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찌르는 송곳이 미우시다면

그것은 처음 볼 때 굉장히 놀랍게 생겼다

고등학교 3학년, 국어 수업 시간이었다.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언어영역 문제집을 꺼내 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던진 화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선생님은 그해 대학 거부 선언을 한 김예슬의 대자보를 읽어주었다.

“오늘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머리가 띵했다. 선생님의 낭독은 이어졌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임을 마주하고 있다.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중략)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大學(대학)’ 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중략) 나는 오늘 대학을 거부한다.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떡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취업률이라는 명목 하에 그해 중앙대학교는 77개 학과를 44개로 통폐합했다. 강원대학교, 건국대학교, 청주대학교에서도 비슷한 소식이 들려왔다. 학교 발전을 이유로,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구조조정과 기초학문 축소가 잦아졌다.

중고등학교 내내 대학 입시에만 매달려 왔던 나의 기대가 기어이 무너졌다. 우골탑이라고 불리는 대학이라지만, 그 비싼 대가만큼 배워 얻어갈 수 있는 게 있다고 믿고 중고등학교 내내 입시에만 매달려 왔는데. 그것마저도 결국은, 이를테면 기업들을 위한 ‘채용 기준 등급’ 따위일 뿐이었다. 고민했다. 이런 대학엘 가야만 하는 건지, 다른 길은 없는 건지. 과연 대학에서 내가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배울 수는 있는 것인지.

“지가 안 꿀리는 학교를 갔으면 자퇴를 하겠어?” ⓒ국민일보

고민은 잠시였다. 이윽고 뒤에서 급우들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저 사람 그냥 관심 받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예요?” 하는 비아냥부터 “책 팔려고 그러는 것”이라는 억측, “원래 그러려고 대학 가는 거 아니냐”는 물음, “고려대니까 저런 소리가 먹히는 거지”라는 나름의 비판까지.

그 비아냥, 비판, 비난 앞에서 나는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일하고 계실 두 분. 그 기대. 그리고 내가 지난 몇 년간 쏟아온 노력과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몇 발자국만 더 가면 들어갈지 모를 학벌이라는 길을 포기하기는 너무 아까웠다. 나는 옳음을 위해 남들과 다르게 살기로 결정하기엔 너무 비겁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어코 뭔가를 뚫고 나온다

그래서 그대로 대학생이 되었고 몇 년이 흘렀다. 대학생인 것이 때로는 부끄러웠고, 대학생이 가질 수 있는 특권에 몸서리쳤으며, 대학생이라도 불투명한 미래에 치를 떨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 보게 된 드라마의 대사 한 마디가 콕, 하고 박혔다.

“분명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제 스스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 걸음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최규석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송곳>의 대사였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그때 그 국어선생님이 소개해 줬던 사람은 이 학벌 사회를 뚫고 나온 송곳 같은 존재였구나. 웹툰 속에서 주인공 이수인은 송곳 같은 사람이었다. 투사가 꼰대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애주기의 일부인 이곳에서, 그는 오랫동안 송곳으로 남아 있었다. 사회의 당연한 부조리를, 싱싱한 부패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가 스무 살에 만났던, 한 친구도 그랬다. 그는 청소년 인권 운동가였다. 다니던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한 단체에서 청소년 인권을 위해 아주 오랫동안 일해오고 있었다. 약간의 차비 정도를 제외하면, 보수나 임금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황스럽고, 어려운일도 적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학칙으로 학생들을 괴롭히던 한 학교의 교장과 면담을 하러 갔을 때는일이 잘 풀리지 않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계속했다. 계속, 했다.

ⓒ강의석필름

대학교 1학년, 친구 따라 청강을 갔다가 우연히 듣게 된 수업의 교수님도 그런 분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노동법에 대해 강연해 온 그는, 학생들에게 노동조합의 필요성과, 노동운동이 가지는 의미를 설파하곤 했다. 나는 교수님의 권유대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집회에 나가보았고, 저들은 뉴스와 신문에서 말하는대로 그저 빨갱이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이유로 싸우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스무 살의 끝 무렵, 대학 거부 선언에 동참한 친구들이 있었다. 김예슬만 대학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수능이 가까워올 때마다 ‘대학에 가지 않겠다’, ‘대학을 그만두자’라는 외침을 계속하는 이들이 있다. 내 친구 몇도 그랬다. 수능을 준비하던 한 친구는 수능 시험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학을 휴학 중이던 한 친구는 학교에서 자퇴했다. 학벌이, 학력이 가장 강력한 인증 중 하나가 되는 세계에서, 그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학거부를 선언함으로써 그 학벌사회를 뚫고 나와 그 모순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교육공동체 벗

내가 대학거부를 선언했던 김예슬 이후로 수없이 목격한 그들, 내가 포기한, 내가 가지 못한 길을 가는 송곳들이었다. 마치 이수인 자신을 그렇게 불렀듯이,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또 그런 자신에게도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로서 말이다. 알면서도 외면했던, 돕지 못해 부러 어색했던 사람들.

 

그것은 애초에 불편과 변화를 만들도록 되어 있다

그게 바로 내가 그들을 용기 있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그들이라고 싸우고 싶어서, 싸움을 즐겨서 커다란 것들을 향해 맨몸을 부딪히는 건 아닐 터이다. 그들은 내가 두려워서 걷지 못하는 길 위에 서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든다. <송곳> 속 구고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싸움을 싫어하지만 싸움을 피하지는 않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바닥에 돋아난 날카로운 돌부리 같아서, 그들을 무심히 지나치려던 사람들의 신발을 뚫고 들어가곤 한다. 그래서 불편을 주고 욕을 듣는다. 왜 굳이 들쑤시지 않아도 되는 곳을 아프게 하느냐고, 분위기만 망친다고. 애들이 공부나 해야지, 우리 애들은 인권 같은 거 필요 없다고. 계약 기간이 끝나서 나가라는 걸 왜 부당 해고라고 선동질이냐고. 그냥 관행이니까, 상관 없는 사람은 끼어들지 말라고. 왜 하필 모두 열심히 준비한 수능날에 그러냐고. 어차피 가 봐야 지잡대인 실력이면 조용히 있으라고.

ⓒ오마이뉴스 권우성

하지만 그들은 예삿일로 마주치는 악플, 비난, 빨갱이라는 누명, 배후가 누구냐는 취조에도 굴하지 않고 그런 삶을 묵묵히 살아간다. 자신만을 위해 택한 길도 아니었을 것이고, 자신이 잘 살자고 택한 일도 아니었을 텐데. 누가 돈을 주지도, 칭찬을 해 주지도 않는 삶인데. 그들은 그럼에도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그들이 지켜온 신념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고 나아간다. 왜냐하면, 세상을 바꾸어 왔던 쪽은 늘 송곳과 같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하지 않았다면, 꽤 오랫동안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이 무엇인지 알지도, 그의 혜택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80년 광주에서 죽어간 이들이 없었다면 이 사회의 민주주의는 더 쉽게 위협당했을지 모를 일이다. 청소년 인권 운동을 하던 친구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과연 학생 인권 조례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학교가 깎아준 머리를 하고, 교복 위에 패딩 하나 걸치지 못한 채 덜덜 떨며 등교한 뒤, 밤 11시가 되어서야 귀가하는 것이 반인권적임을 이제는 법이 증명하고 있다.

누가 그랬던가?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내가 알고 있던 주변의 송곳들도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학 거부를 한 친구들도 그랬다. 아직까지 한국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학벌주의의 사회이지만, 자기들을 보고 사람들이 대학교와 학벌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됐을 것이라고. 앞서 소개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던 그 교수님 역시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이제는 모여서 노동법 공부했다고 끌려가서 고문당하지 않잖아요.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건 사회의 걸림돌로 취급 받던 노동자들이 피 흘려가며 이룩한 겁니다.”

 

지금도 그것은 다른 어딘가를 뚫고 나오려 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세상은 그를 포함한 많은 송곳들이 바꿔 왔다. 그리고 여전히, 어떤 송곳들은 우리 사회를 날카롭게 찌르고 있다. 동국대에서 50일 가까이 단식을 벌이고 있는 김건중 부총학생회장이 그렇다. 그는 열여덟 차례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알려진 총장 보광스님과, 문화재인 탱화를 절도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이사장 일면스님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계속된 단식으로 그의 체중은 30kg이나 줄었다. 몸에는 붉은색 반점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심한 저혈압을 앓고 있다.

어떤 송곳의 단식은 이사장을 통사정하게 만든다 ⓒ민중의소리 옥기원

어떤 이들은, 그게 그렇게 큰일이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쉽게 눈감아 버릴지 모른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문제냐고, 왜 그렇게 쉽게 목숨을 거느냐며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물과 소금만을 섭취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15년만에 열린 학생총회에서 나온 의견을 쉽게 외면해버리는 학교 때문이다. 그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학교에는 주인이 없어야 한다”라며, 이사장과 총장, 재단이 학교의 주인 행세를 비판했다.

그 덕분일까, 하나둘씩 동참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최장훈 일반대학원 총학생회장은 12월 3일 열릴 이사회에서 보광스님과 일면스님이 해임되지 않는다면 투신하겠다는 뜻까지 밝혔다. 그러더니, 이제는 동국대학교 이사로 재직 중인 미산스님까지 “우리 모두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라며 단식에 함께했다. 지금까지 한만수 동국대 교수회장 등 교수 2명과 스님 3명, 교직원 1명이 동조단식에 나섰다. 뿐만 아니라 ‘동국대 84학번 동기회’와 불교 단체들도 성명서를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이수인이 그랬던 것처럼, 구고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 역시 세상을 조금씩, 바꾸고 있는 중이다. 송곳이라는 연장이 그러듯이, 바뀔 것 같지 않은 어떤 두꺼움을 끝내 뚫고 나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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