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백남기 농민의 임종 앞에서] ③ 그동안의 ‘집회’를 돌아보게 된 나
나에게 집회라는 것을 처음 알려준 것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였다.?당시 나는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다니던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자습시간마다 미약한 와이파이를 잡아서 진보신당 칼라TV 서비스를 통해 집회를 구경했다.
세종대로의 대오에 앞장선 대학생들은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물대포 물줄기를 우비를 쓴 채로 뒤집어 맞았다. 그러고는 곧장 경찰버스 앞으로 돌아와서 호탕하게 “어 시원하다!” 소리를 쳤다.?다음날에는 (아직 중앙대 교수였던) 진중권 교수가 직접 마이크를 들고 세종로를 활보하는 집회 군중을 만나고 있었다.
군중들은 하나같이 즐겁고 힘이 넘치는 듯 보였다. 경찰버스 바로 앞 연단에서 자유 발언하는 사람들은 자기 속을 정말 시원하게 풀어내는 것 같았고, 온 세상이 그대로 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끓는 마음을 삭이며, 대학교에 진학하면 언젠가 집회에는 꼭 가보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지금, 민중총궐기와 ‘백남기 추모집회’를 보며, 문득 머리를 조금 식히고 되돌아보게 된다.
하던 대로 하는 시위를 보아 왔던 지난 8년
대학생이 된 후 서울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집회에 나갔다. 4대강 살리기 사업 반대,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대학 등록금 인하, 별도의 철도법인 설립 반대, 국정원 대선개입 진상규명, 세월호 진상규명, 국정 국사 단일교과서 도입 반대, 저성과자 해고 및 공공부문 성과연봉제 도입 반대…?하지만 언제나,?무력감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세상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다는 느낌을 거의 받지 못했다.
그 이유가 뭘까를 생각하다가, 적어도 내가 본 8년 동안의 ‘집회 판’에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정직하게 말하자면, 집회에 참가하는 우리가 항상 비슷하게 생각했고 행동했다.
어디서 집회 열린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그 장소가 광화문인지 서울시청 광장인지를 무슨?게임 서버 물어보듯 익숙하게 되물었다. 그 자리에 가서는 종로, 청계천, 사직로의 어떤 동선으로 행진하게 될지를 짐작하고 있었다. 언제쯤 도로를 점거할지, 언제쯤 버스를 끌어낼지, 언제 물대포를 맞게 될지까지 각을 잡아 가며.
익숙한 풍경은 익숙한 결과를 동반했다. 우리는 약속처럼 물대포를 맞았고, 경찰은 익숙하게 지하철 출구를 봉쇄했다. 늦게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이 체포되거나 사진 채증에 잡혀 최대 몇백만 원의 벌금형에 형사 고발되기는 점점 ‘예삿일’이 되었으며, 경찰은 버스 차벽과 물대포를 번번이 업그레이드했다. 이제 경찰차 차벽은 쇠사슬로 묶이고, 물대포는 당연하다는 듯 최루액을 섞어 강한 수압을 기본으로 분사된다.
이제 나는?경찰의 버스와 인파가 세운 장엄한 진지가 공포스럽다. 지나가는 시민들과 시위대를 어떻게든 철저히 분리하려고?필사적으로 막는 경찰, 시위대의 대의를 전달하지 않는 꽉 막힌 언론, 이들을 믿고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정부.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주는 무력감에서 도망치기라도 하려는 듯이, 다시 꾸역꾸역 하던 대로 집회를 열고, 저번 그때처럼 싸우다가, 평소처럼 제압당하는 우리가 있었다.
이보다는 더 치밀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성공적인 시위, 그러니까 세상을 바꿨거나 적어도 ‘바꿀 수 있다’라는 느낌을 많은 시민 동료들에게 전해 주었던 시위는 어땠던가? 군부독재를 끝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이한열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시청에 가야 하는데…”라고 읊조리는 간절함을 보여줬었다. 최근에 화제가 된 이화여대 학생들은 집회 장소, 구호, 누구의 학부 졸업논문을 얼마나 크게 낭독할 것인가까지를 결정하던 치밀함이 있었다. 이젠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생리대를 당당하게 꺼내 보이며 면전의 헛소리꾼에게 면박을 주는 정도의 집요함을 갖고 있다.
경찰력과 언론이 이렇게나 강력하게 해진 오늘날엔, 집회를 통해 어떤 보람을 얻고 싶다면, 사실은 그 정도의 지혜, 집념, 상상력이 더 필요하게 된 것은 아닐까? 예전에는 8박자 구호와 ‘버스 줄다리기’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일단 지금까지의 시위 방법대로 행동하는 시위대는 지금의 경찰에게는 퍽 익숙하고 만만한 것이 되었다는 점이 가장 크다.
얼마나 만만한가 하면…?2008년만 해도 곡사로 몇 분씩 뿌리다가 갼간히 직사로 뿌리던 물대포라는 것을, 이제는 최소 2500rpm의 비인간적인 압력으로 단 한 사람에게 쏟아부어도 좋다고 판단하게 될 정도로.
많은 이들이 백남기 농민의 당시 물대포 피격을 놓고 ‘폴리스 라인’의 문제를 거론한다. 하지만 내게는 그보다도,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뜻을 모아 운집했던 작년 11월의 민중총궐기 집회가,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왜 이 ‘집회’는 우리의 동료 한 사람조차 지키지 못했을까. 물대포가 나올 것을 정녕 아무도 몰랐을까. 지금까지와 같은 수준의 적당한 물대포일 거라고, 정말 모두가 그렇게만 믿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희망한다, 더 보람 있는 집회를
지켜주지 못한 나의 동료가 세상을 떠난 지 9일째 되는 오늘, 나는 이에 관련된 “집회”가 서울 일대에 풍년으로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책상 앞에서 미처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혹시나, 오늘 나간 집회마저 나의 첫 집회와 똑같이 ‘민중가요’를 부르고, 재작년 이맘때의 그 시위 때와 똑같은 경로로 행진해서, 지난 11월의 바로 그때와 똑같이 물대포를 맞는 집회가 될까 겁나서다. 그런 ‘또 하나의 집회’에서 또 한 번의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이제 진력이 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국 직접 광장으로 나가고 싶고, 그래야 함을 뼈저리게 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떡하면, 무엇을 새로 갖추고 어떤 다른 행동을 하면 물대포와 폴리스 라인과 경찰 차벽을 뛰어넘는 모임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세상이 관심을 가지고 더 많이 이야기해 주고 지지해 주는 운동을 원한다. 그러려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늘 하던 대로 남들 따라 깃발 따라 방송차량 따라 가서 물대포 맞고 오는 것 이상의 뭔가 필요하다. 그 죽음 헛되이 하지 않을 만큼 절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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