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25살은?
이름만 대면 알 법한 명사들에게
“당신은 25세 시절에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라고 물어봤다.
되돌아온 서면 답변들이 너무도 “리얼”하고 위로가 되는지라,
띄어쓰기 수정 하나 없이 원문 그대로 싣기로 했다.
마광수
나는 25 살 때(1976)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에 다니고 있었습니다.?부선망 독자라서 병역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후 1975년에 방위병으로 복무했지요.박사과정에는 1976년 3월에 입학했는데, 그때부터 여러 대학에 시간강사로 출강했죠.그리고 고교생 국어 과외교사로도 일하여 학비는 내가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그저 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자격조건을 채우기 위해 박사과정에 들어갔을 뿐이라서 강의를 통해 배운 것보다는 다양한 독서를 통해 여러 지식을 섭렵하고 있었고, 또 시인이 되기 위해서 습작을 많이 해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식 시인으로는 26살 때 등단했지요.) 그 당시 빼놓을 수 없는 일은 내가 열렬히 연애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신적 사랑이 아니라 상당히 변태적인 육체적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연애경험은 내가 후에 가서 섹스를 주제로 하는 시와 소설, 수필 등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현민(질풍기획 작가)
에…그냥 멍~하니 회사가 다니고. 야근 있으면 투덜대고…. 특별할 것 없이 지내서^^;;;
가끔 그림연습이나 영어공부를 하긴 했습니다;
2년제 졸업하자마자 1개월만에 궁대가서 제대하자마자 1개월만에 취직했거든요 ㅎㅎ
서울 소방관(트위터리안)
29세때 소방관이 되었고, 25세때는 여러 직장을 전전하고 있었습니다.
영화판에서 촬영스탭으로도 일했고, 웨딩 촬영도 알바로 했습니다.
그전엔 지방에서 공장 노동자로도 일 했습니다. 수고하세요.
이승한(TV칼럼니스트)
스물 다섯에 난 이등병이었다. 천성이 아웃사이더인 터라 적응은 힘들었고, 고학력자 동기들 중 대학교 중퇴는 나뿐이어서 내 미래만 불투명한 것 같았다. 글을 쓰며 살 수 있을 거란 생각 따윈 하지 못했다. 부대에서 처음 틀어본 TV엔 숭례문이 불타는 장면이 중계되고 있었다. 꼭 내 인생 같았다.
정철(카피라이터)
제대를 했다. 먹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월급 받고 글 쓰는 직업은 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내가 경제학과 출신이라는 것이 생각났다(실제로는 경제포기학과였지만). 어쨌든 경제학과 졸업장을 들고 있었으니 대기업에 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 기업에 가기로 약속했다. 이대로 샐러리맨이 되는구나, 생각하며 학과 사무실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오른쪽 벽을 보며 걷고 있었다. 그것이 내 운명을 결정지었다. 만약 왼쪽 벽을 보며 걸어 나왔다면, 내 인생은 지금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카피라이터 추천! 오른쪽 벽에는 이 일곱 글자가 크게 새겨진 포스터 하나가 붙어 있었고, 순간 나는 그것에 빨려 들어갔다. 태어나서 처음 카피라이터라는 단어와 만나는 순간이었다. 카피가 뭔지는 몰랐지만 라이터는 뭔가 글 쓰는 일일 것 같았다. 나는 그 포스터를 붙인 교직원에게 물어 그것이 광고를 만드는 직업이라는 대답을 받아냈고, 그를 졸라 추천서도 한 장 받아냈다.
운명은 내게 장난을 쳤다. 처음 가기로 한 기업의 면접과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시험이 한날한시로 겹친 것이다. 선택을 해야 했다. 안정이냐 모험이냐. 지구촌을 뛰어다니는 무역쟁이가 될 것인가, 연필에게 뛰어다니라고 명령하는 광고쟁이가 될 것인가.
내가 왜 오른쪽 벽을 보고 걸었을까 생각해봤다. 그것은 우연만은 아니었을 거야. 글 쓰는 일을 가슴에 늘 품고 다녔기에 운명처럼 오른쪽 벽을 바라본 거야. 글 쓰는 일을 꼭 하고 싶었기에 운명처럼 카피라이터라는 글자가 내 눈 속으로 빨려 들어온 거야. 그러자 안개가 걷히고 선택이 분명해졌다. 나는 넥타이 대신 모험을 선택했다.
결국 맨 꼴찌로 광고회사에 합격했다. 그래서 첫 직업이 카피라이터였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카피라이터 명함을 받고 6개월쯤 되었을 때, 내 글이 소설보다 카피와 궁합이 더 잘 맞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후엔 다른 곳에 눈길 주지 않고 이 길만을 달려왔다. 최근에는 작가 일을 겸하고 있다. 카피라이터로서의 훈련과 경험이 이를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 내게 직업을 찾아준 오른쪽 벽이 이제 내게 인생 2모작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고맙다, 오른쪽 벽.
정유희 (월간 PAPER 기자)
스물다섯, 지금 생각해보면 구상유취 그 자체. 라임향이 나는 혈청, 타오르는 얼음, 죽 쒀서 개주기, 엎어져 깨진 무르팍 너를 향해 달려가다 또 깨먹기, 개똥밭에서 구르기, 거절당할 사랑만 집착하는 거절 중독증, 이윽고 환한 어둠…. 시간은 이구아수 폭포처럼 거침없이 흘러 정신이 들자, 내 나이 마흔이 되었네. 그 무렵 우리가 웃으며 경멸했던 괴물 같은 어른이 되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중이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여전히 이생에서 철들긴 글러 먹은 붙박이 스물다섯.
석금호(산돌커뮤니케이션 대표)
이번 인터뷰는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20대 때 제가 한 것이라고는 인생을 고민하며 술로 세월을 보낸 것 밖에 없어 할 이야기가 없답니다. ㅎㅎ
황우여(새누리당 前 대표)
군복무중이었습니다. 해병 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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