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폼 어울리는 그녀, 취미는 엘지라고 하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구원자, 엘지 트윈스.

부모님이 야구를 좋아하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린이 회원도 아니었다. 그냥 야구장이 그렇게 재밌다는 소문만 들어왔을 뿐. 그러다 2011년의 어느 뜨거운 5월에, 선배들을 따라 처음으로 잠실 야구장이란 곳에 가게 되었다.

하필 내가 본 경기는 리그에서도 치열하기로 유명한 롯데와의 경기였다. 통신사나 노트북에서만 보던 이름을 직접 외치며, 없으면 못산다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낯설기만 한지. 어쨌거나, 그렇게 엘지 트윈스와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 선배가 잘못했네

경기가 끝나도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던 그라운드를 나오며 선배에게 물었다..

"엘지 ,잘하는 팀이에요?“

선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음... 잘하는 팀이지! 2위잖아!“

그래, 2011년 트윈스는 2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전의 역사를 1도 몰랐던 나는 정말 응원가처럼 ‘무적엘지’인 줄 알았었다. 그리고 가을이 왔다. 그제서야 ''음'' 거리며 잠깐 망설이던 선배의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뭔가 선배한테 속은 느낌이지만, 팀을 바꾸려고 하니까 차마 다른 곳에 마음을 주기는 싫었다.?이미 엘지의 매력에 빠졌기 때문이다.

 

유니폼 어울리는 그녀, 취미는 엘지라고?하네

남들 한번씩 겪는다는 아이돌 앓이 한번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90년대 프로야구 영상까지 뒤지고 있었다. 내가 봐도 내 모습이 신기했다.?그전까지는 취미가 뭐냐고 누가 물어봐도 딱히 말할 게 없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트윈스 덕분에 ''덕질''을 시작하다니.

그렇게 엘지 트윈스는 밥을 먹고 세수를 하는 것처럼 내 일상이 되었다. 매일 여섯시 반이면 자연스레 야구를 틀어두고, 팀 성적을 확인하며 울고 웃었다. 야구 없는 월요일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94년 꽃미남 신인 3인방이 누구고, 엘지팬에게 있어 이동현은 평생 까방권을 지닌 존재라는 등, 필수 정보들을 달달 외웠다

''몇 년 전 오늘’이라고 매일 뜨는 페이스북 추억에는 그때의 기억들이 빼곡히 남아있지.

엘지를 더 자주 보고 싶어서 경호 아르바이트도 했었다. VIP석 옆에 서서 4시간씩 검표를 해도 응원가가 들려오면 절로 신이 났다.나중에는 경비 아저씨와 친해져서 파울볼을 얻기도 했고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 사인을 받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였다.

심지어 ''취미'' 칸을 채워준 엘지트윈스를 ''장래희망'' 칸 까지 채워볼까 고민도 했었다. 집에서 혼자 캐스터처럼 떠들어 보기도 하고, 블로그에 썼던 한국시리즈 리뷰가 포탈 대문에 걸렸던 기억들이 새록하기만 하다.

 

그리고 2016년은 어떠했더라

솔직히 말하자. 엘지가 강팀은 아니었다. 전문가들도 1강8중1약 정도로 예상했고, 모두가 알듯 우리는 8중에 속해있다. 하지만?시범경기부터 이천웅, 안익훈, 서상우, 이승현, 이형종 등 새로운 얼굴들의 활약이 내 맘속의 엘레발을 깨우기 시작했다. 실제로 시즌 이후에도 제법 선전을 이어갔던 이천웅은 ''이대로 가면 신인왕''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주목받기도 했었고.

올해는 정말 터지는 것인가 ⓒ최훈 카툰

하지만 패턴이 읽힌걸까. 날씨가 더워질수록 신인들의 얼굴을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아쉬움을 달래줄 한 줄기 빛이 남아있었으니, 길고 긴 용병 잔혹사를 끊어준 히메네스가 바로 그 주인공.?특유의 장난기로 덕아웃의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는 모습은 물론,?최근에는 엘지에서 은퇴하고 싶다는 사랑스러운 멘트까지. 숙원사업이었던 ''우타 거포''의 갈증을 해소시켜준 그야말로 특급 용병 되시겠다.

히요미 여권 같이 뺏으러 가실 분 구해요. (1/2000)

야구장 밖에서도 엘지 트윈스의 행보는 특별했다. 여자 연예인 위주로 진행되던 ''시구의 정석''을 과감히 탈피하고 6.25 전쟁 국가유공자를 모시거나, ''개미''로 유명한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초청하기도 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순간은?북한의 목함지뢰 도발로 부상을 당한 하재헌, 김정원 하사의 시구/시타 였다. 맨날 욕만 보다가 ''잘했다'', ''멋지다'' 댓글을 볼 때, 한 명의 팬으로서 자랑스럽고 뿌듯한 그 기분이란.

좋은 기운이 이어진 탓일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나의 사랑 엘지는 가을야구에 진출했다. 비록 유광잠바를 입을 수 있는 날은 적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최선을 다한 선수들을 누가 욕할 수 있으랴.

 

사실, 이기면 어떠하고 지면 어떠하리

새로운 시즌이 다가왔다. 가을 유광점퍼를 입고 싶다는 마음은 나날이 커져만 간다.?가을야구 퀘스트는 깼으니까 이제?우승이 보고 싶은 그런 심리랄까.

그치만, 사실 져도 괜찮다. 이제 그냥 뼛속까지 엘지니까. 아무래도 내 몸에는 검흰 줄무늬피가 흐르는 것 같다. 물론 추격은 해도 역전은 못한다느니, 탈쥐효과는 과학이라는 말을 들을 때 마다 열은 좀 받지만. 특히 가을이 다가오니 정말 과학처럼 순위가 내라가고 있어서 속상하긴 하는데,?난 그래도 엘지 좋아할 거니까 상관없다.

내 인생 첫 취미를 채워준 너, 엘지 트윈스. 너를 좋아하기 시작한 후로 내 버킷리스트에는 웨딩?사진에?엘지트윈스 유니폼 사진을 넣는 것과, 애 낳으면 엘린이로 만드는 것이 추가되었지. 이런 내 마음, 조금이라도 안다면 지금보다 조금만 더 이겨주면 안되겠니…?

어쨌거나, 그래도 여전히 사랑한다 나의 엘지,?영원하라 무적 엘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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