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았더라면, 우리는 조금 달랐을까
금요일에 벌어지는 흔한 풍경
내말이 어떤 식으로 이해되는가를 산수하는 것은 언제나 고달프다. 그래서 금요일이 좋다. 부담 없이 한 잔 하자는 말을 오해 없이 손쉽게 건넬 수 있어서. 그렇게 반가워서 마신 1차와, 좋아서 마신 2차가 끝나간다. 하프타임.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한 잔 더 할 것이냐, 말 것이냐.
물론 머리는 안다. 오늘 충분히 피곤했고, 내일은 오늘만큼의 일이 남아있으며, 지금의 취기로도 충분히 내일을 괴롭게 할 숙취가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지금이라도 일어나야 한다고. 하지만, 그놈의 분위기. 망설임 없이 외친다. 한 잔 더.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한 명은 완전히 맛이 갔고, 한 명은 했던 말을 정확히 열 두 번째 계속하고 있다. 나는 그래, 맞아, 그렇지, 그러게, 그랬어와 같은 말들을 적당히 조리해서 코스요리처럼 내보내기에 바쁘다. 왜 항상 좋은 분위기에서 헤어지는 법을 모를까. 약간의 아쉬움이 언제나 서로를 맛깔나게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 아니지, 더러운 습관이다. 복이 나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덜덜 떠는 다리처럼. 거센 속쓰림으로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마셔대는 커피처럼.
혹은, 답장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보냈던 그때의 문자처럼.
혼자 길을 걷는 것이 아니었다
신촌사거리쯤에서 발을 두 번쯤 헛디디고 나서야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상태인 것을 알아챘다. 잔고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떠올렸다. 병원비보다는 싸게 먹힐 것 같다는 판단 끝에 택시를 잡기로 한다. 조금만 덜 취했더라면 사람들이 어째서 덜덜 떨면서도 길가에 나와 있는지도 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겠지.
아니다. 그것을 알아채는 현명함이 내게 있었더라면 그 추운 겨울에, 그것도 높은 구두를 신고 나온 당신에게, 더군다나 과천에 있는 동물원으로 가자는 망언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로 쪽으로 가주세요. 아뇨, 거기 말고. 종로 쪽으로 해서요. ?마로니에 공원 근처에서 내릴거에요. 그리고는, 출발. 지금 내 머리를 울려대는 것은 멀미일까. 아님 이르게 찾아온 숙취일까. 혹은 부끄러운 기억을 잊고 싶은 알량한 자존심일까.?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20여분. 스마트폰 베터리는 진작에 나갔다. 둘 것 없는 시선이 민망하다. 멍하게 창밖을 바라본다. 휙휙 지나가는 풍경들 사이로, 당신에게 일방적으로 가했던 나의 선택들이 떠오른다.
그때마다 나는 항상 말했다.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이럴거면 그러지 말걸
몰랐다는 말로는 용서하기 힘든 것들이 있다. 7살짜리 동네 친구가 신나게 들고 설친 쇠고챙이가 남긴 내 왼손의 흉터처럼. 더욱 용서하기 힘든 것은 그 친구의 후속조치였다. 철철 흐르는 피를 보고 놀란 그 친구는 엉겁결에 놀이터 모래로 상처를 덮어버렸고, 우리는 아직 감염성 상처가 무엇인지에 대해 모를 안타까운 나이였다.
이제는 안다. 납득할 수 없었던 당신과 나와의 끝도 돌이켜보면 내가 저지른 선택들이 모인 결과의 값이라고. 이것도 몇 해 전에야 겨우 떠올린 생각이다. 덕분에 나는 빚이 많다. 이제는 사과할 수 없는 당신을 향한 미안함을 이렇게 술김에 고백하기도 하고,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이별에 원망으로 몸을 떨었던 부끄러움도 홀로 소화해야 한다. 물론 쓸모없는 짓이다. 사람은 상상력이 많아서 괴롭고, 결국 이것도 다 혼자 편하려고 선택하는 짓이겠지.
심야의 라디오에서는 끝나가는 겨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후회 없이 잘 보내셨냐고 묻는다. 스스로에게 좀 더 정확하게 물어보기로 한다. 이번 겨울은 옳은 선택을 하였는가? 그러면 나는 한없이 어색해진다. 그 무엇도 자신할 수 없어서. 지금 쌓아가고 있는 내 선택의 맥락이 무엇으로 향할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어서. 지금 생각하고 있는 약간의 긍정이 훗날 감당할 수 없는 후회로 돌아올까봐.
미터기 요금이 만 오천원을 넘어갔다. 갑자기 술이 깬다. 그냥 첫 차를 기다릴걸 그랬나보나. 이제는 좀 옳은 선택을 하고 싶은데. 다가오는 봄에는 좀 다를 수 있을까. 그래도 날도 좋아지는데, 뭔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싶다. 어느새 라디오에서는 엔딩 멘트가 나오고 있었다.
"여러분, 행복하세요."
그러자. 아무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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