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그 날 밤의 술자리

?N과의 첫 술자리가 기억나시나요?

술자리는 크게 두 종류입니다. 누가 합석을 했고 누가 카드를 긁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는, 그냥 빨리 ‘n빵’을 나누고 후딱 구역질을 끝내고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집에 가면 되는 그런 자리가 있죠. 그리고 우리 중 아무도 그런 술자리를 진심으로 즐기지는 않습니다. 뭐, 그렇게 얕은 인간관계와 그렇게 금방 끝나는 초저녁의 쾌락 정도로 만족하며 살 수 있다면, 그런 술자리로도 충분하겠지만요.

ⓒ MBC

사실 우리가 선호하는 자리는 이런 자리입니다. 내가 누구와 이 잔을 함께 기울이는지가 분명한, 앞에 마주앉은 N이 그 순간 제일 중요한 자리. 그 사람은 때로는?어린 시절 헤어진 친구이기도 하고, 때로는 아직 관계가 정리되지 않은 이성이며, 때로는 아버지일 수도 있겠네요.

그 자리의 감정과 소회를 한두 마디 말로 표현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그게 적절하게 잘 된다면, 참 좋을 텐데. 그래서 트탐라가 소개합니다. 여러분께도, 처음으로 술잔을 마주쳤을 때가 선명하게 기억나는, 여러분만의 N이 있으리라 믿으며.

정원의 N : 같은 처지에 있던 10년지기 동네 친구

윤종신이 부릅니다,
"여자 없는 남자들."

2010년 봄, “자유로운” 대학 생활에 한창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때였다. 학과 동기와의 첫 번째 연애가 모래성같이 한 달만에 부서졌고, 내 인생에는 어둠이 도래했었다. 이후 곧바로 맞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길이를 자랑하는 대학교 첫 방학. 나는 잠시나마 눈부셨던 그 나날들을 잊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하나는 돈이나 벌자는 생각에 시작한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였고, 또 다른 하나는 일을 하지 않는 주중 새벽마다 득달같이 집 앞 편의점으로 달려나와 친구와 한 잔 걸치고 노래방을 가는 테크의 소소한 음주가무였다. 그럼에도 ㄴr 는 ㅁH일눈무..ㄹ을 흘렸ㅈl만 말olㄷㅏ…

사랑했다.............

그 두 방법 중 후자에 항상 함께해 줬던 게 바로 그였다. 우린 중학교 동창이었고, 꽤 친하기도 했지만, 살갗만 맞대지 않았을 정도로 돈독해진 건 딱 그때부터였다. 술을 통한 그와의 제대로 된 첫 대면은 일명 ‘편의점 노상’으로 이루어졌었다. 나는 그날 술자리를 시작한 지 대략 한두 시간 만에 알아차렸었다. ‘아, 이 새X 나랑 똑같은 아싸X끼구나.’

그 시점부터 우리는 우리가 여자를 못 만나는 것도 모자라 보통 사람들과도 어울리지 못하는 이유를 들며 한탄했다.?그 와중에 누구도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서로의 찌질력을 합리화하기 위해, 유명 철학자의 개념이며 우리가 직접 고안해낸 가치관이 어쭙잖게 동원되었다.

“남자의 본질은 형이상학적, 여자의 본질은 형이하학적. 그래서 우리가 여자를 못 만나는 것.” 따위의 지우고 싶은 흑역사이자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여성혐오적 발언을 하기도 했고, 암세포도 살 권리는 있지 않으냐면서 우리의 처지를 스스로 초라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그래. 무척이나 찌질했다.

어쨌든 우린 종이컵 가득 따른 소맥 한 잔과 함께 비관론적 태도를 공유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심지어 그는 내게 “네가 여자였으면 정말 결혼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녀석, 오죽 외로웠으면...

그렇게 관계는 계속되었다. 부르면 튀어나오기, 여름이면 편의점 노상 까기, 첫 잔은 무슨 술이든 원샷 하기, 마무리는 동네 허름한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기. 그날 정한 지극히 하찮고도 하찮은 이 룰들은 이후 2~3년간 우리의 술자리에서 불문율로까지 자리잡게 된다.

한결같이 자정 혹은 새벽 1시쯤만 되면 ‘뭐하냐’, ‘술콜?’, ‘1시 홈OO스 앞’이라는 문자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보냈고, 맥주 500을 원샷하고 목이 따가워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으며, 노래방 선곡 리스트의 절반을 윤종신의 노래로 채웠었다.?머저리 같고 촌티 나는 윤종신의 발라드 넘버들은 우리를 울게 하진 않았지만, 슬픔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끔은 했었다.?2010년 어느 여름날, 하계동의 한 편의점 앞은 그랬었다.

비루했지만, 영혼의 파트너가 있어 나름 즐거웠던 그때를 가끔은 괜스레 떠올리곤 한다. 물론, 수험생 시절이나 군인 시절이 그렇듯,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더 이상은 ㄴㄴㄴ ⓒ조대득밴드

 

정은의 N : 6개월간 짝사랑을 하게 되었던 ‘가’군

’망했어. 같이 술을 먹는 게 아니었는데!’

작년 이맘 때, 훈훈하게 생긴 한 살 어린 친구인 ‘가’군 함께 해왔던 알바가 끝나가고 있었다. 가군을 더 이상 못 본다는 생각에 꽤나 아쉬워했었다. 자꾸 눈이 갈 만한 외모였거든. 하얀 피부에 뿔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이 아이를 이제는 못 보다니. 그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아르바이트가 완전히 끝난 다음 날 아르바이트 했던 곳에 인사차 들르자는 그의 제안이 너무나 반가워 그대로 알겠다고 했더랬다.

순조로이 인사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이대로 안녕을 고하면 두고두고 섭섭할 것 같아, 술을 먹지 않겠냐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 그게 그와 첫 술자리였다.?사실 그 술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나는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고 일자리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했었으니 대부분은 취업에 관한 이야기였겠지. 평소처럼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기대를 한꺼번에 쏟아냈을 것이다.

사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그 날은 겨울임에도 꽤 따뜻했었고, 그는 자신의 말을 아끼는 대신 나의 두려움을 조용히 도닥거려 주었다. 그의 배려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얼굴은 달아오르고 정신마저 하나도 없었다. 빨개진 얼굴을 하고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던 그는 머뭇거리다 손을 뻗어 손바닥을 대려다가 멈추고는 손등을 내 볼에 대었다. 따뜻하네, 혹시 많이 힘들어? 하고.

나는 이런 느낌이었다고. ⓒ치즈인더트랩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핑핑 돌았다. 그동안 애써 부정하던 마음이 확실해졌다. 아는 동생으로서 잘 지내볼 수 있겠다는 내 다짐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날 가군은 처음으로 나를 집까지 데려다 줬고, 집에 들어와서도 한참을 부정과 긍정을 반복한 후에야 내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었다. 망했어. 같이 술을 먹는 게 아니었는데. 그 날의 술자리는 아주 찰나의 순간 나를 그에게 빠지게 했다. 그렇게 6개월의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똑같이 사랑한다 해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이 있다. 짝사랑을 하는 입장이었기에, 그 말에 깊이 공감한다. 그 이후에도 그와 가진 몇 번의 술자리. 그때마다 밀려오는 감정에 정신을 못 차린 나였지만, 왜인지 그중에서도 그 와의 첫 술자리만큼은 아직도 잊지를 못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감정이 “안녕 나야” 하고 나온 그날의 마음이 신기해서였던 것 같다.

언제나 술은 단단하게 쌓였다고 믿었던 가장 깊숙한 진심까지 말랑말랑하게 녹여 드러낸다. 그날, 만약 술자리가 아닌 간단한 저녁자리였다면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담백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아니. 분명 나는 자존심을 내세워 그를 밀어내고 닫아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좋아하는 내내 그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나를 그에게 빠지게 만든 그날의 술자리가 원망스럽고 고마웠다. 지금은 그날 그 술자리에 머리 숙여 감사한다.

왜냐고?

이제 가군은 내 남자친구거든.

아군이 아니다! 사격개시! ⓒ레바툰

 

찬영의 N : 그저 말썽꾸러기인 줄만 알았던 동창 J

“착각은 짧고 오해는 길다.
그리하여 착각은 자유지만 오해는 금물이다.”

사람은 자기만의 ‘네모’로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 그래서 남에겐 화를 내고 자기에겐 위로를 건넨다. 남의 ‘네모’는 잘 모르지만, 내 ‘네모’는 어떻게 생긴 줄 잘 아니까.?나도 다르지 않았다. 내 경험으로 다른 사람을 저울질하곤 했다. ‘쟤는 착해, 걔는 나뻐, 누구는 괜찮고 누구는 별로야’ 등의 단어에 사람을 구겨 넣은 뒤, 내가 알기 좋게 구분하는 것이다.

고등학교 동창 J를 떠올려본다. 그는 소위 '개구쟁이'였다. J의 장난 앞에 남녀는 평등했다. 남자에겐 말할 필요도 없고, 여자에게도 등짝을 치면서 “하이!”를 외치곤 했으니까. 덕분에 ‘복도 위 추격전’을 심심치 않게 구경했다. 여자아이를 놀리며 학교를 활보하는, 일반적인 남성들이 경험하는 ‘유년 시절’을 고등학교에서도 보게 되다니. 나는 J를 ‘철없다’ 쪽에 고민 없이 구겨 넣었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야기 한 번 제대로 나눠보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오해가 쌓여갔더랬다

졸업을 했다. 겨울이 뺨으로 와닿을 무렵, J한테서 연락이 왔다. 맥주나 한 잔 하자고.

“우리 단 둘이 먹은 적은 없지 않냐?”?“그럼?7시까지 동네 맥주집으로 와.”?맥주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알바생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나무 빛깔이 잔잔한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뒤 맥주를 주문했다. 자리 탓에 J의 얼굴은 왼편만 보였다.?건빵을 뒤적이며 나는 J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 ?‘질문’이 아니라, 이제 정신 차리고 미래를 생각하라는 ‘훈계’였다.

J가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나는 고개를 돌려 알바생을 바라봤다. 거품이 맥주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었고, 알바생은 어쩔 줄 몰랐다. 서투르네, 저 사람. 그런 생각을 하던 참에 J가 자신있게 말을 열었다.

“00하면서 살거야.?그거 하면 즐거울 거 같아. 그래서 해볼라고.”

서투른 알바생과 달리 J는 마치 ‘소믈리에’ 같았다. 스스로에게 어울릴 만한 ‘삶’을 추천하기 위하여, 그는 생각 이상으로 끈덕지게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몰랐던 그는, 이만큼 거대한 사람이었다.

부끄러웠다. 내가 뭐라고 J를 판단했을까. 고작 장난치기 좋아한단 이유로 사람을 마음대로 구분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J를 보기가 민망해서 나는 괜히 알바생에게 시선을 옮겼다.?알바생이 맥주 두 잔을 들고 왔다. 청포도 맥주 어느 분이세요? 아, 저예요. J는 맥주를 받기 위하여 의자를 틀었다.

그제서야 J의 반대편 얼굴이 보였다. 왼편이 아닌 바른편.
그래,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나는 그제야 배웠다.

알바생이 나에게도 맥주를 건넸다.
맥주잔에는, 거품이 없었다.

마음대로 오해해서 눈치가 보였다고 한다...

 

아연의 N : 언제까지고 친구 같을 줄 알았던 엄마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창조했다”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엄마와 나는 오늘도 동네 마실을 나선다. 짧게 친 커트 머리에 서로 엮어낸 팔짱, 똑같이 쓴 안경에 18년을 살아온 동네에선 우리는 동산동을 주름잡는 형제라 불렸다. 이렇듯 엄마와 나는 뭐랄까, 매일 만나서 놀던 동네 친구 같았다. 어릴 적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취미가 없었던(왕따는 아니였을 거다) 나는 엄마랑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었다. 물론 나는 엄마의 고민 같은 건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내가 힘든 일 내가 다친 일 주절주절 내려놓고 제멋대로인 친구였다지만, 그래도 엄마는 나와 놀아주던 최고의 친구였다.

이랬던 우리는 나의 대학교가 서울로 결정되면서 서로를 떠나 있게 됐다.?엄마는 내가 서울로 이사 가기 전날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벚나무 아래에서 보고 싶어서 어떡하냐며 잘 살으라고 눈물 지으셨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 탓일까, 엄마의 말 때문일까. 감동에 젖어들려고 할 때, 못생겨서 혼자 어떻게 지내려고, 라는 엄마의 장난에 밀려오던 감동이 다시금 사그라져 버렸지만…

투닥투닥대며 집에 돌아와 밥상 앞에 앉은 저녁, 이날 엄마는 내게 첫 잔을 내미셨다. 그때 마주한 엄마의 눈. 그날의 눈빛은 친한 친구의 눈도 아니였고 소녀 같던 눈빛도 아니었다. 무언가 다른 눈빛이었다. 뭔가 말캉말캉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잔잔히 밀려왔다 빠져나갔다 하는 눈동자. 나는 당황스러움에 눈을 피해 버렸지만, 그날에서야 처음으로 엄마의 눈빛 저 너머의 감정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우리 엄마가 아닌, 그녀 한 사람에 대해 궁금해졌다.

1983년, 어느 여자 중학교 앞의 모습 ⓒ코리아헤럴드

우리 엄마도 이루지 못한 꿈이 있겠지? 엄마는 이만큼 성장한 딸을 보면 무슨 느낌일까? 다 커버려서야 이런 생각을 하다니. 아, 나는 그동안 우리 엄마를 제대로 알려고도 하지 않았구나. 나는 정말 못난 친구이자 딸이였구나.?엄마가 건내준 술잔. 술 냄새를 킁킁 맡으며 고개를 숙인 나는, 술잔의 바닥을 바라보며 나의 못남을 자책했다. 알싸한 알콜 냄새에 찡- 해진 코를 핑계로 빨개진 코를 감추고선 엄마에게 다시 술잔을 건넸다. 그날 저녁, 우리는 말없이 쓰디쓴 잔을 목으로 넘겼다.

나는 이제 청소년을 벗어난 성인이고 엄마는 이제 중년의 여성이 됐다. 흘러간 시간 앞에, 나는 엄마의 인생에서 좋은 친구였을까. 짐덩어리는 아니였을까. 혹은 앞으로 어떤 딸로 남아야 할까 하는 고민이 알콜향처럼 진하게 내 기억속의 한 자리를 맴돌았다.

대게 엄마를 떠올리면, 그 이름 만으로도 품안에 안겨있는 행복감과 안정감이 든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날의 기억 때문일까, 그날 이후, 난 엄마를 떠올리면 막연히 웃음이 배어나오기보다 눈시울이 먼저 붉어진다. 그것은 내가 그녀를 엄마이기 이전의 한 사람으로써 받아들였기 떄문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엄마를 그려내기위해 술잔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이제라도 내가 그녀의 좋은 친구가 되어야 겠다고, 이렇게 사랑스럽고 마음 깊은, 내 평생의 친구이자 가장 멋진 여자인 엄마의 곁에 언제나 내가 함께 있고싶다고 바라본다.

엄마가 힘들 때 내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어릴 때 그러하였듯. ⓒ영화 '인어공주'

 

연주의 N : 내가 인턴이 되던 해의 아버지

“그저 견디고 있을 뿐, 어른도 아프다”

때는 2014년 여름,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어린 여대생이 처음 맞닥뜨린 인턴 생활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누군가는 내게 고작 인턴 생활 하나 갖고 유세 떠느냐며 엄살 피우지 말라 할지 모르지만, 말단이기에, 어느 곳에도 소속돼 있지 못한 미생이었기에 느낄 수 있었던 압박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중 가장 불편했던 것은 부장이었다. 우리 아빠 연배의 사람에게 편하게 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기만 했다. 심지어 부장이라는 직함 때문인지 그 거리감은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관계 속에서 오는 답답함을 안고 있을 무렵, 함께 일하던 동기가 내게 넌지시 그런 말을 했다. 부장을 보면 아빠가 떠오른다고. 왠지 우리 아빠도 저렇게 혼자 술잔을 비우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진다고.?그 얘기를 들으니 다시 한 번 그를 돌아보게 됐다. 그리고 나 또한 그에게서 아빠의 모습을 겹쳐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외롭게 술잔을 비우고 있을, 오늘도 외로움과 슬픔 앞에 홀로 싸우고 있을 아빠의 모습을. 그렇게 괜찮은 척 하면서 오늘 하루도 무사히 끝냈다는, 스스로의 자기위안을 하고 있을 아빠의 모습을.

어릴때는 몰랐다. 어째서 아빠는 저렇게나 못 이길 술을 드시고 오는지. ⓒtvN '응답하라 1988'

이런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자 도저히 그 상태로 집에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움직였다. 일을 끝마치자마자 다른 것 모두 제쳐놓고 아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빠 나 회사 앞이야.”?전화도 없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무작정 찾아온 딸. 수화기 너머로 살짝 놀란 기색이 느껴졌지만, 아빠는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딸의 기습방문으로 분명 하던 일 멈추고 달려나왔을 아빠. 하지만 그 얼굴엔 어떤 당황스러운 기색 하나 없이 한껏 웃는 얼굴로 가득했다.

그날이 처음이었다. 아빠와 밖에서 단 둘이 저녁식사를 한 적은. 무얼 먹고 싶냐는 아빠의 물음에 내가 선택한 것은 을지로3가 부근의 허름하고 작은 식당이었다. 고전영화의 한 장면에나 나올 법한 이 가게. 주당들, 혹은 아저씨들이나 갈 법한 이곳으로 향하자 아빠는 의아한 눈초리였다. 하지만 그날은 어느 고민도 없이, 이곳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무런 격식도, 장벽도, 겉치레도 필요치 않는 이곳에 오고 싶었다. 여기서 내 이야기를,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힘들지 않냐는 내 물음에 아빠의 대답은 몇 년 전과 같았다. “힘들지, 그래서 술 한 잔이 필요할 때가 있는 거야. 너도 금방 알게 될 거야.”?또 그 소리. 물론 몇 년 전에 들었던 말과 다를 것이 없는 그 말이었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와닿았다. 아빠가 말한 술 한 잔의 의미에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생각해 보니, 아빠는 내 앞에서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나 또한 그것에 의문을 가진 적은 없었다. 아빠는 그런 사람이라고, 혹은 어른이라서 그런 거라고, 그렇게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빠의 모든 눈물들은 이제껏 마셔왔던 술 한 잔에 다 담겨있었더랬다. 이제껏 말없이 찰랑이는 술잔에 오늘의 눈물을 덜어내왔던 것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아빠는 독한 술 한 잔에 가슴 위로 올라오는 눈물을 억눌렀을 것이다.

이번엔 아빠의 술잔만이 아닌, 내 앞에 놓인 술잔도 함께 채웠다. 그리고 입에 털어놓은 그 작은 한 잔에 고민도 함께 털어놓았다. 그렇게 넘긴 술 한 모금은 이상하리만큼 달았다. 쓴 맛이 없다는 것은 당연히 거짓말. 하지만 쓴 맛을 통해 느낀 쾌감이 너무나 달았다. 그래서 그날 아빠와 처음 마신 술 한 잔의 의미를, 그리고 함께 곁들인 김이 모락모락 나던 머릿고기와 순대의 맛을 더욱 잊지 못한다.

“아빠도 태어날 때부터 아빠가 아니니까....” ⓒtvN '응답하라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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