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 ① 1950년, 평범한 마을에서 생긴 일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

老斤里良民虐殺事件, No Gun Ri Massacre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침공을 막고 있던 미국 1 기병 사단 7 기병 연대 예하 부대가 1950년 7월 25일 ~ 7월 29일 사이에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 발사를 시작하여, 민간인들을 학살한 전쟁 범죄이다.

노근리 학살사건을 실제 경험했던 생존피해자와 유족들인 정은용, 정구도, 양해찬, 정구호, 서정구씨 등으로 1994년에 구성된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사건 대책위원회(위원장 : 정은용)에서는 사망자 135명,부상자 47명 모두 182명의 희생자를 확인했으며, 400여명의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20여명이다.

[출처: 위키백과]

 

시작은 단순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한 노근리 학살 사건(이하 노근리 사건)의 피해자들이 겪은 아픔을 기록하여 입증해내고, 그로써 미국으로부터 사과와 온당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이제 노근리 사건을 통해 한국을 넘어 전세계 사람들이 인권과 평화라는 인류 핵심적 가치를 되새기길 바라고 있다.

노근리가 과거에 국한되지 않고 현재와 미래로까지 이어지길 바라며 지금도 끊임없이 움직이는?노근리 평화 기념관 관장 정구도 님을 만나고 왔다.

 

평범한 마을 노근리에서 일어난 일

김정원(이하 김)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중 가장 끔찍했던 사건 중 하나라고 알고 있습니다.

정구도(이하 정)

가장 본질적으로, 노근리 사건이 그냥 북한군과 미군의 전투 과정에서 30분에서 2시간 정도의 교전으로 벌어져서 그 사이에 껴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해요.

소위 말하는 ‘전시 상황’이 아니었군요.

상당히 고의성과 의도성이 있었던 사건이었어요. 공중 폭격이 먼저 이루어져서 100여 명이 죽은 걸로 추산돼요. 그 당시에 현장에서 몇 명 죽었다고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잖아요.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 살아남은 사람들이 미군에 의해서 쌍굴다리에 한 70시간 가까이 감금됐었죠.

역사의 아픔

70시간.

네. 7분도 아니고 70시간 가까이 감금한 채 쌍굴다리 앞뒤에서 미군이 기관총과 소총으로 사격을 가한 거예요. 심지어 박격포까지 동원했다는 한국 국방 보고서의 조사 기록도 있고요. 거기서 70여 시간 사이에 어떻게 보면 살상을 당한, 정확히 따지면 학문적으로는 학살을 당한, 사건이에요.

그 안에 관장님의 아버님이 계셨구요.

저희 아버님이 정 은 자 용 자 되시는데, 재작년에 별세하셨어요. 사건 현장에서 우리 아버님과 어머님은 아들, 딸을 잃었어요. 아들 이름이 구필. 저한테는 형이죠. 열 살 많은 형인데, 당시에는 다섯 살. 그리고 저의 누님이 (당시) 두 살. 정구희. 우리 어머님은 사건 현장에 계셨던 분 중에는 최고령자이구요.?그 사건으로 아들, 딸을 잃은 건 물론, 본인도 중상을 입었었어요.

노근리 사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

그야말로 가족을 덮친 재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우리 가족만 희생된 게 아니라 수백 명이 다치거나 죽었었어요. 특히, 다친 사람 중에 상당수가 어린이, 노인, 여성이었고요. 이 사건에 연루될 이유가 전혀 없었고, 무장해서 미군에게 가해를 가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거든요.

 

작은 목소리를 알리기 위하여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기에 무척 힘이 들었다고 들었습니다.

1991년 4월달부터 부친이 장편 소설을 쓰는 걸 도와드리는 것이 제가 직접적으로 이 일에 참여하는 시작이었어요. 그때가 6공 말기잖아요. 그러니까 군사 정권이 있을 때는 미국이 잘해서 잘했다고 칭찬하는 건 문제 없지만, 미국이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잘못한 진실을 얘기하는 건 소위 말해 금기를 깨는 일이었어요.

지금도 그렇죠.

반일감정과 반미감정을 얘기하면, 그 둘은 극단적인 차이가 있어요. 반일감정은 일제 치하에서 35년이라는 식민지 시절을 지냈기 때문에 보편적인 편이에요. 아침에 눈을 떠서부터 잠을 잘 때까지, 또 대통령부터 전 국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반일감정을 가져도 전혀 문제가 없잖아요. 오히려 과하다 싶을 정도고요.

근데 미국에 대해서는, 특히나 그 당시에는 그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얘기하는 건 반미로 여겨졌었죠. 그리고 이념적으로 공격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상당히 엄혹한 시절이었는데, 그때 그 일을 했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죠.

항상 삼엄한 경비가 이루어지는 미국대사관 ⓒ연합뉴스

가족들이 많이 걱정하셨을 것 같습니다.

정부나 모든 국민이 부담스러워했고, 아버지도 그걸 잘 아셨기 때문에 아들인 제가 다칠까 봐, 한참 발전하고 성공하며 일할 나이에 혹시 잘못될까 봐 여러 차례 만류하고 그러셨죠. 그런데도 계속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지만, 올해까지 25년을 하면서 상당히 힘들고, 외롭고, 고독했어요.

그 힘든 걸 자청했을 때는 힘들지 않았어요. 근데 (하고 나니까)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어요. 25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알고서 이 일을 시작하라고 하면 정말 힘들고, 외롭고, 분통 터질 일도 많고 하니까 아마 안 하고 못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그렇다고 그때 쉬운 일이라 생각하고 뛰어든 건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어려웠고, 거친 일이었어요.

작년 말에는 관장님이 적으신 ‘노근리는 살아 있다’를 원작으로 사건을 만화화한 책 ‘노근리 이야기 2부: 끝나지 않은 전쟁’이 나왔었는데요.

?

제 책 ‘노근리는 살아있다’는, 지금은 주간경향인데 예전에는 뉴스메이커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던 주간지에 제가 한 1년 넘게 기고하는 글을 썼었어요. 노근리 사건이 어떤 사건이었고, 어떤 과정과 노력을 통해서 중요한 인권 사건으로 부각되며 세상에 전파되었고, 그리고 인권사적, 한·미 관계사적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 칼럼들을 모아서 만든 게 ‘노근리는 살아있다’라는 책이에요. 그 책을 다시 만화화한 건데, 작년에 증보판으로 또 나온 거예요. 인권 운동 회복사라고 볼 수 있는 제 책이 다시 증보판으로 나온 것은 개인적으로도 기쁜 일이에요.

좀더 많은 사람에게 노근리 사건이 전파될 것 같아 기쁩니다.

만화 말고도 ‘노근리는 살아 있다’를 원전으로 해서 만든 다큐멘터리 3부작이 있어요. 청주 MBC에서 아마 2009년쯤 1년간 취재해서 제작됐는데, 그것 역시 방송문화진흥회에서 주는 상 중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을 받았었어요. 그것뿐만 아니라 노근리 사건을 취재해서 국제적 이슈로 만든 AP통신의 취재팀도 퓰리처상을 받았단 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퓰리처 탐사 보도상 뿐만 아니라 그 해에 열두 개의 상을 더 받았어요.

국내·외에 걸쳐 여러 방식으로 노근리 사건의 ?가치를 인정 받았던 거군요.

그렇죠. 그만큼 노근리 사건은 지역의 작은 동네 산골 마을에서 수백 명이 희생된 작은 사건이 아니고 상징성이 있는 사건이에요. 미국은 세계 경찰국가를 자임하고,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전쟁을 많이 수행하죠. 자유라는 이름으로, 어떨 때는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그 이후에도 베트남 전쟁, 그리고 이라크 전쟁이 있고요. 이라크 전쟁은 얼마 전에 종전되었지만,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아직도 종전되지 않았어요. 미국은 그런 크고 작은 전쟁들에 참여하면서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노근리 사건과 유사한 사건들을 아마 많이 발생시켰을 거라고 봅니다.

 

Apologize? No, Just Regret

빌 클린턴 대통령이 유감 표명을 했던 걸로 아는데요.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빌 클린턴(Bill Clinton)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전쟁 중 민간인 살상사건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유감 표명을 한 사례는 노근리 사건이 처음인 걸로 알고 있어요. 다른 미군 관련 사건 중에서는 조사가 안 된 경우가 허다하고요.

더불어서 이야기하면, 노근리 사건이 그렇다면 어떻게 보면 많은 전쟁 중의 민간인 살상 사건의 대명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셈이죠. 또, 노근리 사건을 진상 규명하는 과정은 인권 운동 회복사이기도 하지만, 한·미 관계사에서 역사 전쟁을 한 거나 마찬가지인 거고요.

노근리 평화 기념관에서는 노근리 사건에 관한 유감 표명 성명서 전문을 볼 수 있다

사실 미국에서는 유감이라는 말이 사과라는 말이 가진 뜻과는 천지 차이잖아요. 당시 못내 아쉬운 마음도 드셨을 것 같아요.

아쉬웠죠. 동양의 사과 문화는 그냥 눈물 흘리고,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면 용서해주는 관대한 경향이 있고요. 그게 배·보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어떻게 보면 정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서양 문화는 동양 문화와는 달라서 어떤 용어를 쓰느냐에 따라서 배·보상문제로 연결되기도, 안 되기도 해요.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건 제가 미국식 수사학을 연구한 교수의 논문을 인용해서 얘기하는 건데, 공식적으로 가장 높은 등급의 사과는 ‘Apologize’에요. 근데 그 말이 떨어지면 그와 동시에 ‘Compensation’, 배상으로 연결돼요. 책임을 통감하고,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게 Apologize에요.

노근리는 ‘Regret’ 였죠.

외교적으로, 또 수사학적으로 볼때도 ‘Apologize’ 아래 단계죠. 거기에 그냥 유감스럽다고만 하면 미안하니까 ‘Deeply’를 붙여서 심히 유감스럽다고 표명했었죠. 상당히 높은 등급이긴 했으나, Compensation을 전제하지 않는 사과였던 거죠. 재미있는 건 뭐냐면, 그때 빌 클린턴 대통령이 유감 성명을 발표하니까, 미국의 기자들이 바로 대통령에게 이건 Apologize를 해야 하는 성격의 문제 아니냐고 물었었어요.

사건의 경중을 따졌을 때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였겠죠.

Deeply Regret라고 얘기했지만, 실제로는 사과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표현했다고 해요. 미국의 기자들이 볼 때, 사건의 당위성으로만 본다면 (노근리 사건은) Apologize라고 했어야 마땅하지만, 미국의 국익과 명예를 앞세울 수밖에 없는 미국 정부로서는 그 용어를 쓰면 반드시 배상을 해야 하고, 수많은 전쟁을 수행했던 입장으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정말 어려운 선택이었기 때문에 아마 못 할 수밖에 없었을 거로 봐요.

아쉬움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조금은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여기까지 온 것은 저는 한·미 관계사 측면에서, 인권사 측면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성과라고 봐요. 그리고 적지 않은 결과를 얻어냈다고 생각해요. 물론,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는 있지만.

 

모이고 모여 끝내 AP에서 터지다

얘기를 다시 돌아오면, 빌 클린턴 대통령이 유감 성명을 발표하기 전, AP통신으로 국제적으로 노근리 사건이 보도되기 전까지 국내·외 언론들과 수없이 접촉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사실은 그전까지는 사건이 아주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었잖아요.

AP 통신의 노근리 사건 보도는 당시 탐사 저널리즘의 진수였다.

국내에 어느 정도 알려지긴 했었죠. 근데 큰 이슈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고는 봐요.

큰 이슈가 되기 전까지는 각종언론 매체의 반응이 일반적으로 어떠했었나요?

우선은 1994년 선친의 소설 ‘그대,우리의 아픔을 아는가’가 나온 다음에 내·외신과 접촉했었어요. 1994년 4월달부터. 제 기억에 4월 20일자로 소설이 출간됐었고, 출간되자마자 이 사건을 이슈화하기 위해서, 홍보하기 위해서 기자들과 접촉했었는데, 주요 메이저 언론들은 큰 관심이 없었어요. 진보적 성향의 신문이나 조금 마이너한 신문이 관심을 가졌었고요. 사건을 보도할 만한 자료, 중요한 팩트 정리해서 줬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자가 취급하지 않았어요.

어떤 이유에서 그랬을까요?

‘한국전쟁이 일어났으면 당연히 사람 죽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사건에 대한, 인간의 생명에 대한 핵심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얼버무려서 생각하는 취재 그룹들이 있었죠.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취재 안 하죠.

아무래도 부담스럽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는 이 이슈가 너무 예민해서.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사건 홍보 활동을 했는데, 그때도 사실 언론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 상태였어요. 해빙 무드를 조금 타긴 탔지만, 이 문제를 금기나 성역의 문제로 생각했던 건지, 상당수가 사건을 취급하기를 꺼렸어요. 의협심 있고 정의감 있는 기자들이 취재해도 중간에 데스크에서 막히는, 짤리는 경향들이 있었던 시절이었죠.

그러다가 어떤 경로로 AP통신을 통해 노근리 사건이 보도됐던 건가요?

어느 날 갑자기 AP통신을 통해 보도된 건 아니고요. 1994년 4월부터 한 4년 동안 내·외신 할 것 없이 수없이 많은 접촉을 했고, 많은 증거 자료를 제공했고, 그래서 짧은 기사든 조금 긴 기사든 간에 계속해서 노출됐었죠. 그러다가 중간쯤 1997년에는 ‘시사매거진 2580’이라는 MBC 프로그램으로 보도됐었어요. 그 직전에는 미국의 CNN을 통해서 보도됐었어요.

그리고 외신으로서는 단신이지만, 1994년에 처음으로 AFP를 통해 이미 보도됐었고요. 내신의 경우에는 특히 잡지, 월간 말이라든가 그 당시에는 구독자도 많고 매체 파워도 있었던 시사저널 같은 데서 여러 번 취재·보도를 했었어요.

그전부터 약소하게나마 보도가 이루어지고 있었군요.

사실 1994년에도 제가 AP통신에 찾아가서 기사를 요청했었는데, 그때는 보도가 안 됐었어요. 그러다가 4년 후에 AP통신이 취재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게 어쨌든 그 당시 국내 기자들이 크든 작든 간에 기사를 계속 써줬기 때문이에요. 그 무렵에 AP통신 본사에서 기획 취잿거리를 찾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는데, 그때 노근리 사건을 이미 인지하고 있던 AP통신 서울지국에 있는 최상훈 기자가 제가 준 자료를 기반으로 1998년 4월쯤에 900자짜리 원고를 썼죠.

최상훈 기자. 전 AP통신, 현 뉴욕 타임스 한국 특파원, 2000년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그것이 시작이었고요.

따지고 보면 AP통신도 실질적으로 금방 보도는 못 한 거죠. 취재는 다 끝났는데, 사장이나 편집국장 등등이 위에서 막아서 보도가 되지 못하는 상황이 1년 반 정도 가까이 이어지다가 1999년 9월 말에 중요하게 메인 기사로 나가게 됐죠. 그때도 많은 진통을 겪었었죠.

그땐 무슨 일이 었었나요?

경영진 측에서 미국 정부의 입장을 고려해서 보도를 안 하려고 했지만, 취재팀이 사장에게 편지도 보내면서 보도 안 되면 안 된다고 압박을 가하고, 나중에 들어보니까 심지어 취재팀이 자기 사장이 (노근리 사건) 보도를 막는다는 걸 다른 언론사에 은연중에 알렸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게 사장 귀에 들어갔고, 사장이 부담스러우니까 기사의 톤을 낮춰서 내보내는 걸로 결정되고 나간 게 1999년 9월 말이에요. 거기도 진실 보도를 위해서 내부 투쟁이 1년 반 동안 있었던 거죠.

그야말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네. 그만큼 노근리 사건은 미국 정부나 한국 정부나 양쪽 다 중요하고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때 취재팀장을 맡았던 사람은 결국 불이익을 당해서 팀장에서 쫓겨나서 컴퓨터 수리 부서 수리공으로 좌천됐다가 결국 그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러고 나서 남은 팀원들이 똘똘 뭉쳐서 1년 반 동안 사장, 편집국장에 대항해서 이 보도를 만들어내는, 저널리즘의 진수를 보여준게 바로 노근리 케이스라고 할 수 있죠.

노근리 사건 현장에 있었던 미군의 용감하고도 생생한 증언 역시 노근리 평화 기념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저도 언론사를 배우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노근리 사건을 취재해서 퓰리처상을 비롯해서 탐사보도상을 열 개 이상 휩쓸었다는 건 그 보도가 저널리즘 차원에서 상당히 존중받아야 할 보도고,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라는 걸 입증하는 거라 볼 수 있죠. 그리고 대개 언론사들이 한 해를 마감하면서 5대 뉴스, 10대 뉴스를 뽑는데, 노근리 사건이 1999년, 2000년에 거기에 다 들어갔었어요. 지금이야 오래 지나서 잊어버린 분들도 있지만, 그때는 정말 핫 이슈였죠. 지금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봐요.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필요한 것은 용기

보도의 기반이 될 수 있었던 자료 중에 공동으로 쓰신 논문이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혼자 쓰시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었을 것 같은데요.

피해자의 가족인 제가 혼자 쓰는 것보다는 제삼자가 함께 해서 공동으로 쓰는 것이 객관성이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을 채택했었어요. 그때 충북대학교에 최병수 교수라는 분이 계셨어요. 지금은 은퇴하셨는데, 고맙게도 거기에 동참해서 역사학 공동 논문을 썼었죠. 근데 그때 논문에 관한 자료는 이미 제가 상당히 확보하고 있었어요. 피해자로서 이 사건을 증빙할 수 있는 자료를 찾는 노력을 이미 많이 선행했던 거죠. 그렇게 논문을 쓰고, 그다음에 AP통신 보도가 됐죠.

노근리 사건에 관해 공동으로 작성된 역사학적 논문과 국제법 논문의 실제 모습

그 다음 진행 과정이 궁금합니다.

그 논문이 나오고 나서 기자들이 심적으로 상당히 압박을 받았다고 알고 있어요. 왜냐하면, 자기들이 빨리 보도를 하고 싶은데, 논문이 먼저 나와버렸으니까요. 그럴 목적으로 쓴 건 아니었지만요. 그래서 이 논문은 어쨌든 처음으로 미군 관련 사건을 처음으로 논증했다는 차원에서 매우 의미가 있어요. 불편한 진실이지만 학문적으로 논의할 필요성이 당연히 있다고 봤어요. 논의하는 것이 학문이니까.

원래 공부하던 사람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선친께서 쓰신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집필하는 데에 도움을 주시기 전에는 경영학 박사 과정을 밟고 계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당시에 아버님을 도와드리는 데에 고민되는 부분은 없었나요?

(그 당시에 박사 과정을 마치면) 다니던 회사에서 사규상 한 직급 특진시켜주는 제도가 있어서 개인적인 혜택을 볼 수 있었어요. 두 번째로는 사십 대 초반이면 교수로 전직할 기회가 있잖아요. 저는 사실 교수를 꿈꾸고 공부를 했던 건데, 박사 과정을 마치고 졸업 논문을 쓸 타이밍에 부친의 소설을 도와드리기로 했으니까 매우 어려운 결심을 했던 거죠. 왜냐하면, 박사학위 논문을 이걸 해야 했으니까…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부친이 그 당시에 칠십 가까이 되셨었으니까. 그때 칠십이면 적은 나이가 아니었어요. 지금이야 백세 시대라면서 팔십 살 넘은 분들도 많지만, 그때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부친이 소설을 내지 못하면서 한을 못 풀고 돌아가시면 안 되겠다 싶어서 도와드렸는데, 구십 넘어서 돌아가셨죠.

어쨌든 자식 된 입장에서 도와드린 건 지금 생각하면 그 타이밍에 소설이 안 나왔다면 노근리 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점이 없었을 거예요. 거기다가?그게 한두 달 도와드린 거였으면 그런 마음이 덜 들었을 텐데.

들인 시간이 있으니까.

박사 학위 논문을 미뤄놓고 노력한 그 중요한 2년 반의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소설이 꼭 출간되게 만들고 싶었어요. 출간된 다음에는 이 사건을 꼭 이슈화하고, 홍보하고 싶은 마음이 더 들더라고요. 왜냐, 아버님이 들인 땀도 있었지만, 제가 들인 땀도 있었으니까요.

그 결과물. 지금은 3판이 나왔다.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군요.

그때 제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소설을 쓰는 일을 도와드리지 않았다면 소설이 출간될 가능성은 적었을 거예요. 출간이 안 됐다면 노근리는 제대로 시작이 안 됐을 것이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회사에서 승승장구하고, 교수를 하면서 제 개인의 이익을 챙길 수도 있었겠죠.

이런 일이 그 주체가 되는 분들이 어느 정도 지식과 의식도 있어야 하고, 또 외국으로 퍼져 나가게끔 하려면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능력도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관장님의 경우에는 그 이런저런 수완들을 어느 정도 갖추셨기에 이 사건을 지금처럼 국내·외로 부각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지식이 있는 사람이 하기가 편하죠. 근데 지식만 가지고 하냐. 똑똑함만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위험해도 할 수 있는 용기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 싶어요.

용기.

2016년에도 벌어지고 있는 또다른 ‘용기’ ⓒ오마이뉴스

(노근리 진상 규명에 가담하면서) 사실은 이익을 못 봤죠. 개인적인 시간을 더 써야 하고, 했던 공부를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 쓰지 않고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썼으니까. 그 지식을 그렇게 쓴 건 상당히 보람된 일이긴 하지만, 개인이나 가족 차원에서는 사실은 많이 힘들었다고 봐야 해요. 재정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실제로 그런 이유로 회피하는 사람도 많구요.

또 미국은 그래도 자타가 스스로 인권을 주장하는 나라라고 하니까 적어도 객관적인 증거 자료가 있으면 결국은 인정하게 될 거라는 거죠. 그에 대한 믿음이 있었죠.

적어도 회피할 수는 없을 거라는 말씀이신 거죠?

네. 그래서 피해자의 말로만 해서는 안 되는 문제다, 뭔가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증거를 찾는 데에 노력했습니다.

강자들이 약자의 대답을 받아내는 건 쉽지만, 사실 약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건 정말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탄탄히 준비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신 거겠죠.

그렇게 준비한 결과 위에서?(AP 통신이) 기획 취재를 했잖아요. 이걸 위해서 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기획 취재를 준비해야 하는 타이밍과 딱 맞아서. 그것에 의해서 노근리가 크게 보도될 수밖에 없었고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맞아요.

천운이 따랐다는 거군요.

정말 따라줬죠.

 

제2부 예고

노근리 같은 케이스가 또다시 생겨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인 거군요.

네. 왜냐하면, 시민 사회가 힘을 모아주고, 정부가 주도했으면 그렇게 오래 걸릴 필요도 없었어요. 반세기 왜 걸려요. 그게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인 거예요. 유명 성명서 발표하는 데에 50년 걸렸어요. 시민 사회가 단합이 되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려고 그들을 대변해주려 했다면 50년 걸릴 일이 아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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