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역 김군’이 떠난 지도 150일이 되어간다
80년대 노래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은 친구들과 노래방 가는 것이 쉽지 않다. 평소 즐겨 듣는 김광석이나 유재하의 노래를 불렀다가는 눈치 없는 놈으로 찍힌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하나같이 우울한 전주로 시작해서 인생의 허무함을 부르짖으며 끝나는 노래를 불렀다가는 한껏 ‘업’된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주범이 될 것이다. 그래서 노래방에 가면 가급적 조용히 앉아 있는 편이다. 멜론 Top100을 무한재생하며 요즘 유행하는 최신 노래를 들어 보려고 노력도 했지만, 마음을 붙이는 게 쉽지 않다.
노래뿐만이 아니다. 나는 90년대 홍콩 영화를 좋아한다. 특히 첨밀밀은 어려운 중국어로 된 OST를 찾아 들어볼 정도로 감명 깊게 봤다. 최근 영화들을 아예 안 보는 것 아니냐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영화관에 가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중경삼림>의 몽롱한 색감과 우울한 음악, 포커스를 잃은 배우들의 눈 같은 것들이다. 세기말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유의 불안과 방황은 2016년의 나에게도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있다.
소설의 시대착오는 더 심하다. 난 주로 60년대를 읽는다. 언어영역 지문을 통해 알게 되었던 소설들의 여운을 잊지 못하고 20대 중반이 된 지금도 김승옥 소설을 다시 꺼내 읽는다. 심지어 읽는 것만으로는 견딜 수 없어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필사를 해나간다. “살기 위해서는 저처럼 망측한 자세가 유지되어야 한다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이나 “아아, 사람은 다면체였던 것이다.”?같은 것들을 쓰고 또 쓴다.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나만의 비밀스런 고민을 통째로 들켜버리는 기분마저 든다.
누군가는 나의 취향을 허세라거나 위선이라고 일컬을지 모른다. 직접 그 시대를 향유하지 않았고 그 사람들의 아픔을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그 시대의 문화를 좋아하며 즐기는 것은 일종의 위선으로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성적 공감은 반드시 시공간적 조건이 일치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감이란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맥락에서 나오는 울림’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구의역 김군이 싸늘한 컵라면 하나를 남긴 채 떠난 지도 150일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말한다. 김군과 같은 처지가 아닌데도 김군의 죽음에 공감하고 아파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말이다. 맞다. 나는 김군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별다른 등록금 걱정 없이 대학에 진학했고, 지하철이 몇 분만 연착되어도 짜증을 낸다. 그러나 사고 소식과 사연을 들었을 때, 나는 주말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이것도 위선에 불과한 것일까?
만약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타인의 아픔과 감정에 이입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문명 사회는 더 이상 ‘사냥’이라는 경쟁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자신의 밥그릇과 따뜻한 잠자리가 중요하지만, 때로는 나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기도 할 수 있는 ‘어리석은’ 존재들이다.
가끔은 인간의 지독한 이기심에 진저리가 나지만, 그 와중에서도 우리는 불안을 견뎌내고 감정적으로 공감하며 연대해왔다. ?비록 이?사회가 약자를 이해할 만한 아량이 없더라도?상관없는 일이다. 언제나 옳은 것은 변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이러한 연대는 계속 될 것이다.?모두가 ‘김군의 삶’을 겪어보지 않아도 마음을 보태는 일이 가능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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