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탐사대] 24시간의 고시원 일주
- 해 명 문 -
노량진 고시생 체험 대결 패자의 변
내기에 졌기 때문에 이 글을 씁니다. 본인 김어진은 졸업 직전 학기를 휴학하고 XX대학교 출결조교로 일하던 중 갑자기 1일 휴가가 생겨서, 그날 노량진 학원가에서 공부 중인 동기 졸업생 송지훈(가명) 학우를 찾아가 세월 좋을 때라고 놀린 사실이 있습니다.
물론 친구 간의 우정과 의리를 돈독히 하기 위한 역설적 발화였다고는 하나, 졸업 직후 전공과 별 관련 없는 고시를 준비하며 고초를 겪고 있는 송 학우의 고통에 연대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조롱조의 발언을 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이 해명문을 쓰기까지의 과정이 과연 공정한 것이었는지를 학우 여러분과 교감하기 원하는 바, 문제의 내기가 어떻게 성립하였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본인은 송 학우에게 “난 요즘 너무 바빠서 니가 부럽다”, “가만히 앉아서 수업 듣고 자습하면 땡이지 않냐”라고 의견을 개진했으며, 송 학우는 본인에게 “니가 노량진을 안 다녀 봐서 모른다”, “내 평소 하루 일과를 니가 다 따라올 수 있는지 오늘 내기를 하자”라고 도발하였습니다.
본인이 이기면 송 학우가 밥스 스테이크를 사고, 송 학우가 이기면 본인이 출결조교 명의의 사과문 자보를 쓰는 것으로 내기가 성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총 4회의 대결 중 0승 3무 1패로 본인이 진 것은 사실인 바, 이와 같이 해명문을 씁니다.
[제1대결] 오후 5시 : 공단기 1층에서 저녁 때우기
내기가 성립한 것은 정확히 한국 시간 4시 11분이었고, 이때 본인도 송 학우도 아메리카노 정도밖에 먹지 않았으므로 첫번째 내기는 ‘5시에 노량진 학원가에서 밥 먹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조건이 붙었습니다. 장소는 “공단기 1층”, 음식은 “(쌀)밥”으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본인은, 조건이 뭔가 미심쩍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큰 의심 없이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학우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공단기 1층’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 얼마나 될까요? 저는 그것이 맥도날드 노량진점 옆 건물의 공단기고시학원 본관 건물의 2층을 뜻한다는 사실도, 그곳의 내부 구조에 대한 어떤 단서도 제공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최종 골인 지점을 확인하는 데만 15분을 허비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또한 제가 점심밥을 구매하는 데 오래 걸린 이유도 해명하고자 합니다. 조건상 밀가루 음식을 선택할 수 없었으므로, 길에서 파는 튀김이나 분식류, 편의점에서 파는 컵라면 등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식당도 많았고, 9호선 노량진역 3번 출구 중간에 볼 수 있는 지하 푸드코트나 “고구려 식당”도 찾아가 보았지만, 거기서 파는 식사는 목적지까지 들고 갈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시간은 없고 ‘밥’을 더 찾아 다닐 수는 없어, 고민 끝에 편의점 삼각김밥을 2700원어치 샀습니다. 일단 공단기 건물로 가면 식당이든 매점이든 있을 테니 거기서 데워 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공단기 본관 1층에는 그런 시설은 없고 그저 자습 공간, 교재 판매대, 접수처, 그리고 ‘hackers bar’라는 이름의 자판기 방(?)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딘가에 전자레인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3층까지 올라가 봤지만 허사였습니다. ‘도시락방’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이용 가능 시간대(12~2시, 5시반~7시)도 아니었고 본인에게 사용 자격(공단기 수강증)도 없었기에 허탈하게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때 송 학우는 1층 ‘해커스 바’에 이미 와 있었는데, 그가 사 온 것은 컵밥이었습니다. 본인의 차갑고 초라한 삼각김밥과는 비교가 안 되게 따뜻하고 적당히 많은 밥을 노릇노릇한 토핑들과 함께 먹으며, 그는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이게 3천 원이야. 노량진 고시생들이 왜 하필 이걸 먹는지 이젠 좀 알겠냐?”
이리하여 저는 첫 대결에서 상처뿐인 1무를 기록했습니다.
[제2대결] 오후 6시 : 카페 노트북 자리 잡아놓기
식사를 마친 송 학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배부르다. 난 이제 인강 들어야 되니까 다음 내기는 이걸로 하자. 좀 있다 6시까지 니가 아무 카페나 가서 내 노트북 충전 되는 자리를 확보해 주면 1승 쳐 주고, 그 다음에 니가 아무데서나 한국사 수업 청강을 하는 걸 인증샷 찍어 보여주면 또 1승 쳐 줄게.”
제가 이 간단해 보이는 대결을 수락할 때는 까맣게 몰랐습니다. 이것은 사실 노량진 고시학원 생활을 해 본 사람이 아니면 생각해낼 수 없는, 매우 치밀하게 승률이 계산된 필승의 도박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송 학우의 노트북을 받아 들고 노량진 학원가의 카페란 카페는 모두 들어가 보았습니다. 할리스커피, 커핀그루나루, 파스쿠치는 물론이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투썸플레이스며 카페베네까지 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노트북 전원을 꽂을 수 있는 자리는 어딜 가나 극히 드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다들 손님이 오래 앉아 있지 못하도록 일부러 편의 제공을 중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이미 자리를 선점한 이용객들은 절묘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한 자리씩 차지한 다음 쥐 죽은 듯이 용무에 열중이었기 때문에, 차마 자리를 내 달라고 부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동분서주를 한 끝에 8분 정도를 남겨 놓고 할리스커피 4층에 마침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노트북 충전 가능 좌석을 하나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노트북 전원을 꽂고 숨을 좀 돌린 다음 송 학우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 위치를 알리려는 순간, 아르바이트 한 명이 제게 다가와 주문을 했는지 물었습니다. 안 했다고 대답하자 그의 즉답이 돌아왔습니다. “손님, 여긴 1인 1주문이라, (주문) 안 하시면 (노트북) 못 쓰시는데…”
그래서 본인은 송 학우를 위해 고가의 스무디(식사나 커피는 방금 먹었으므로)를 결제하고 제시간에 노트북 자리를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송 학우는 “야 하필 할리스가 뭐냐, 나 오늘은 좀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데 4시간 넘으면 진짜 쫓겨날 수도 있다, 요즘 여기 시간 감독 엄격해진 것 같더라” 등의 궤변을 늘어놓으며 본인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고 이 대결을 무승부 처리하였습니다.
[제3대결] 오후 6시 반 : 한국사 수업 청강하기
다음 대결도 본인 혼자서 해내는 종목이었습니다. 송 학우는 스무디를 비열하게 혼자 빨아먹으며 말했습니다. “학원이랑 강사는 상관 없으니까, 6시 반까지 한국사 수업을 찾아서 들어가 인증 사진만 찍으면 돼.” 이것은 간단할 줄로 알았습니다. 어떤 국가 고시든 ‘국사’는 빠지지 않는 과목이기에, 이 시간에 그런 강의를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문제는 강의를 찾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강이 될 것 같지 않은 칼 같은 분위기라는 게 문제였습니다. 어딜 가나 알아서 자연히 지켜지는 질서 아래 조용히 길게 늘어선 입실 대기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뒤에 가서 줄을 서자니 기껏 기다린 끝에 쫓겨날 것 같고, 상황에 따라 중간에 끼어들자니 도저히 그렇게 해선 안 될 것 같아, 어떻게 할지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에게 물어 보아도 초보자에게는 감이 오지 않는 간단한 답이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어떤 학원에서는 다들 자신의 휴대전화에 어떤 문자 메시지를 띄워 놓은 상태였습니다. 살펴본 결과, 그것은 입실 예약 승인 문자였습니다. 어떤 학원에서는 아예 출결을 체크하는 수강증 인식기가 문 앞에 달려 있었습니다. 두어 군데를 더 찾아다니며 한국사 수업이 지금 없거나 청강이 어려운 상황임을 파악할 때쯤, 제한 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확히 6시 반에 송 학우는 본인에게 전화를 걸어 “못 찾았냐?” 한 마디로 확인 사살을 하고는, 어느 학원 몇 층을 가 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곳은 본인이 방금 전 입장을 포기하고 나왔던 곳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강좌는 ‘번호표 입장’식 수업이어서, 수강 신청 여부에 상관 없이 입장 번호를 받았거나 빈 자리가 있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노량진에서 잔뼈가 굵어야만 알 수 있는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이 시점에서 본인의 스코어는 0승 2무 1패가 되었습니다.
[제4대결] 밤 9시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 롯데리아에서 복습하기
적어도 1승은 거둬야겠다는 각오를 다진 본인은 9시 쉬는 시간을 이용해 송 학우와 합류했습니다. 그는 노트북 충전을 완료해 둔 채 기다리고 있다가 마지막 내기를 제안했습니다. “노량진 롯데리아에서 내일 아침 8시까지 함께 밤샘 공부를 한다. 더 많이 자는 사람이 진다.”
노량진 할리스에서 롯데리아까지는 도보 3분 정도의 거리입니다. “뭐 하면서 밤 새는데?” “내가 기출 풀고 주는 거 너도 한번 풀어보고, 내꺼 채점해 주고 그럼 되지.” 등의 대화로 대결의 세부 내용을 정하다 보니, 롯데리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나 싶어 노트북 전원을 연결할 수 있는 콘센트가 있는지 찾고 있는데 송 학우가 그만 두라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노량진의 햄버거 체인점에 콘센트가 있을 리가 없다고. 가뜩이나 지금도 피크 타임에 자리 점거하고 스터디하는 사람들 때문에 말이 많은데, 만약 전기까지 쓸 수 있게 해 주면 그땐 아마 싸움이 날 거라고 말입니다. 그나마 지금이 밤이고, 여기가 다소 변두리이기 때문에 괜찮을 것 같아서 굳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물어 보았습니다. 노량진에서 밤샘 공부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냐고. 답이 돌아왔습니다. 왜 없겠냐고, 꽤 많다고. 다시 물었습니다. 여긴 이렇게 한산한데, 그럼 그 사람들은 다 어디 가서 밤을 새고 있는 거냐고. 잠시 후 송 학우는 무심하게 답했습니다. 나도 모른다고. 24시 하는 곳이면 아마도 그루나루나 맥날에서 새고 있을 텐데, 뭐 다들 알아서 한다고.
이 대결은 오전 3시쯤이 되자 서로 번갈아 2시간씩 자고 끝내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되어 결국 동시 기권 무승부 처리되었습니다만, 송 학우가 곤히 자고 있던 오전 4시쯤 밖을 보니 심야 택시 몇 대가 이따금 돌아다닐 뿐 아무것도 없고 조용하기만 한 노량진이 보였습니다. 저 조용함 속에서 지금도 누군가는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그렇게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기묘하다고 느껴졌습니다.
학우 여러분,
고시생은 쉽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이하의 내용은 최종적으로 (겐세이를 잔뜩 넣어서) 내기에 이긴 송지훈 학우의 요망을 반영하여 본인이 작성한 승부 소감문임을 알려 드립니다.
학우 여러분, 고시생들의 삶은 무위도식도 아니고, 강사와 안내 직원이 알려주는 대로 따라만 가는 안온한 삶도 아닙니다. 적어도 본인 김어진이 송 학우와의 하루 동안의 내기를 통해 체험한 바에 따르면, 고시학원 학생의 삶이란 사실은 매일 번번이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행하는 일의 연속입니다. 내가 어느 강좌의 어느 줄에 서든, 어떤 점심을 어디에서 먹든, 몇 시에 어디서 밤샘을 하든 누구도 옆에서 ‘그러면 된다/안 된다’ 따위의 팁을 알려 주지도 않고, 어떤 선택도 더 좋거나 나쁘지 않기에, 이들에겐 그 일상사가 매번 까다롭고 외로운 고민거리로 다가옵니다.
대다수 학우 여러분께서는 고등학교 시절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정해져 있는 자리와 스케줄에 맞춰 모두가 똑같이 공부하다 집에 간다는 사실 자체는 우리를 안심시켜 주었지요. 하지만 그들은, 예를 들자면, 등교 시간과 하교 시간만이 정해진, 그 사이에 각자 언제 어디에 가서 뭘 하면 되는지는 전혀 정해지지 않은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합격에 대한 그들의 부담감은 훨씬 처절한 채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독과 불안과 매순간의 결정을 반복하며 노량진을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하루하루 일과를 “그저 가만히 앉아서 수업 듣고 자습”하는 것뿐으로 일축하여 무신경한 생활인 양 빗댄 것은, 송지훈 학우를 포함한 노량진 고시학원 학생 여러분의 일상을 비하하고 모멸하는 언사였음을 통감하며, 이에 사과합니다. 다시는 고시학원 학생의 일과를 무시하지 않겠습니다. 이상입니다.
2015년 10월 15일
철학0X 김 어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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