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병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게 나라냐”, “대통령 당장 물러나라” 하는 말이 나오는 시국이다. 상상을 뛰어넘는 진실과 소문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유독 한 가지 소식만이 들리지 않는다. ‘대한민국 어버이연합’을 위시한 어떤 단체들의 항의 집회 뉴스가 그것이다. 정말 최근까지만 해도 방송사 앞에서,?장례식장 앞에서,?검찰청 앞에서?목청을 높이고 욕을 퍼붓던 그들이, 지금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두호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젊은 애들에게 그래도 뭔가를 보여주자 싶어서”, “아버지를 닮아서”, “진짜… 너무 불쌍해서” 그를 뽑아주었고, 지금까지 조금이라도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의 안보에 위기가 올 것 같으면 발 벗고 나서서 어디에서든 불호령을 놓던 분들이 아닌가.
적어도 내가 몇 달 전에 취재차 만났던 어느 보훈단체의 A씨와 B씨는 그럴 분들이었다. ‘앞으로 더 좋아지는 나라’를 위해서, 그 ‘노병’들은 오전에는 어딘가에 가서 무언가에 목소리를 높이고, 오후에는 본부로 돌아와서 긴 시간 TV를 보곤 했다. 시간이 흘러 잊어버린 줄 알았던 그들을 다시 기억해낸 것은, 내가 평소 잘 앉지도 않던 TV 앞에 앉아서 특종 뉴스 방송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편집자주: 특정 단체에 대한 가십성 소비를 방지하고?‘관변 단체’의 일반적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 이하의 취재 내용에서는 모든 인물, 단체, 사건을 블라인드 처리한 점 양해 바랍니다.
“다음 주에 중요한 일 하러 갈 건데 그때 한 번 와 보지?”
사실 처음 그들을 찾아갈 때는 정말이지 아무 계획이나 작전이 없었다. 단지 등하교길에 항상 지나가는 한 건물 간판에 붙은 단체 이름이 뉴스에 가끔 나온다는 것, 그리고 인터넷에서는 그 단체가 ‘틀딱’, ‘가스통’, ‘꼴보수’ 등과 함께 엮여 나온다는 정도만 알았다. 여기를 취재하고 나면 어디든 취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인터뷰 기획을 제출했고 그게 ‘GO’를 받았다. 용기를 내, 그 건물로 들어갔다.
마침 이 단체의 지회장인 A씨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생각보다 흔쾌하게 응해 주었고, 나는 순식간에 ‘요즘 보기 드문 기특한 젊은이’ 캐릭터가 되었다. 오 생각보다 잘 풀리는데? 그 틈을 타서 재빨리 물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오늘 말고 따로 날을 잡아서 인터뷰를 할 수 있을까요? A씨는 더 적극적이었다. 안 그래도 다음 주에 마침 중요한 ‘집회’가 있으니, 그날 거길 보고 나서 얘기하자는 것이었다.
햇볕이 따갑던 그 약속날 아침 10시, 만나기로 한 서울지방검찰청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알았다.?그 중요한 일이라는 게,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해산 촉구 집회”였다는 사실을.
A씨는 당신이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와 호의를 베푸셨다. 이를테면, 한 언론사의 본부장급 되는 분(이하 ‘기자님’)을 연결해 주어서 이날 아침 8시부터 열리고 있었던 ‘특조위 해체 시위’에 대한 정보와 현장 취재 여건을 마련해 주시거나, 중간에 쉬거나 집회 후 건물로 복귀할 때 타거나 할 수 있도록 봉고차 합석이라던지. 물론, 그 본부장 되는 분이 공짜로 준 그날자 신문 한 부도 여기에 포함된다.
봉고차 안에는 A씨와 기자님 그리고 A씨와 같은 단체 소속의 평회원 B씨가 있었다. 내가 차에 올라타 인사를 드린 이후 꼬박 5분간, 당신들은 오늘 집회가 얼마나 중요하며 뜻있는 자리인지에 대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위원장이란 인간이 얼마나 대통령을 모욕하고 있으며, 이게 왜 종북의 소행이며, 이런 데에 갖다 바칠 혈세가 있으면 최신 전투기나 더 사 오면 오죽 좋겠느냐는 등. 예의 바르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고만 있었다. 속으로는 혼자 당황해서, 가방에 달고 있던 노란 리본을 황급히 숨기면서.
잠시 후 검찰청 밖 길가로 나가, 연설자를 중심으로 넓게 벌어진 무리에 합류했다. 시위 참가자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정면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다. 저마다 군복에 새긴 소속 부대 마크가 이름보다 더 돋보였다. A씨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당신이 파병됐던 전쟁터의 햇볕 아래서는 열두 시간도 더 버텼다면서. 그들은 전쟁에 임하는 전사 같았다. 만약 이것이 정말로 ‘종북 좌파’와의 전쟁이라면,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를 전사라고 생각한다면, 이 모든 일은 지극히 이치에 맞는 것이었다.
오전 11시. 꼬박 세 시간 동안 계속된 집회가 그제야 끝났다. 기자들은 양복을 걸친 마지막 연설자에게 재빨리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밀었고, 나머지 400명의 ‘군복’은 포커스를 받지 못했다.?그들에게 그나마 관심을 내비치는 건 이 사람들 가운데서 꽤 지위가 높아 보이는 군복 차림의 남자 한 명뿐이었다. 그는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차분히 독려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아주 애국하신 겁니다.”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 악수를 받는 참가자들이 보였다. 다들 정말 저걸로 충분한 것일까.
“어쨌든 그 고생을 했으니까 우리가 잘살게 된 거겠지?”
‘우리’도 다시 봉고차에 타 복귀했다. 그러던 중 A씨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 구청 관계자가 하필 지금 만나자고 연락한 것이었다. 예정된 인터뷰는 즉석에서 취소되었고, 그는 “뭐 검은 봉투라도 받으면 쏠께” 하면서 그 봉고차를 혼자 몰고 떠났다.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처럼 남겨진 나와 B씨는 대중교통으로 사무실까지 돌아가야 했다. 공덕역으로 걸어가는 동안, 그의 다리가 불편한 것을 보았다.
도착한 뒤 우리는 사무실에 단둘이 앉아 대단치 않은 소식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TV 뉴스를 한 시간이나 보았다. 이판사판이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그에게 물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선생님께 인터뷰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그는 자기는 따로 할 말이 없으니 그냥 살아온 이야기나 해 주겠다며 나를 지하 회당으로 데려갔다.
자넨 어디 살아?
가양동이요.
몇년생이야?
97년생입니다.
어이구. 67년에 내가 월남을 갔잖아. 상당히 오래됐지.
아 베트남 전쟁을 다녀오셨구나. 아까 보니까 다리가 불편하시더라고요. 그건 혹시 그때 다치신 건가요?
전쟁할 때 이제, 비행기나 헬기를 타고서 간단 말이야. 일개 분대씩 다. 한 7~8명 돼. 그 분대를 베트공이 있는 산에 떨구는 거야. 비행기 타고 가서 2미터 상공에서 밀어버린다고. 떨어져가지고 아싸리 큰 소리 내면 그건 다친 거잖아. 아파서 죽을라 하고. 많이 다쳤으면 그냥 사살해 버려. 그냥 전사 통보하는 거지. 팔팔하면 내버려 두고.
그렇지. 친구도 그렇게 죽어갔으니까. 근데 어떡해. 베트공은 저 밑에서 올라와서 전투해야 하는데. 처리하라고 온 건데 방해가 되잖아. 그래서 전사 통보 내는 거야. 전쟁하다 다쳤다? 누가 알아. 소대장으로 왔어도 큰소리도 못 쳐. 나중에 뒤에서 알리면 죽어. 전사 통보 내 버리는 거야 그냥.
그에게는 미처 대꾸하지 못한 이야기지만, 오늘날 우리는 베트남 전쟁을 혹평하는 편이다. 우리는 당시 미국의 무리한 전쟁 의지로 동원된 것이며, 이득도 있었지만 민간인 학살, 파병 군인 피해 등의 손실도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에게 그리고 B씨에게 이것은 전쟁이라기보다는 미국을 돕고 조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달러를 벌어다 준다는 ‘좋은 뜻’으로 하는 일이었고, 그래서 그도 “친구가 그렇게 죽어가는” 모습과 다리의 고통을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치신 후에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상한 부분을 빼 버려도 한 80%는 상관이 없댔어. 그래서 빼버렸지. 그래도 돈은 벌어야 하니까 일은 계속했어. 사우디 리야드에서. 그러다 병이 악화돼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 92년도에 한국 돌아왔지. 그때부터 심심하니까 그냥 여기 나오는 거야. 집에만 있으면 몸도 더 안 좋아지잖아.
댁에 계실 때는 따로 하는 일은 없으시구요?
(이제는)?다른 일은 못해.?몸은 여전히 이상해. 아까 전쟁 얘기 했는데, 여기저기서 베트공이 나오니까 미국에서는 제초제를 뿌렸어. 우리한테도 뿌리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전쟁이 그런 식이야. 그러니까 약 먹어야지. 사무실에 있을 뿐이야, 나는.
이런저런 고생을 많이 하셨네요.
어쨌든 그렇게 고생을 했으니까 나라가 잘 살게 된 거지. 그렇게 된 거야 지금. 자네도 공부하는 사람이니까 생각하는 걸 쭉 밀고 나가. 그러면 앞으로 나라도 좋아질 거야.
(애써 웃으며) 무겁게 생각할 거 없어. 생각하는 거 하는 거야. 난 내 아버지가 하라는 거 안 했어. 우리 아들도 그렇고. 며느리랑 같이 지내고 있어, 아들은. 나는 여기 혼자 살고.
아드님이랑은 자주 만나세요?
얼굴은 못 보고 전화만 가끔 와. 내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얘는 학생이었어. 사회생활 하는 거지. 지금 마흔을 넘었어.
와, 할아버지한테 저는 손자뻘이네요. 외국 계셨다고 했잖아요. 그럼 아들이 클 때 많이 못 봤을 것 같아요.
그렇지. 외국에 계속 나가 있었으니까. 휴가 나올 때야 한 번 보고. 지금은 뭐 가끔씩 만나. 토요일 일요일엔 여기서 일 안 하거든.
아 그러시구나…
슬슬 가자고. 이제 곧 문을 닫아야 해.
“(대통령의 7시간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좋은 뜻으로 하는 중요한 일들에 몸담았던 삶들을 생각한다. 반공이라든가, 세계화라든가, 경제 개발이라든가 하는 것들에 이름도 이득도 없이 젊음을 바쳤는데, 어느 날부터인가는 그들이 잘 모르는 민주화라든가, 복지라든가, 인권이라든가 하는 별도의 중요한 일들이 사방에서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옛날에 그들이 했던 좋은 일들에 대한 ‘혹평’이 나오는 지경에 이르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져 버리면, 그들은 이제 어디로 모여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B씨가 그랬고, A씨도 그랬을 것이다. 잘은 몰라도 그날 하루 서초동 집회에서 보았던 그 숱한 사람들 모두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사실은 그 집회에 GO발뉴스의 이상호 기자가 왔었다. 그는 이제 떠나려는 봉고차의 조수석에 있던 A씨에게, 호의를 담은 얼굴로 카메라맨을 대동해 다가왔다.
“대통령의 7시간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는 방금까지 시위를 한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이 차갑고도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걸 궁금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상호 기자는 더 묻지 않고 A씨의 이름을 물은 다음 훌쩍 제 갈 길을 갔다.
A씨 일행도 창문을 닫고 갈 길을 갔다.
당시에는 ‘왜 안 싸우지’ 싶어서 신기하고 묘한 광경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이해가 된다. A씨 같은 사람들은 이런 일을 많이 겪은 것이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데도 쉴 새 없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보고, 난 정말 좋은 뜻으로 동참했던 것에 대해 집요하게도 ‘이러이러한 진실 알고 계셨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자들이, 젊은이들이, 온 세상 사람들이.
아마도 그들 중 대다수가 지지하고 지키고 싶었을 대통령에 관해, 생전 처음 듣는 엄청난 폭로와 항의가 요 며칠 동안 쏟아지고 있다. 그들과 비슷한 나이대인 대통령은 결국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좀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한마디가 그들에게는 어떻게 들릴까. 아직 이 대통령의 지지율이 17%에 이르는 것은, 흔히들 말하는 “말 안 통하는 노인들이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1번을 눌러서”일 뿐일까, 그 이상이 있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져 TV 뉴스를 끄고 잠시 앉아 있었다. 지금 B씨는 어디서 뭘 하고 계실까를 생각하다가 그만 허망해졌다. 맙소사.?나도 그도 서로의 연락처 하나를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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