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아재’의 시간은 더 빨리 간다

10대 시절, 서울을 너무나 동경했다. 신촌~홍대의 불야성 속에 삼삼오오 청춘을 만끽하는 대학생들처럼 되고 싶었고, 광화문~을지로의 우뚝 솟은 빌딩 숲에서 멋진 수트를 입고 활보하는 직장인들처럼 되고 싶었다. 그래서, 삼수까지 해 가며 상경했나 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그래서,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을 때 죽을 만큼 가기 싫었다.

출발?전날 거울을 보니 웬 거뭇거뭇한 피부색, 나온 배, 늘어진 빤스 차림의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한때 서대문-광화문을 걷다 교보문고에 들러 산 책을?카페에서 읽다가 모르는 여자가 주는 팬케이크를 공손히 받아 맛보던 도시남자는 어디 가고…?시트콤 ‘세친구’의 박상면 같은 남자만 남았나!

아아아아 ⓒ MBC

 


 

HOW 아재 IS MADE

~ 태어나는 데는 순서 있지만 아재 되는 데는 순서 없다 ~

 

재료 1. 지방 직장생활과 알콜

지방으로 내려간다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 내 마음 속 ‘도시남자’에 사형 선고가 내려진 듯한 기분이었다. 서울 생활의 삭막함, 막막함에서 벗어난다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내게는 그런 것보다는 아저씨 같은 몸, 사투리, 술로 점철된 단조로운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 vonvon

아니나 다를까, 지방에서의 삶은 예상대로였다. 퇴근을 하면 직장동료와 회식을 하거나, 친구들과 한 잔 하거나, 새로 알게 된 사람들과 한 잔 하거나… 한 잔 또 한 잔이다. 개인적인 시간이 알콜과 타인들에게 착취당하는 기분이었다. 서울 생활 때는 안 보고 말 사람들은 그냥 ‘스킵’하면 됐지만, 지방에서는 쉽사리 어떤 자리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한 다리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좁은 곳이었으니까.

남자라면 아마도 영화 ‘Her’의 테오도르처럼 감각적인 아재가 되고 싶겠지만, 지방 생활의 현실은 나를 ‘내 깡패 같은 애인’의 동철처럼 만들어 버렸다.?불룩해진 배, 칙칙해진 피부, 단조로워진 어휘 구사, 고장난 분노 조절 능력, 다른 행성 사람이라도 된 듯 대하기 어려워진 20대들. 그렇다. 아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뭘봐? ⓒ영화 '내 깡패같은 애인'

 

재료 2. 결혼 및 가정생성에 대한 압박

상대적으로 빠른 지방의 결혼 분위기 또한 ‘아재화’를 앞당긴다. 서울 생활 때는 당장 다음 달의 월세며 생활비 등 경제적인 부분과 진로, 꿈 같은 것들 때문에 결혼은 먼 세상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여기서 결혼이란 언제 하느냐에 대한 문제에 가깝다.

지방의 남자들은 결혼 과정이 비슷하다. 30세 언저리에 취직을 했고 애인이 있고 약간의 조건만 맞으면 부모의 일정 지원 하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게 보편적이다. 일단 집값이?서울이나 다른 대도시에 비해 최소 1/3에서 많게는 1/n로 저렴하고, 20세 후반까지 부모와 함께 사는 경우엔 타지 생활에 비해 월세 같은 소요 비용 부분에서 꽤 많은 돈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정을 꾸리고 부모가 되는 과정은 남녀를 불문하고 나를 위한 삶보단 가족을 위한 삶을 의미한다. 결혼 전에는 남들에게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는 데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했다면, 이젠 가족과 자식들을 위해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게 되는 것이다. 집 융자금, 차 대출금 갚고 애기 예방접종비 내고 경조사 부조금 내야 되는 상황 앞에서, 광고에서나 보는 멋진 삶은 ‘꿈’으로 멀어져 간다.

 


 

서울 친구들과 함께 있는 단챗방에서는 누구의 신보가 나왔고 어디 락 페스티벌에 누가 오는지, 무슨 감독의 신작이며 작품 전시를 주제로 한 문자들이 떠다닌다. 반면 고향 친구들의 채팅방에서는 돌잔치 공지, 결혼식 안내 그리고 2세 사진이 올라온다. 오늘도 하나의 채팅 앱에서 두 개의 세상 중간 어디쯤에 끼어 있는 나를 발견한다.

상경했을 때만 해도 나의 30대는 연륜과 취향이 적절히 조화된 썩 괜찮은 #Mood의 아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방의 삶의 무게는 오승환의 돌직구처럼 묵직하고 빠르게 날아왔고, 다른 건 쳐다볼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지방의 우리는 아재가 된다. 서울에 있는 당신들보다, 조금 더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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