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학과 기숙사 사이에서 고민을 외치다
기숙사라서 기쁜 순간
새로 생긴 부대찌개집에서 친구들과 저녁을 먹은 뒤, 학기 내내 지겹게 다닌 술집으로 왔다. 오기 전부터 머뭇거리던 친구는 급히 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마침 시계바늘은 10시 하고도 30분을 알리고 있었고, 그는 기다렸단듯 일어났다. (빈말로) 한 번 잡아 보다가 보냈다. 얼마 전부터 ‘통학’을 시작한 그 친구는, 지금 서둘러 출발해도 12시가 넘어야 집에 도착할 테니까.
반면, 친구들과 가장 먼저 작별 인사를 하던 나는 그 녀석 어깨를 괜히 툭툭 친다. 여유가 넘친다. 그럴만도 하다. 의정부에서 매일 서울로 입성하던 나는, 이번 학기에 기숙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기숙사를 들어간 이유는 여럿 있었다.
새내기 첫 학기, 선배들이 발을 구르면서 구호를 일사분란 요란하게 외쳤던 대학교 강당에 들어서자마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과가 끝난 다음, 저 사람들과 같이 살아도 괜찮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의정부는 너무도 먼 곳 이었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어쩔 수 없이 형이 뒤늦게 구한 자취방에서 몇 주간 버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것은 생활이 아니었다. 집에 가기 힘들 정도로 취했을 때 가끔 들르던 찜질방에 머무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그 길고 긴 동선을 반복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해 뜨기 전에 일어나서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인천행 지하철을 기다려야 했다. 겨우 열차에 타면, 처음 30분 동안은 자리에 앉는다는 꿈도 꾸지 못했다.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느니 영단어를 외우느니 하는 대단한 사람들이 종종 신문에 소개됐지만, 나는 아침부터 배터리를 다 써 버릴 만큼 핸드폰 액정만 들여다보는게 전부였다.
다른 이유는 아니다. 잠이 왔기 때문이다. 의지가 부족하다, 대중교통 속 현대인들이 소통이 부족하다, 소중한 시간을 쪼개 써라 같은 말들은, 쏟아지는 잠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더 자고 싶어도 수업 시간은 날 기다려주지 않는다. 학교는 저 멀리 있으니, 내가 그만큼 꾸역꾸역 더 준비하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막차를 타고 싶은 순간
자취를 하던 친구들은 야밤에 술자리가 생기면 냅다 달려갔다. 단톡방에서 그 광경을 보고만 있던 나는 참 외로웠다. 더군다나, 정말 큰 맘 먹고 간 술자리에, 이미 내가 낄 틈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할 때, 괜히 자취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드디어 내가 그들처럼 함께 마지막 술잔까지 부딪히게 되었을 때, 참으로 많은 기대를 했었다.
결과는 참으로 변덕스럽지만, 생각보다 크게 유쾌하진 않았다. 의미없이 빈 술병이 늘어났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더니, 더 이상 풀어놓을 못다 한 이야기가 떨어질 즈음에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그런 일들이 매일 같이 반복되곤 했다. 사소한 술 모임뿐이 아니었다. 기숙사에 들어가는 순간 단체 안에서 행동하는 일에서는 나를 어느 부분 지워야 했다.
단체에 적응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다가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싶어 가슴이 멍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지하철은 끊겼는데, 기숙사라는 이유로 밤새 술을 나르던 축제 날의 어느 새벽이라던가, 그렇게 열심히 연습했는데도 똑바로 하라는 말을 들으며 바닥에 엎드려 있었던 연극 개막 직전 날. 그런 순간마다 나는 왜인지 지하철을 타고 싶었던 것이다.
기숙사에 들어가보지 못했을 때는 막연히 ‘집에 가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았다. 기숙사를 보장받고 사람들과 밤을 지새 보니 알 수 있었다. 일단 지하철에 타면, 나의 생각 하나하나를 캐묻고 강요하는 사람도, 계속 맞장구 쳐 주며 마음을 써야 하는 관계도 없게 되는데, 나는 때때로 그 시간을 원했던 것이다.
그 숱한 통학 시간 동안 나는 내가 통학을 버티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어쩌면, 사실은 지하철이 나 같은 사람들을 수도 없이 버텨 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종착역을 빠져 나온 우리가 지친 몸을 추스르며 내일을 위한 발걸음을 천천히 옮길 때까지, 열차는 우리에게 말을 걸지도 않고, 무슨 게임 할 거냐고 묻지도 않고, 그저 충분히 고독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니까.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은 스물 하나.
어젯밤에는 대화를 평소에 많이 하지 못했던 동아리 선배와 밥을 먹었다. 요즘 유행하는 과일소주 대신 커피를 마시면서 캠퍼스 근처를 걸었다. 밤이 깊어지고 바람이 차가워질수록, 우리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말을 했다. 그 근처에 사는 선배와 이렇게 밤중에 이야기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선배에게 카톡이 왔다. 지하철로 통학을 했다면 못 받았을 수도 있는 메시지, 다음에 또 밤에 만나자는 약속.
그러다가도, 사람들 사이의 생활과 관계에서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기면, 그땐 기숙사로 일찍 들어오는 대신 동네를 한 바퀴 도는 버스를 혼자 타곤 한다. 이렇게라도 혼자 있는 기분을 느끼면서. 하루를 어딘가에서 소모한 사람들과, 같은 버스 안에서, 다시 마주치지 않을 기약을 맺는다.
통학도, 기숙사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영화 제목처럼, 언젠가는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알 수 있겠지.
스물 하나의 밤이 이렇게 저물어 간다.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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