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기 힘든 것은 아무래도 내가 정상이라서 그런 거야
솔직히 정말로 몰랐던 적은 없었다. 마술사가 멀쩡한 사람을 갑자기 사라지게 해도 어딘가에 통로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학원 친구가 내 손에 쥐어주던 사탕에 순수한 호의가 아니라 ‘오늘의 땡땡이를 우리 엄마에겐 비밀로 해줘’라는 “부탁”의 의미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괜찮았다. 이?정도의 속임수는 서로 민망하지 않게 눈감아주자는 일종의 아름다운 약속 같은 것이었고, 세상에 이 정도의 속임수만 존재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바보가 될 의향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날카로운 속임수가 난무하는 곳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곳에서 괜히 진실을 눈감아주다가는 그대로 바보가 될지도 모른다. 이런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 눈길이 가는 사례가 있었다. 서아프리카에는 높은 당도로 동물들을 유혹해 씨앗을 퍼뜨리려는 식물이 있다고 한다. 모두가 그 달콤함에 속아 식물에게 이용당하지만, 오직 유전적 변화를 일으킨 고릴라만큼은 그 달콤함에 속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들여다보면 우리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이곳에도 속임수를 꾀하는 존재들이 잘 살고 있다. 고릴라는 속임수에 대처하는 현명한 돌연변이가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당하기만 하는 동물이라는 점이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도 돌연변이가 되는 것이 낫겠다.
이곳은 정상보다 돌연변이가 더 살기 좋은 곳이니까.
고양이가 가득한 알바 시장에서 쥐가 살아남는 방법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일할 인재를 구한다는 입양 공고가 채용 사이트에 쏟아진다.?그렇게?고양이는 덫을 놓았고 쥐는 아무런 의심 없이 덫 속의 먹이를 덥석 문다.?과연 쥐가 고양이의 가족이 될 수 있을까? 정답은 아니오.?고양이는 애초에 가족을 구할 생각이 아니라 자기 먹이를 구하고 있으니까.
반복되는 속임수에 쥐들도 배움이 늘었다.
도마뱀처럼, 자신의 꼬리를 잘라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유전자를 변형한 것이다.
이것은 툭하면 쥐의 꼬리를 잡고 마음대로 휘두르는 고양이에게서 벗어 날 수 있는 아주 현명한 방법이었다. 퇴근 10분 전, 다짜고짜 연장해 달라는 부탁 같은 강요를 하며 꼬리를 잡고 놔 주지 않을 때, 최저시급도 아까워하면서 최고시급을 주는 것마냥 부려먹을 때, 알바비가 입금되자마자 다른 알바생을 구할 시간도 주지 않고 꼬리를 자르고 도망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연애바다의 물고기가 어항을 빠져나오는 방법
신성한 연애바다에서는 낚싯대로 한 마리씩 물고기를 잡는 것이 원칙이지만, 요즘 같이 하나라는 것에 만족 못 하는 시대에서는 낚싯대 대신 그물을 쓰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 덕에 자유로운 연애를 꿈꾸며 드넓은 바다를 활기차게 나아가던 물고기들은 하나둘씩 그물에 걸려 ‘어항’ 신세다.
이에 물고기들은 어항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유전자를 재조합했다.
복어와 같이 몸을 부풀리거나, 마음만 먹으면 몸에서 가시를 발사할 수 있도록.
어항 주인의 큰 손에서 벗어나는 가장 효율적인 길은 몸집을 키워 부담스러워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항 주인은 이 고기를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보내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따끔하고 까칠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도 방법이었다.?이것은 관심을 받기 위한 어리광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어항 주인을 귀찮게 만들어 주인의 어항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 되었다. 내보내지든, 버려지든 간에 어쨌든.
곰 같은 팀플 조장이 꿀 발린 말을 뿌리치는 방법
부탁하면 뭐든 다 해 주는 곰. 그들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팀원들은 여왕벌 밑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병정말벌처럼 매우 전략적으로 곰을 구슬린다.?“고등학교 때 학생부였다구요? 어쩐지 믿음직스럽더라니까.”?“어머, 오빠가 나이가 제일 많네요? 모르는 건 오빠한테 물어봐도 되죠?”?달콤함에 눈이 멀고 귀가 막혀버린 곰은 금단의 꿀단지에 손을 집어넣고야 만다. 그리고 돌아오는 것은, 혼자서는 어림도 없는 4인분의 과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이 실수에 지긋지긋함을 느낀 어떤 곰은,
서아프리카의 고릴라처럼, 단맛의 말에 끌리는 유전자를 없애 버렸다.
그 결과 곰들은 팀원들의 온갖 꿀 발린 말들에도 정신을 잃지 않고 냉담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본인 혹은 지인이 아프다, 너무 피곤해서 졸았다, 잘 되던 노트북이 과제를 하려고 하자 먹통이 되었다, 급작스럽게 고모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네이버가 열리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그럼 어쩔 수 없지" 하며 말을 흐렸겠지만, 이젠 그런 미련한 곰 대신 북미 제 1의 포식자 그리즐리 베어처럼 “ㅇㅇ 니 이름 삭제” 라고 단칼에 결론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돌연변이들이 더 많아지기 전에
속임수를 쓰려면 최소 2명이 필요하다. 속이는 사람과 속아 넘어가는 사람. 아무리 재능 있는 마술사라도 관객이 한 명도 없다면 마술이 쓰일 곳이 없는 것처럼, 그 어떤 치밀한 속임수라도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헛수고다. 모두가 모든 관계에서 위에 적은 것과 같은 돌연변이를 일으킨다면, 그래서 누구도 누구에게도 속지 않는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가족이 아닌 가족같은 분위기일 것을 알면서도 그 덫에 들어와 주고, 당신의 어항에 들어올 것을 알면서도 당신 하나를 바라보고 그물에 걸려 주고, 속 보이는 꿀 발린 말을 믿어주며 책임감 있게 과제를 마무리해 주는 이들에게,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으면 좋겠다.?굳이 이 세상의 누군가가 또 돌연변이가 되지 않더라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의 이름으로 나온 최근 기사 (모두 보기)
- 이 시대의 수많은 ‘사이먼 D’에게 - 2018년 9월 16일
- 소확행이 아니꼽습니다 - 2018년 9월 16일
- “창업하는 각오로 진지하게 랩 하고 있는거에요” - 2018년 9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