싸이트 토끼
“사진 속 소녀 추억이 되어 꿈이 내게 오는 날 멋지게 놓아준 그댈 찾아올게요 . 여인의 모습으로 안녕“
지난 8월, 중학교 동창이 졸업을 했다. 새하얀 리본을 매고 누구보다도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이 소녀는 바로 몇 주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래가 막막하다며 울먹이는 소리로 내게 전화를 하곤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누구보다 더 절실했던 내 친구는 아직 사회인이 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했다.
학교에서 새 학기를 맞이하기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수업 이야기, 동아리 이야기, 남자 친구 이야기를 재잘거리던 내 친구들은 어느새 한숨을 내쉬며 취업 이야기를 한다. 올해 하반기에는 어느 기업이 경쟁률이 세다더라, 요새 인턴은 금턴이라더라, 경영 복전도 소용이 없다더라. 거듭되는 암울한 취준 이야기로 학기를 시작하려던 찰나, 이 노래를 들었다. 커진 날개로 익숙한 새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여자가 되어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이 노래를 듣는 순간 안도감에 눈물이 났다.
나는 왜 익숙함이라는 이름의 새장을 벗어나기도 전에 겁부터 먹었던 걸까. 새장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더 성숙해지려는 준비를 하는 것뿐인데. 여름과 겨울 사이 한 템포 느린 박자로 쉬어가는 계절이 가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지. 오늘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친구에게도 이 노래의 가사를 보내주었다. 나도 너와 같다고. 우리 모두가 성숙해져 돌아오기 위해 조금 아플 뿐이라고. 가정, 학교, 그리고 그 밖의 익숙함에서 떠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이 세상의 모든 소녀들이 이 노래를 통해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모두가 추운 겨울을 위해 준비를 해야 할 때니까.
글/ 윤조
좋아하는 거 하나 없는 메마른 삶 대신에
페퍼톤스 - Ready, Get Set
“지금 여기서 숨이 멎어도 후회 따위는 없어. 불타는 태양 I`m a new black star“
고등학교는 정말 무미건조 했다. 수능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유로 남들과 똑같이 책상 앞에 앉아 공부만 해야 하는. 그러다보니 취미생활 하나 없는 일상의 연속인, 그런 시기. 그렇게 무료한 일상이 계속 되어 갈 때 쯤, 한 친구가 싼 값에 공연을 보러 가자고 했다. 취미도 없었고 계속 무미건조했던 삶을 변화시키고자, 거절하지 않고 바로 응했다. 가격 역시 만 원으로 부담되지 않았다.
그렇게 들어서게 된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 당시 대중음악, 혹은 유명한 팝만 듣던 나에게 '쌈싸페'는 신세계였다. 수많은 인디뮤지션의 존재를 그때서야 알게 됐고, 인디뮤디션의 노래가 무척 좋다는 것도 알게 됐다. 올림픽 공원에서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가수들의 라이브를 듣는 즐거움이란. 그 중 페퍼톤스의 ‘Ready Get Set Go!’는 그 날 내가 들었던 노래 중 가장 행복한 노래였다. 앞으로 방황하는 내게 ‘자! 가자!’고 말해주는 기분으로, 내가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게끔 해주는 노래라고 생각했다.
…물론 의지가 부족해서 학업적으로 크게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페퍼톤스의 노래는 내게 확실히 의미있는 계기였다. 덕후들은 다 알 것이다. 덕질을 하게 되면 정신을 못 차리고 모든 생활이 덕질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그날 굿즈샵에서 처음 사게 된 페퍼톤스의 1,2집을 시작으로 그들의 CD를 사 모으기 시작했고, 그들의 공연을 가게 됐다. 그렇다. 그게 내 인생 첫 번째 덕질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남은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고, 그 결과 수능은 폭망. 그렇게 재수, 그리고 삼수로 이어졌다.
가끔 ‘그 날 공연을 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수능 점수는 조금 올랐을지언정 평생을 함께 할 덕질을 얻지 못 했을 거라 생각하니 아찔하다. 지금 내 삶의 낙을 부여해준 그 때 그곳, 그리고 그 노래. 그 당시 수능이라는 눈 앞의 목표에 힘을 주지는 못했지만(방해했지만), 오히려 지금, 그때보다 더 살기 팍팍한 이 때 오랜 친구처럼 내 옆을 지켜주는 존재로 남아있다.
글/ 수환
온종일 바쁘다는 핑계 대신에
옥상달빛 - 희한한 시대
“눈 뜨고 잘 듣고 목소릴 내보면 그럼 지금보다 나아지겠지 그리고는 천천히 살아가는거지”
선선하게만 느껴졌던 바람이 조금은 춥게 느껴지고, 푸르렀던 잔디밭에는 하나 둘씩 떨어지는 낙엽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던 작년 10월의 어느 날. 나는 아름다운 가을날의 풍경을 뒤로하고, 창문 하나 없는 도서관에 자리잡고 앉아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방에 사는 그 친구는 오늘 잠시 시간 되냐며, 올라온 김에 얼굴이나 보자는 말을 건넸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 대한 반가움보다도 중간고사의 부담감이 더 컸던 탓일까. 고민하다가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친구는 “괜찮아. 원래이 나이되면 부른다고 쉽게 나올 수 없는 거 아니까”라며 웃었다. 우리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고,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10월의 어느 날. 조금은 씁쓸했던 기억이다.
그렇게 계절은 돌고 돌아 다시 가을의 문턱까지 왔다. 여름의 열기를 식혀주는 바람이 불던 지난 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랜만에 라디오를 틀었다. 경쾌한 리듬 너머로 들려오는 슬픈 가사 한 구절이 귀에 박혔다. ‘눈과 귀를 닫고 입을 막으면 행복할거야’ / ‘사랑에 정복당할 시간도 없는 희한한 시대에서 열심히 사는구나’. 처음엔 그저 밝은 멜로디에 매료돼 들었던 이 곡은 작년 가을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고, 점점 내 가슴은 돌 하나 얹어놓은 듯한 묵직한 기분이 들었다. 친구의 만나자는 말 앞에 바쁘다는 핑계를 면죄부로 내밀어버린 내가 바로 가사에 담긴 희한한 시대를 살고 있는,그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깨닫는 순간,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친구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멋쩍게 안부를 물었다. 다행이다. 친구는 조만간 다시 서울로 올라올 예정이란다. 그렇게 멀지 않은 시일내에 친구와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만나면, 그때 미안했다고 꼭 얘기할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바쁘니까 못 본다는 변명 대신, 그저 부르면 만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네게 기억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눈 뜨고, 잘 듣고 목소릴 내보면', 희한한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 지금보다는 나아질테니까.
글/ 연주
너무 늦어버린 위로 대신에
스타러브피쉬 - 미안
“내가 물어보지 않는 이유는 말하지 않는 이유는 너도 나만큼 아프다는 걸 알기에”
“스타러브피쉬 알아?”
“뭔데 그게? 무슨 물고기야?”
“아니, 가수야”
A는 들어보라는 말과 함께 내 귀에 이어폰을 끼워줬다. 3학년 하고도 2학기가 시작하던 날이었다.
방학 내내 못 보던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만났다는 들뜬 마음과 동시에,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함으로 교실은 웅성대고 있었다. 이제 곧 가을이고, 유종의 미를 거둘 시간이 왔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어떤 애가 답했다. 낙엽처럼 스러질 시간이라고. 선생님만 빼고 우리는 와하하 하고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YEPP의 음량 버튼을 꾹 누르기 시작했다. 멀리서 어떤 남자가 걸어오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난 이어폰을 빼며 물었다.
“뭐야 이 질질 짜는 노래는?”
“그냥 들어봐”
“나 이런 훌쩍대는 노래 싫어해”
“슬픈 노래 들으면서 펑펑 울면 좀 나아져”
왜 울었는데, 라고 A에게 물으려다 말았다. 그때의 우리에겐 울 이유가 너무 많았다. 우울한 냄새가 고개를 내미려고 하면 애써 고개를 돌리면서, 그날의 점심 메뉴를 갑자기 꺼내곤 했다. 그런 시간이었다.
수능 날엔 첫눈이 내렸다. A는 덤덤했다. 받아든 성적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학에 가고, A는 재수학원으로 갔다. 조금 시간이 지났다. 카톡을 보다가 재수학원에 간 A가 기억이 났다. 프로필을 누르니 어떤 노래가 프로필 상단에서 꼬물대고 있었다. 그 노래였다. 끝까지 들어봤다. 끝까지 찌질한 가사에, 끝까지 우울한 멜로디. 그야말로 축축 처지는 노래였다. 문득, A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슬픈 노래 들으면서 펑펑 울면 좀 나아져
그때 미처 물어보지 못했던 말. 왜 울었는냐는 그 말에 A는 이미 대답하고 있었다.
이 노래를, A와 같이 들었다면 어땠을까. 조금은 무언가가, 바뀌었을까.
글/ 소현
끝내 전하지 못한 그리움 대신에
뷰렛 - 나는 외로움, 그대는 그리움
“사랑하고 싶지만 그대는 아무것도 원하질 않았어 그것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해”
어떤 사람을 기억할 때, 그 사람을 음악으로 떠올리곤 한다. 예를 들어, 귀여운 친구는 상상밴드의 '피너츠송'을, 비스트를 좋아했던 대학 동기를 떠올리면 '12시 반'이 생각나는 것처럼.
그런 나에게 이 노래를 알려준 사람이 있었다.
동아리에서 보컬을 맡았던 그녀의 노래에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일단 목소리가 정말 좋았고, 무엇보다 슬픈 노래를 부를 때는 가사보다 더 슬픈 미소를 짓곤 했다. 더욱 그녀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바쁜 일이 많다보니 동아리를 잘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와도 멀어지게 되었다. 당연히, 그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 종강이 되어갈 무렵, 술자리에서 그녀를 우연히 볼 수 있었다. 잘 웃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술자리가 길어지고 자연스럽게 노래방을 가게 됐다. 그녀가 '나는 외로움 그대는 그리움'을 부르기 전 까지만 해도 나는 그 노래를 잘 몰랐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꾸만 멀어지는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뷰렛의 보컬 문혜원의 목소리와 거의 판박이였다. 노래를 부르고 난 뒤 그 곡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녀는 원곡이 있다고, 윤하가 커버한 버젼도 좋다고 내가 말해주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에게 이 노래는 이미 그녀의 노래였다.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이번 학기에 교환학생으로 해외에 나갔다.
가을은 우울의 계절인가. 우울할땐 우울한 노래를 듣자. 바닥을 쳐야 위로 올라가지.
나는 외로움 그댄 고독한 등대
그댄 끝없는 동경속에 나를 잠들게 해
글/ 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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