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연대책임’이 필요한 곳은 따로 있는데
보통은, 왜 나까지 이 책임을 지나 싶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난 ‘연대책임’이라는 제도가 정말 싫었다. 명분상으로는 ‘하나의 단결된 조직으로서 어떤 사태에 대해 책임진다’라는 차원에서 한다고 하는데, 정작 그것은 연대해서 책임질 필요가 없는 사소한 일에만 적용되었다. 밤늦게 전화를 못 하게 한다거나, 눈 오는 날 진입로 빗자루질을 열심히 시킨다거나. 정말이지 아무 쓸 데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 제도의 명분은 의미가 없다. 그저 군대 같은 조직에서 구성원의?이탈을 막고 행동을 제약하려는 목적만이 있다. 그런데 요즘은, ‘하나의 단결된 조직으로서 어떤 사태에 대해 책임진다’라는 명분을 생각해 볼 때, 어떨 때는 그런 의미의 연대책임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옥시레킷벤키저의 가습기 살균제 사태, 그리고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사의 불의한 희생 앞에서 더욱 그렇게 느낀다.
구분해서 책임을 질 수 없는 순간
지난 28일 저녁 6시가 될 무렵이었다. ‘스크린도어 정비업체’ 소속 직원 김모 씨는 ‘2인 1조 작업’ 매뉴얼을 따를 수 없어 그냥 혼자 공구 가방을 둘러메고 구의역 9-4번 스크린도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가 소속한 업체의 나머지 정비인원 5명은 나머지 48군데 역을 관리하느라 바빴다. 그가 어두운 선로 한쪽 끝에서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을 때, 서울메트로는 당연히 그가 스크린도어 너머 안전한 승강장에서 작업하고 있으리라고 믿고, 정시 운행의 속도대로 열차를 달렸다.
생일을 앞두고, 가방에 넣어뒀던 컵라면조차 먹지 못하고 참변을 당해야 했던 스무 살 김모 씨의 죽음을, 그러면 이제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열차를 멈추지 않았던 지하철 운전기사? 3조 2교대 근무를 ‘돌리는’ 것에 태만했던 정비업체? 자기 일 아니라는 듯 CCTV도 제대로 보지 않았던 구의역 역무원? 박원순 서울시장? 아니면 누군가의 말 처럼 매뉴얼에 써 있는 “역무실 작업일지 작성”이며 “전자운영실 통보”, “작업표지판 설치”를 하지 않았다던 당사자 김모 씨?
이 모든 것은 명확히 구분될만한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하나의 비극 앞에 모든 공모자들과 관계자들이 누구랄 것 없이 일치단결하여 책임지고 행동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것이야말로 ‘연대책임’이 필요한 순간이라 할 것이다. 무슨 접촉사고?처리하듯, 누구 누구한테 몇 대 몇의 과실 비율이 있는지 캐물어 따지는 대신 말이다.
우리는 번번히 ‘모두에게 책임’을 묻지 못한다
옥시 가습기 살균제?역시 그렇다. 지금 연구하고 수사해 보니, ‘옥시레킷벤키저’가 기업의 이름을 달고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그런데, 폐를 화석처럼 굳게 만든다는 사실이 그토록 분명한데, 어떻게 그 제품들은 지금까지 버젓이 마트와 슈퍼에 진열될 수 있었을까? 왜 어떤 행정력도, 규제도, 절차도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가 시장에 유통되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을 막지 못했을까?
일류 학자는 기업이 원하는 연구 결과를 제공했고, 거대 로펌은 이를 근거로 옥시 측을 대변했고, 정부는 독성 검사 한 번 제대로 시키지 않았다. 검찰은 숱한 피해자가 발생하고 옥시 가습기 살균제가 그 주범으로 지목된 지 4년이 지나서야 수사에 나섰고, 언론은 사건이 확산되자 본격적인 보도를 시작했다.
모두가 각자의 잘못을 했기에, 누구에게도 전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적당히 몇몇을 탓하고, 그(것)들을 벌주고, 적당히 넘어간다. 그 누구도 완전히 책임지지 않는 우리 사회는, 누군가에게 여전히 만만한 먹임감으로 취급될 것이다.
정작 ‘연대책임’이 필요한 곳은 따로 있는데
모든 것이 체계적이고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책임’은 나누어진다. 그리 나쁜 현상은 아니다. 내 탓이 아닌 그 “연대책임”을, 누가 좋아한단 말인가? 각자에게 주어진 영역과 권한 안에서 책임을 나누어 지는 것은, 분명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방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 터질 때, 이것이 과연 누구의 책임인지를 가려내기가 어렵게 된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 ‘누가 무엇에 대해서까지만 책임을 질지’를 가르고 판정하는 것이 어렵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의 판단 능력이 떨어지거나, 애초에 그렇게 두부 자르듯 잘라서 책임을 나눠서 해결할 수 있을 사안이 아니거나.
책임 소재와 과실 비율을 따지는 분명함보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연대책임을 지는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책임을 분리하고 정부가 한 발을 빼고, 관리자가 눈을 피하고, 학자가 한 걸음 물러서고 업체가 약간 몸을 돌리고 검찰과 언론이 각자의 핑계를 대도록 허락한다면 우리는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추모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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