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소름끼쳐줘, ASMR
사례 1
미용실 내부를 배경 사진으로 고정된 화면 너머에서, 익숙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며 방울방울이 세면대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 미용 가위가 샤각샤각 소리를 내며 숯을 치는 소리, 네모난 스펀지로 정수리부터 귀 끝까지를 탁탁 털어내는 소리. 모든 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당신의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 느껴진다. 끊어지는 머리카락 소리를 듣는데, 왠지 골이 저릿저릿 떨린다.
사례 2
가수 강민경이 면도기를 들고 앞에 나타난다. 그가 눈을 감기더니, 따뜻한 물과 면도젤을 볼에 발라 주는 소리가 들려온다. 귀로는 사각사각 털을 깎아내는 소리가 들고,?눈앞에서는 그가 미소짓는 것이 보인다.?이윽고 그와 당신은 소파까지 저벅저벅 다가가고, 강민경은 당신을 소파로 끌어당기며 키스를… 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입술이 카메라 앞까지 들이대어지는 것이 화면에 비친다.
우리 주변의 일상 소리를 듣고 순간 짜릿하게 움찔하는 일이 있을까? 믿기 어렵겠지만 가능하다. 인터넷을 잘 뒤져보면, 미용 가위 소리, 면봉으로 귀 청소를 할 때의 긁히는 소리, 마사지로 살갗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는 소리 같은 것들을 들을 수 있는 동영상을 많이 찾을 수 있다. “ASMR”이라는 이름으로.
오! 내 자율감각이 쾌감 반응을 일으키고 있어!
ASMR은 ‘자율감각쾌감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의 약자이다. 귀를 자극하는 일상의 작은 소리를 들으면서 짜릿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덜렁 마이크 한 대 놓고 녹음한 것이냐 하면 그보다는 더 고급 기술이 적용됐다. 위상차를 이용하는 “바이노럴 마이크”로 해당 음성을 녹음하기 때문에, 이어폰으로 청취하면, 실제 내 귀 옆에서 나는 소리인 듯한 입체감이 살아난다.
2014년 이후, ASMR 영상을 주기적으로 업로드하는 YouTube 채널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ASMR 청취자들은 조용한 소음과 속삭이는 소리가 심리 안정감을 유발해서 잠을 잘 오게 한다는 점에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적지 않은 ASMR 영상의 공통된 끝인삿말이 ‘안녕히 주무세요’인 것은 그런 이유다.
ASMR에서 제공하는 영상 종류는 다양하다. 물체를 손가락으로 딸그락 딸그락 부스럭 부스럭 만지는 소리, 이빨로 딱딱한 음식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마이크 가까이에 대고 속삭이는 스크스크”SKSK” 소리 등. 하지만 단연?많이 등장하는 종류는 이른바 ‘롤플레이’ 영상이다. 머리 커트나 마사지 같이, 누군가 나를 ‘돌봐 주는 듯한’, 일상에서 있을 법한 상황을 연출하면서, ASMR 소리로 그 느낌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예컨대 미용실 헤어커트 롤플레이라면, 직접 손님을 안내하고 샴푸질하는 소리, 미용 가위로 머리카락 자르는 소리, 두피 마사지며 스펀지로 머리 터는 소리를 들려 준다. 별 효과 없을 것 같다고? 글쎄 일단 눈을 감고?5분 정도 들어 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 현장을 그대로 녹음/녹화하거나 굳이 관련 자료화면을 틀어 주지 않더라도, ASMR의 소리만으로도 놀라운 간접 경험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아니 이런, 시각적 반응까지 곁들여지다니 이건 좀 민망한걸?
헌데,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외국의 신문물인 ASMR이 한국에 오자, 한국 ASMR 채널에는 백이면 백, “Realistic Roleplay” ASMR이 만들어져 올라와 있다. 롤플레이 ASMR은, 방금 본 ASMR과는 다르게,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서 영상 진행자가 직접 연기를 해서 보여주는 유형이다. 진행자가 시연하는 것을 관람자가 직접 보고 있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소리를 즐기는 것도 있지만, “나를 돌봐 주는 누군가”를 간접 경험한다는 느낌이 훨씬 더 강하다.
뭐가 문제냐고? 정말 잘못 하면 ‘야동’보다 민망해지기 때문이다. 2013년에 있었던 ‘강민경 질레트 영상’ 이야기를 아시는지? 면도기 제조업체 질레트가 “강민경 3D 체험”이라는 바이럴 영상을 공개했는데, 강민경이 남자친구의 면도를 해 준다는 내용의 롤플레이 ASMR?음향이?1분 20초 동안 나오는가 싶다가, 그 뒤에 ‘남자친구의 시선’에서 바라본 강민경이 남자친구 옷을 잡아당기며 소파에서 키스를 하는 영상이다.
설명만 들으면 아무 느낌이 들지 않겠지만, 이 영상을 감상하다 보면 자극이 사라지는 ‘충격’이 온다. 강민경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면도를 하는 듯한 기분을 소리로 느끼고 있으려 했는데, 느닷없이 그 자극의 흐름이 강제로 끊기고 강민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카메라 앵글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광고가 선정적이다”, “최신 일본 야동 같다” 등등의 비판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황색 언론의 타겟이 된 것은 물론이고.
그래서 혹자는 ASMR 자체를 이렇게 자조적으로 비판했었다. 이게 ‘먹방‘ 같은 대리만족성 예능과 뭐가 다르냐고.?일상에서 요리, 육아, 결혼을 경험할 시간/경제적 여유가 없으니까 일상 예능과 ‘인방’이 판을 치는 것 아니냐고. 그리고 그 감상의 끝이 허무하듯, 롤플레이?ASMR 역시 그런 거라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미용실 고급 서비스며 마사지 따위를 ASMR로 간접 경험하고 나면, 영상이 끝나 자극이 사라진 뒤 남는 것은 더욱 허무해 보이는 일상뿐일 것이고, 그러니 이런 걸 지나치게 좋아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흠, 이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달라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비판이다. 하지만 이는 ASMR의 진가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조금 섣부르게 걱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잠이 오지 않는 자취방에서 종종 ASMR 음향을 듣고 있는 나로서는, 이게 허무함만 남기는 예능처럼 감각을 허탈하게 비워 버리는 오락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실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ASMR이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은, 경험에 대해 내 스스로 상상하도록 자극한다는 점이다.?그저 눈 열고 귀 열고 받아들이기만 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재밌게도, 많은 사람들은 ASMR을 눈을 감고 침대에 누운 채로 감상한다. 라디오 드라마를 듣는 것과 비슷하게, ASMR 청취자들은 그 소리를 길잡이 삼아 자기만의 상상과 감정에 젖는다. 예컨대 미용실 롤플레이를 들으면서 내가 미용실에 있다는 착각을 한다기보다는, 언젠가 미용실에서 경험했다가 잊고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즐기는 식이다. 미용실에서 있었던 일을 미용실에 앉아서 생각하는 건 꽤 어렵지만(직접 해 보라!), 편히 누워 충분한 감각적 자극의 도움을 받으며 상상에 잠기는 것은 그 깊이가 다르다.
그 감각은 상상을 자극하는 감각이기에, 사라지더라도 허탈함만 남지 않는다. 나의 과거 경험을 끌어올리고, ‘아 갑자기 머리 하고 싶다 다음 미용실 갈 때가 언제쯤이지?’ 같은 생각에 설레게 해 준다. 마사지나 귀 청소 같은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다고? 걱정 마시라. 경험한 적이 없는 체험이라도, ASMR의 자극은 상상력을 발휘해 그 상황을 유추하며 만끽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다. 소설책의 활자가 소설 속 주인공의 심정을 상상케 하는 데 전혀 부족하지 않듯이.
몇몇 ASMR 롤플레이에서도 이를 반영한 실험작(?)이 발견된다. ‘꿈을 파는 가게’, ‘비행기로 멀리 여행 떠나기’, ‘가상의 우주여행’ 등등. ASMR 본연의 목적인 청각자극에 의한 짜릿함은 물론, 청각 자극에 기반한 가상 체험까지 떠올리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서 청취자는 이것이 실존할 리 없는 경험임을 알면서도, 자기만의 상상으로 경험의 빈 공간을 채워넣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상상의 세계는, 자극이 끝나더라도 마음 속에 보란 듯이 남는다.
좋아, 누가 VR이 필요하지? ASMR도 한번 맛보고 오라구!
기술이나 트렌드, 감각의 생생함의 차원에서는 VR(Virtual Reality)이 ASMR보다는 더 인기 있고 짜릿하다고 한다. 하지만?ASMR이라는 영상 장르는, 청각 자극을 주는 데에서 시작했더라도, VR에 뒤지지 않는 무궁무진한 확장 영역이 있다고 본다. VR은 어지럽게 펼쳐지는 3차원 화면과 커다란 기계가 필연적으로 수반되지만, ASMR은 좀더 실생활의 경험과 닿아 있고, 경험하지 못한 가상의 현실을 상상하게 만드는 데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가 잠을 잘 때 꾸는 ‘꿈’이 이런 역할이라고들 한다.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꿈꿀 기력도 없이 잠 보충만으로도 바쁜 현대인에게, ASMR은 새로운 상상을 불어넣을 수 있는 ‘인공 꿈’으로 발전할 수 있는 예술 장르라고 생각한다. 마치 꿈이 그렇듯 이것 역시 나를 주체적으로 상상하게 만들어 준다면, 그것이 비록 인공적이고 한시적이라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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