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어려운 이야기가 그립다
왜요, 진짜 어려운 이야기 해 드릴까요?
얼떨결에 그렇게 말했다. 아직 안주가 덜 나온 술자리에서, 내 주전공이 철학이라는 얘기가 나왔을 때, ‘그럼 철학과 들어가면 뭐 배워요?’라는 질문을 받았고, “크게 동양철학 서양철학으로 나뉘구요, 서양철학은 크게 존재론 인식론 윤리론 논리학으로 나눠서 배워요”까지만 말했는데,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ㅋㅋㅋ 야 되게 어려운 이야긴데? ㅋㅋㅋㅋㅋ”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맞받아쳤었다.
“ㅋㅋㅋㅋㅋㅋ 진짜 어려운 이야기 해 드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이후 그 술자리에서 내가 뭘 배우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문득 다시 생각이 났고, 괜히 억울했다. 철학 과목 분류까지만 얘기한 건데, 정말 어려운 이야기는 하나도 안 했는데, 왜 이 사람들은 그마저도 어렵다고 받아들였을까?
집에 도착할 때쯤엔 나름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니 지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는 ‘진짜 제대로 어려운’ 이야기들을 많이 못 나눠 본 것이다. 다만 ‘쓸데없이 어려운’ 말들과 ‘나쁘게 쉬운’ 것들에 너무 오래 노출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어렵기만 하면 그저 쓸데없이 어려운 것으로, 쉬운 것이기만 하면 그저 좋게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실제 상황은, 그보다 더 복잡한데도.
제대로 어려운 것은, 골치가 아프지만 쾌적하다
어려운 것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쓸데없이 어려운 것이 있는가 하면, 좋게 어려운 것이 있다. 세상엔 ‘좋은 어려움’들이 분명히 있다. 그것들은 까다롭고, 곧바로 이해되지 않지만, 탁월한 길잡이의 인도를 받아 열심히 따라가다 보면 희한한 재미를 느낄 수가 있다. 배우고 있으면 골치가 아픈데, 짜증스럽지는 않다. 딱히 신경 거슬리는 것이 없고, 내가 잘 이해하기만 하면 정복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준다. 그래서 그 난이도는 긍정적인 것이 된다. “이런 난이도라면 해볼 만한데?”와 같이.
나는 이 긍정적인 느낌을 ‘쾌적함’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간단하다. 수천 년간 그 주제에 관해 인류가 이미 검토를 끝내 놓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좋게 어려운 주제들은 사람들의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해 왔으며, 그 전형적인 물음들에 대한 답도 정리가 다 되어 있고, 앞뒤가 우아하게 들어맞으며, 그 복잡한 이야기가 왜 계속 전해져야 하는지 그 필요성도 시대에 따라 새롭게 제시되어 왔다.
그래서 ‘제대로 어려운 이야기’에는 미스터리가 없다. 시작과 과정과 끝이 명확한 도전 과제로 제시되어 있다. 마치 표지판이 잘 되어 있는 등산로와도 같다.확실히 힘들고, 정복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오랜 세월 여러 사람이 검증한 최적의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게 아닌 것 같은데?’ 같은 군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자기가 힘을 길러서, 어쨌든 끝까지 가기만 하면, 목적을 이룬다.
따지고 보면, 대학이란 바로 이런 종류의 어려움들을 하나씩 정복하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그걸 졸업반이 되어 제1전공 심화과목들을 몰아서 듣다가 겨우 깨우쳤다. 그럼 그 이전 7학기 동안은 뭘 했느냐고? 그냥 나의 사고력을 세상의 흐름과 교수님의 ppt에 내맡겨둔 채 그 어려운 이야기들을 멍 때리며 듣고만 있었다. 그러자 세상은 옳다구나 달려들어 내게 두 가지 이야기를 엄청나게 많이 들려주었다. 쓸데없이 어려운 것들, 그리고 이렇게 쉬울 리 없다고 생각될 만큼 쉽게 만들어진 것들.
쓸데없이 어려운 것은, 우리를 어디로도 데려가지 않는다
내가 멍청하게 감상하고만 있었던 대표적인 책이 바로 ‘맨큐의 경제학’이다. 애초부터 어렴풋하나마 이 책을 상당히 싫어했다. 멍청하게 앉아 ppt를 감상하던 수강생 시절에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지금은 알 것 같다. 이건 괜히 쓸데없이 까다로우면서 딱히 나의 사고를 확장시켜 주지도 않았던, 아주 나쁘게 어려운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러니 어렵다는 느낌과 혐오감을 동시에 가질 수밖에.
쪽지시험 때문에 AVC=MC=P라는 공식 하나 붙잡고 밤을 새다가, 그 증명에 성공하자마자, ‘근데 이게 뭐 하자는 거지’ 싶어 굉장히 허탈했던 기억이 있다. 그 공식 자체는 “본전치기 할 만큼만 받고 팔아라”라는 뜻의, 일반 상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그보다는 수준 높은 것(“본전치기만 해서 어떻게 장사를 하지?”)이었지만, 맨큐의 이론과 연습문제풀이 책만으로는 그 궁금증을 전혀 풀 수가 없었다.
쓸데없이 어려운 이야기는 다들 이렇다. 그 주제에 대한 체계적 인식의 확립 같은 내재적인 목적이 아니라, 특정 신념 체계나 기득권을 강화한다는 외부적인 목적으로 과도한 난해함과 까다로움을 배치하는 것이다. 산에 오르지는 않고 산 중턱 유격장까지만 가서 똥개훈련 받다 내려오는 꼴이다. 열심히 뒹굴며 뭔가를 머리 터지게 배우지만, 정리도 되지 않고 남는 것도 없고 어느 목적지에도 닿지 않는다. 그게 바로 쓸데없는 어려움, 나쁜 어려움이다. 내게는 맨큐의 경제학이 바로 그랬다.
그런데 이것만큼이나 교활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나쁜 쉬움’들이다. 불필요하게 어려운 이야기들은 차라리 우리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보내 주기라도 하지, 나쁘게 쉬운 이야기들은 아예 우리를 엉뚱한 목적지에 데려다 놓기 때문이다. 어렵고 까다롭게 다뤄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걸 무턱대고 죄다 쉽게만 만들기 때문에.
나쁜 쉬움은, 어설픔과 엉뚱함을 양산한다
개인적으로 소위 ‘스타 철학자’ 직종을 가장 싫어한다. 싫은 이유는 간단하다. 이 사람들은 실제로 어려우면서 좋게 어려운 것들을―그런 것들이 진짜배기일 텐데―꼭 쬐끔씩 망가뜨려 소개하기 때문이다. 학계가 인정하는 학자들은 그러지 않는데, 포럼에도 학회에도 얼굴 한 번 안 비추면서 초청강연과 화면상으로만 뻔질나게 나오는 사람들이 꼭 그 짓을 한다.
이 사람들은 실존이니 관념이니 하는 빡센 개념들을 겁도 없이 줄줄 늘어놓는다. 그것도, 여러 번 생각할 필요가 없을 만큼 직선적인 설명으로 말이다. 그게 대중의 열광을 얻는 비결이다. 조금만 게으르게 생각해도 많은 것을 깨우친 듯한 기분을 주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기껏 등산 온 사람들을 정상 직통 케이블카로 몰고 가는 것과 흡사하다. 그리고 케이블카가 ‘등산’ 코스가 아니듯, 이것 역시 전혀 ‘철학함’이 되지 못한다.
어떤 주제나 영역이든, 새로운 깨우침을 얻기 위해 필요한 최저선의 고통과 분량이 있다. 심지어 그것이 제대로 어려운 이야기일 때는 그저 열심히 단계를 밟아 올라 직접 봐야만 되지, 무슨 지름길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스타 철학자들의 케이블카 같은 해설이 이 두 가지를 완전히 묵살하니, 어설프게 지식의 전망대만 밟고 온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그 결과 어설픈 서평과 ‘세줄요약’이 넘쳐나지만, 정작 그게 누가 한 무슨 얘기의 어디를 요약해서 나온 것인지, 그게 얼마나 정확한 요약인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어디 차고 넘치는 게 네이버 블로그에서 퍼온 세줄요약뿐일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온갖 미사여구로 그럴듯하게 써 놓은 일간지 사설들, 무슨무슨 인문학 다락방, 읽을수록 헛갈리는 각종 가입 약관들, 어쭙잖은 예술작품 해설서, 나열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아주 비관적으로만 보자면, 지금 우리는 아무 보람도 주지 않는 난해함과 아무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 평이함에 둘러싸여, 머리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매일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더욱, 제대로 어려운 이야기를 자꾸 시도하자
그렇게 생각해 보면, 내가 내 머리로 이해한 걸 내 입으로 말하는 게 사람들에게는 신기해 보일 만도 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몇 번의 클릭과 터치만으로 모든 걸 너무 쉽게 알 수 있는 세상이면서, 동시에 모든 게 우리의 일상적 감각 이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일정 정도 어려운 이야기를 일정 정도로 충분히 어렵게 알아듣고 말한다는 게, 상당히 대단한 일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요청하고 싶다. 어느 정도의 어려움은 힘을 써서 공부하고 암기하는 버릇을 들이자고, 좋게 어려운 것들을 굳이 찾고, 독파하며, 썩 불쾌하지 않은 어려움이라면 끝까지 도전해 보자고 말이다. 실천 방법은 많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제목에 적혀 있는 글보다는 좀더 어려운 글을 읽고, 모두가 인정하는 석학이 직접 강연하는 강연을 끝까지 들어 보고, 사람들이 제목만 알고 있는 책을 실제로 열어 보는 식이다. 그래야, 우리를 바보 내지 헛똑똑이 만드는 이 세상에서 최소한의 지적 품위를 지키고 살 수가 있다.
술을 마시고 늦게 집에 들어와 잠자리에 누운 그 날, 나도 그 실천을 위해 한 가지를 다짐했다. 썩 내키지 않는 술자리에서 철학과에 대해 물어보면 점 치는 법 배워서 철학관 차린다는 드립을 쳐야지.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은 사람들이 순수하게 질문해 오면, 제대로 어려운 철학 이야기 한 토막을 해 줘야겠다. 그러려면 지금부터 좋게 어려운 주제를 하나 제대로 복습해 놔야겠군, 하고 그냥 곯아떨어져 버리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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