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탐사대] 당신은 노량진에서 여의도로 걸어갈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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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여의도에서 노량진까지 걸어갔는지
그게 벌써 작년 3월 초의 일이다. 공덕 근처 어딘가에서 갑자기 시간이 비어 어딜 갈까 고민하던 차에, SNS로만 알고 지내는 "랜선친구" 고시생 한 명이 트윗을 올린 걸 봤다. "외롭다... 오늘 4시까지 노량진 롯데리아 오시는 분께 커피 사드립니다." 그래?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경로 검색을 했다. 여의도역 근처에서 버스를 내려 샛강을 가로질러 노량진역으로 걸어가란다. 지도 앱으로만 보면 도보 10분도 안 돼 보이는 거리. 과감하게 출발했다.
자랑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짧게 요약하자면, 그 길은 극한직업 수준의 개고생이었다. 63빌딩처럼 번쩍거리는 여의도를 뒤로하고, 좌우 빈틈이 거의 없는 차도를 따라 노량진 방면 지하차도를 통과하면, 노량진이 나오는 게 아니다. 아무도 걸어서 갈 수 없는 왕복 8차선의 올림픽대로가 나온다. 쏟아지는 매연과 먼지, 무섭게 달리는 각종 차량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사람 약올리는 듯 서 있는 각종 빌딩들을 보았을 때,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결국 1인플 뚜벅이(?)의 객기로 그 길을 무단 횡단하고서야, 그리고 빌딩들의 뒤편을 요리조리 비집고 나와서야 노량진역 앞으로 겨우 나올 수 있었다. 그걸 결행하기 전 대로변 갓길에 잠시 5톤 트럭을 세워둔 기사님에게 길을 물어봤었다. "여기서 건너가는 거는... 길이... 없지, 아마도?" 그 무심한 답을 들었을 땐, 잠시나마 꽤 절망적이었다. 문자 그대로 앞길이 막막했다. 이 나이 먹고 이런 데서 오도가도 못 하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지도가 알려주는 대로 앞만 보고 갔더니
그런데, 가라는 대로 따라와서 여기까지 왔는데 앞길이 탁 막히는 경우가 이런 비일상적인 때 말고도 있다. 사실, 아주 일상적으로 여러 사람에게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 우리 청년들의 진로(career) 말이다. 우리는 당연히 모두가 이렇게 가는 줄 알고 인생길 첫걸음을 떼어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게 목적지의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안타깝고 이상한 것이다.
그 험난한 과정을 거쳐 끝내 노량진 롯데리아에 헐떡이며 도착했을 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그 친구에게 줄줄이 다 푸념했을 때 그 고시생 친구가 태연하게 커피를 홀짝이고 새삼스럽게 던진 질문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거기 못 건너는 길인데. 왜 그렇게 왔어요?”
어, 그러게요. 듣고 보니 참말 정곡을 찌르는 물음이었다. 내가 건너와 봐서 뼈저리게 알고 보고 느낀 대로, 아무리 여의도에서 노량진 가는 길이 급한들 이건 사람이 갈 길이 못 된다. 자기 마음대로 10분간 운전할 수 있는 자동차가 있다면 모를까. 그런데 난 왜 이 길대로 따라왔지?
굳이 꼽아 보자면 두 가지가 문제였다. 하나는 제대로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길찾기 애플리케이션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것만 철석같이 믿고 주변을 둘러보지 않은 나였다.
업데이트 안 된 지도가 무엇의 비유인지는 명백하다. 길을 알려주기는 알려주는데, 예전 경로 정보대로 알려주는 존재들 말이다. 물론 도로나 사람의 인생 경로가 마구잡이로 변하는 것은 아니니까 어느 정도 맞는 말들이 있긴 하다. 문제는, 그들이 ‘여기서부터는 잘은 몰라도 대충 이렇게 가면 될 걸’ 따위 무책임한 어림짐작으로 길 안내를 끝내고는, 기어코 업데이트는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제도나 시스템일 수도 있고, 사상일 수도 있고, 정치가, 작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교수, 전문가, 기자, “파워블로거” 또는 SNS 스타일 수도 있다. 뭐가 되었든, 그(것)들이 지금 노량진과 여의도 사이에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지, 지금 20대가 얼마나 암울한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지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 이토록 부자연스러운 점선의 직선 경로가 나오고, 비정규직 최대 4년 보장 법안에 “장그래법”이란 이름이 붙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시금 힘주어 강조한다. 열정과 패기로 덤비면 못 갈 것 없지 않느냐고. 하면 된다고. 가 보라고.
돌아가도 되는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하지만, 도저히 곧장 갈 수 없어 보이는 모든 곳엔 사실 돌아가는 길이 있고, 시간은 좀 더 오래 걸려도 그 길이 더 나을 때도 많다. 굳이 ‘열정 패기’까지 걸고 가장 빠른 길로 가야만 하는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건 노량진과 여의도 사이도 마침 꼭 그랬다. 여의상류 지하차도 출구 근방에는 이런 경고문이 걸려 있다. 처음 여길 지나칠 때는 너무 절박하게 앞만 보고 가느라 있는 줄도 몰랐던 동작경찰서 이름의 현수막.
“시민 여러분, 교통사고 예방을 위해 보행자 도로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한번 지나가야 했던 내 입장에서 이 경고문이 어떤 느낌을 줬는지 아는가? 배반감이었다. 진심으로, 저걸 읽은 순간 생각했다. “뭐? 여기에 보행자 도로가 있어? 여길 지나가는 다른 길이 가능해?”
왜 안 가능하겠는가? 인접한 주요 지역 사이에 8차선 도로가 놓여 있는데, 여기에 뭐가 아무것도 없으리라고 믿는 게 더 바보스럽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방금 전역한 말년 병장처럼 노량진과 여의도와 샛강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상태였으므로, 그저 복학생처럼 얼떨떨해져서 지도 안내와 정면만을 보고 걸어갔었다. 분명 어딘가에 있을, ‘돌아가도 좀 더 안전한 길’의 존재는 생각해볼 새도 없이.
멀고 안전한 길, 내가 못 갔던 그리고 지금 우리 세대가 잃어버린 진로란 바로 이것이다. 모든 청춘의 길이 될 수는 없는 삶의 방식이 분명 있다. 무슨 명문대 경영학과, 토플 만점 오픽 만점, 무슨무슨 나라 여행, 신입이지만 경력 5년차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지름길(처럼 보이는 것)이라는 이유로, 지금 세상 돌아가는 상황이 업데이트되지 않은 ‘지도’들이 그 경로를 무작정 안내하고 있고, 우리는 다들 얼떨떨해져 그대로 따라가다가 안전사고를 당하는 중이다.
노량진에서 여의도로 가고 싶은가? 대방역으로 가서 마을버스나 도보로 여의교를 건너는 게 낫다. 아니면 그냥 9호선 타고 한 정거장 가라. 지도상의 지름길은 아니겠지만, 조만간 여의도에 진입하는 건 매한가지다. 우리에게 권장되는 삶의 방식도 이렇게 합리적일 수는 없는 걸까? 다수의 청년에게 다짜고짜 ‘제2의 장그래’가 되기를 종용하는 세상과, 그들이 각자의 속도로 언젠가 목적지에 다다르도록 안내하는 세상, 어느 것이 정말 우리를 위한 길일까?
잘 모르시는 길이라면, 알아서 가게 해 주세요
나는 고시촌에서 도통 나올 줄 모르는 그 친구가, 전형적인 지름길 선택형이라고 생각했었다. ‘고시 합격 → 안정된 삶 골인’이야말로 모든 부모님들이 한 번쯤은 다 설득해 보는 인생 지름길 아니던가. 나도 그를 그런 부류려니 생각했는데, 그가 자기 말버릇에 대해 설명해 준 이후로는 좀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근데 전 사실 합격 수기 쓰는 게 (고시 생활의) 목표라서요.”
그의 설명은 이렇다. 합격 수기들은 기만적이다. 이렇게 고생하는 사람이 뻔히 있고, 고생인 거 모두가 아는데, 합격자들은 그런 내용은 싹 빼고 노력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시가 인생 지름길인 줄 아는데, 꼭 그런 건 아니라고 알리기 위해 자기가 수기를 쓰겠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의 인생 계획 역시 나의 현재 진로와 조금 비슷했다. 온 세상이 더 좋은 곳을 향한 ‘지름길’이라고 가리키는 어떤 경로를, 직접 끝까지 가 본 다음에, 이 길이 모두가 따라갈 만한 길은 아니라고, 사실 얼마나 힘든 길인지를 쭉 고발한 다음, 가던 길 가는 것 말이다.
좀더 다양한 종류의 삶이, 진로가, 방향이, 목적지가 가능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우리 각자의 길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알아서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청년 모두가 ‘미생들의 땅’에 있고, 그들의 목적지가 하나같이 ‘성공 신화의 섬’일 뿐이어서, 그들이 거기로 가는 길이 그저 ‘모든 역경을 넘어 곧장 직진’하는 것밖에 없다면, 내가 혼자 그렇게 걸어가 봐서 알지만, 그건 굉장히 싫은 일이다.
누군가는 ‘노량진’에서 ‘여의도’로 곧장 걸어갈 수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그렇게 갈 이유는 없다. 당신이 청년이든 기성 세대든 마찬가지다. 대다수의 평범한 우리가 찾고 추구해야 할 길은 멀어도 안전한 길이지, 요즘 사정을 잘 모르는 길잡이들이 이론적으로 가르쳐 주는 직진 경로가 아니다. 애당초, 우리가 다 여의도 같은 삶을 인생 목적지로 정한 것도 아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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