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GV EVERYWHERE
친구야, 이건 농담이 아니란다
바야흐로 가격 차등제의 시대다. 시작은 CGV였다.?지난 2월 3일부터 “가격 다양화 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시간대별, 좌석별 가격을 다르게 매기기 시작한 것이다. CGV 측은 가격이 조금씩 달라졌을 뿐, 실질적인 수익은 이전과 동일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뜯어보면 이 제도는 아무런 시설/서비스 개선 없이, 좋은 자리에서 영화를 관람하고픈 사람들의 욕구만을 이용해 더 많은 수익을 노리는 모양새를 띠고 있다.
이게 CGV 혼자만의 일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난 4월 29일엔 롯데시네마도 ‘프라임’ 시간대를 도입한다고 공지했다.?말이 좋아 프라임이지, 거의 하루종일에 가까운 낮 1시부터 밤 11시의 구간에 프라임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일반 티켓보다 천 원을 더 받겠단다. 이 와중에 그래도 좌석에 대해서는 관대한 모양인지, 어느 시간대 어느 좌석이건 A열은 1,000원이나 할인해 준다고 한다!
이쯤 되면 불안하다. 다음은 어디일까? 영화관 외의 다른 여가 공간에도 프라임 좌석이 생기고 프라임 시간대가 생기고 프라임 서비스가 생기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지금부터 몇 개의 가상 시나리오를 소개한다. 웃기려고 쓴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곳이 CGV처럼 운영된다면, 충분히 일어날 만한 상황들이다.
CASE A. 카페
(1) 직원에게 주문을 하려니 자리가 어디냐고 묻는다.
(2) 창가, 그보다 안쪽,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카페 중심부별로 음료 가격이 달라진다고.
(3) 창가 쪽이라고 하자마자, POS단말기 화면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가격 밑에 ‘창가 1ea 500원’이 추가된다.
(4) 테이블 회전 때문인지 머물 시간까지 물어보는데, 4시간이라 하니 음료당 300원을 더 붙인다.
(5) 한창 떠들고 나서 좀더 머무르려 했더니 테이블 위 진동벨에서 알림 소리가 들린다.
(6) “16시부터 21시까지는 좌석 결제가 필요한 프라임 타임입니다. 연장을 원하실 경우 진동벨을 들고 주문대를 찾아주세요.”
(7) 아무래도 이제 간만에 만난 친구와 회포를 풀려면 이 카페는 글른 것 같다.
CASE B. 헌팅 술집
(1) 입장하자마자 계산대 직원이 물어본다. “좌석 어디로 하시겠어요? 몇 시간 계시겠어요?”
(2) 창가 자리를 달라고 했더니,?거기는 ‘스페셜존’이라 안주 메뉴당 1,000원씩, 소주 1병당 100원씩이 더 붙는다고.
(3) 시간은 3시간으로 하겠다고 했더니, 안주와 소주에 각각 개당 500원, 50원씩 웃돈이 붙는다.
(4) 두 시간 반이 지나서 드디어 또래로 보이는 여자 둘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5) 농담 따먹기를 하며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그쯤, 칼같이 테이블 위 진동벨이 울린다.
(6) “20시부터 23시까지는 좌석 결제가 필요한 프라임 타임입니다. 연장을 원하실 경우 진동벨을 들고 주문대를 찾아주세요.”
(7) 여기도 저번에 갔던 카페와 똑같은 진동벨 업체를 쓰는 모양이다. 내가 없는 허세를 쥐어짜 카드를 꺼내들고 일어났더니, 그녀들이 정말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하고는 일어나 사라졌다.
(8) 아무래도 이번 술자리도, 그녀들과의 만남도 이대로 쫑인 듯싶다.
CASE C. 노래방
(1) 동아리 회식 3차로 노래방을 왔는데, 여기서는?웬일인지 아무 방에나 원하는 대로 들어가라고 한다.
(2) 평소 노래 부르는 걸 즐기지 않아 일단 ‘인기 차트’ 버튼을 눌렀다.
(3) 곡마다 가격이 매겨져 있다.
(4) 동아리 선배에게 어필하고 싶어 듀엣을 권하기 위해 “봄 사랑 벚꽃 말고”를 골랐다.
(5) 인기곡에 해당하는 결제 금액 1,000원이 후불 결제된다고 뜬다.
(6) 다들 분위기 띄우겠다고 신곡을 예약한 끝에 1시간 만에 후불 합계 4만 원을 찍었다.
(7) 앞으로는 저렴하게 놀기 위해 ‘콘서트 7080’ 차트를 외워야 하나 싶다.
CASE D. PC방
(1) PC방에 갔더니 알바가 대뜸 흡연하느냐부터 물어본다.
(2) 흡연자 기준 흡연 구역에서 제일 가까운 자리는 시간당 100원씩이 더 붙는다나.
(3) 됐으니까 아무 자리나 달라 했더니, 이번에는 무슨 게임 하느냐고 묻는다.
(4) 롤을 한다 했더니 그 게임은 PC방 프리미엄이 세서 1시간에 200원씩 또 더 부과된다고 한다.
(5) 1시간 천원이라던 옥외광고 보고 들어왔는데 1,200원이라니, 어이가 털린다.
(6) 괜찮으니까 3,600원 충전하고 3시간 하겠다고 했더니,?계산 직전, 알바가 어색한 미소를 띠고 급하게 POS단말기를 만지며 말한다.
(7) “아 손님 잠시만요. 제가 노키즈타임 할인을 까먹었어요. 아직 3시 아니잖아요??좀 있다 키즈타임 되면 초딩 손님이 많아져서, 저희가 ‘키즈타임’ 아닐 때는 시간당 50원 할인 들어가세요.”
(8) 이쯤 되니 내가 어쩌다 하고 많은 게임 중 롤을 하게 됐나 싶다. 잠시 후 ‘키즈타임’이 왔고 초글링 키즈들이 소환사의 협곡으로 몰려왔다. 내게는 현자타임이 왔다.
CASE E. 찜질방
(1) 몸이 찌뿌둥해서 찜질을 하러 찜질방에 왔다.
(2) 요즘은 찜질방도 다 전자식인가 보다. 결제할 때마다 팔찌에 결제 항목이 등록된다고.
(3) 황토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와중에 감은 눈을 떴더니 팔찌에 ‘71’이란 숫자가 찍혀 있다.
(4) 다른 방을 들어가려 나왔더니 이제야 안내판이 보인다. 30분에 400원씩 과금된다고. 아까 본 71은 몇 분 들어와 있었는지 체크한 거였구나.?뭐 900원쯤일 텐데, 나쁘지 않은 듯.
(5) 이 방 저 방 신기해서 돌아다녀 보다가 중앙 홀에 돌아왔다. 홀에서도 8시간 이상부터는 과금 시스템이 가동된다고.
(6) 샤워를 마치고 나와 결제하려니 황토방, 소금방, 산림욕방 등 돌아다닌 흔적이 추가 요금 4,600원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7) 이럴 바엔 ‘수방사’에 사연을 넣어 안방을 불가마로 개조해 달라고 부탁하는 게 싸게 먹히겠다.
CASE F. 수영장
(1) 간만에 몸 좀 풀려고 동네 수영장에 왔다.
(2) 자유 수영하러 왔다니까 레일별로 연령대별로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이곳이야말로 진정 자유시장경제 자본주의다.
(3) 배짱 두둑하게 연령대 무제한 레일 입장권을 샀다. 제일 싸니까. 뭐 별것 있을까.
(4) ’08년도 박태환 모드로 다이빙하려는 순간, 아이들의 함성이 내 귀를 찌른다.
(5) 물장구치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말리지 않는 엄마로 가득하다.?옆을 쳐다봤더니 차례차례 출발하며 반환점을 찍고 오는 일렬 종대 행렬이 눈에 들어온다.?여기가 수중 지옥인가.
(6) 힘겹게 시간을 꽉 채워 나와 매점으로 갔다.
(7) 방금 입장권 사면서 아낀 2,500원으로, 기어코 바나나 우유와 크림빵을 샀다. 이걸 포기하느니 수영 자체를 포기하겠다 맘먹으면서. #참잘했어요
CASE G. 지하철
(1) 월요일 아침. 간밤의 나를 원망하며 대충 머리만 말린 채로 지하철?역에 뛰어들어왔다.
(2) 예전 습관대로 바로 개찰구를 통과하려다, 잠시 멈칫한다. 개찰구 옆의 ‘좌석지정기’ 때문이다.
(3) ‘좌석지정기’는 개찰구 통과 직전 앉을 좌석과 내릴 역, 승차할 플랫폼 칸 번호를 정하고 200원 할인을 받게 해 주는 기계다. ‘대학어제’에 소개된 좌석지정기 꿀팁 기사가 생각나서, 대기열에 줄을 선다.
(4) 1초도 늦을 수 없기에?건대입구역에서 2호선 환승이 가장 빠른 1-1 칸 탑승을 눌렀다.
(5) 입석임에도 다른 칸에 비해 300원이나 더 붙는다고 나온다. 이상하다. 할인을 해 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
(6) 어쨌거나 결제를 누르고 카드를 대어 금액을 지정한 다음 개찰구를 지난다.
(7) 몸이 너무 안 좋아 반차를 쓰고 이른 오후에 퇴근한다.
(8) 좌석지정기를 확인해 보니 좌석 요금이 아까 출근 때의 입석보다 싸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른 오후의 지하철은 한산했기에, ‘프라임 러시아워’가 아니었던 것이다.
(9) 아파서 앉아 가려 해도 기계의 허락을 받아야 하다니 골고루 빡친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집으로 간다.
오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길 빠져나가야겠어 아니? 안되잖아?
…정말 이렇게 되었다간 주말에는 사실상 집안에 방콕 들어가서 선풍기 틀어놓고 누워 핸드폰만 만지작거려야 할 각이다. 모든 것에 프라임 가격이 있다니, 정말 골든 빌리지한 세상임에 틀림없다. 그런 곳이 더 이상 가까워지기 전에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이 시나리오의 실현을 저지해야 하겠다.
아까부터 골든 빌리지가 뭐냐고? 올해 들어 가격차등제를 가장 앞장서서 적용한 CGV의 약자가 “CJ Golden Village”라서 그렇다. 모 대기업이 꿈꾸는 ‘황금 마을’이 프라임 좌석과 프라임 시간대, 프라임 상품의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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