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도 내일로 갈 거야?

학교도 안 가는 지난 여름방학에 생긴 일

화끈한 학사경고를 겪었던 친구들이 다음 학기 시간표보다 더 공을 들이면서 뭔가를 짜기 시작한다. 어깨 넘어 보니 4박5일 동안의 여행 계획이다. 수많은 지방 곳곳 중에서 가야 할 도시를 고르고 필수 맛집과 관광명소들을 빠짐없이 살핀다. ‘호갱’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코레일과 연계되어 더 싼 가격으로 제공되는 장소들을 챙겨야 한다. 큰 맘 먹고 쓰는 돈에 걸맞는 효율적인 코스인가를 몇 번이고 따지는 모습은 중간고사 시험지를 확인하시는 교수님들 못지않다.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나는 낭만을 즐기기 위해 여행한다고. 그런 그들을 우리는 ‘내일러’라고 부른다.

수강신청을 이렇게 열심히 했다라면…(중략)

만 25세 이하,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으로 미성년의 나이에서 벗어난 20대 초반 사람들은 매년 방학마다 생전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야할 것만 같은 충동에 빠진다. 코레일에서 제공하는 내일로 홍보 포스터의 지난 문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젊은이들을 우리 땅으로 이끌다!’ (2011 겨울)
?‘열정이 식는다는 건 젊은 내겐 두려움이다’ (2013 여름)
?‘청춘이라는 이름에 쉼표가 필요할 때’ (2013 겨울)

코레일은 지속적으로 ‘젊음’, ‘열정’, ‘청춘’ 등의 단어들을 반복하였고,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내일로를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았을 때 이용객들은 고작 8000명이었지만, 2012년 처음으로 이용객수 10만 명을 돌파할 정도였으니. 그리고 올해에는 겨울이 아직 오기도 전에 이미 이전 이용객 숫자를 넘었다고 한다.

우리, 숨 좀 돌리면서 다닙시다

분위기에 발 맞춰 ‘내일로’라는 단어를 달고 나오는 책부터,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 그리고 페이스북 페이지까지. 피하고 싶어도 어쩔 수없이 보게 될 정도로 ‘내일로’는 우리 삶 속에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순천이나 보성과 같은 도시는 ‘내일로’의 수혜를 가장 화려하게 받은 지역일 것이다. 지금도 제 2의 내일로 핫스팟을 꿈꾸며 전국 지자체들은 각종 축제나 행사들을 발 빠르게 준비하고 있다. 어느덧 ‘내일로’는 반짝이고 사라지는 유행이 아닌, 20대의 여행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셀카봉을 들고 다니면서 웃고 있는 ‘내일러’들의 얼굴 가운데에서 언뜻 보이는 그늘을 생각해본다.

대부분의 내일러는 실패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다른 '내일러'들에 의해 인증된 여행길을 고른다. 이제 여행은 마치 누군가의 강요에 쫓겨서 급하게 해치워야만 하는 과제가 되었다. 5일이라는 제한 앞에서 우리는 역마살이라도 낀 듯이 강박적으로 기차를 타고 내린다. 마치 선배가 물려준 족보를 더듬으며 주관식 답을 적어가듯 남들이 추천한 맛집, 그리고 코레일에서 할인해주는 장소들 앞에서 우리는 안심하며 사진을 찍는다.

님들 코스대로 안 오시면 보스 못 깸여 ⓒ 게임조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즈음 또 다른 것이 보인다. 올해 여름, 코레일은 기존의 9일권을 없애고 5일권 판매를 확대하였다. 생각해보니 내일로 초기 가격(54,700원)에 비해 가격도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만 났다. 혜택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불만들이 보인다.?이제 눈치를 챌 때가 되지 않았나. 내일로는 청춘 여행의 상징이 아닌 단순한 관광상품이다. 물론 대세 ‘내일로’를 외면하기에는 매력적인 것들이 너무 많다. 매년마다 무료숙박과 같은 지역 지자체의 후원은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속 ‘내일로’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있으면서 저기로 가야한다는 강박도 여전할 것이다.

여행이 방학숙제도 아니고

대학평가마저 취업률을 반영하는 세상이 되면서 우리가 평범하게 누리던 일상 속 경험은 항상 의미를 찾아야하는 피곤한 짓으로 변해버렸다. 그 와중에 대중매체나 서점에 굴러다니는 자기계발서는 하고 싶은 건 무조건 하라고 등을 떠민다. 여기에 소위 멘토들은 열정이 없다고 우리를 매도하며 벼랑 끝으로 내몬다. 그놈의 ‘스펙’은 또 어떠한가. 눈으로 보이는 점수가 아닌 것들을 건드리면서 여행마저 더 이상 ‘버킷리스트’와 같은 것이 아닌 다음 단계, 이를테면 취업을 위해 수행하는 ‘퀘스트’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정해진 코스를 밟아가며 자신의 일기가 아닌 자소서에 무엇을 남길까 고민한다. 마음이 흔들려서 발걸음을 옮기거나 머문다는 말은 온데간데 없고, 남은 것은 최대한 싼 가격으로 ‘뽕’을 뽑아야 하는 효율적인 문제뿐이다. 올해 여름 ‘내일로’의 홍보 카피는 ‘젊음과 열정의 반올림’이었다. 하지만 계속 쉴 틈 없이 연주를 해온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어지는 쉼표다.

그냥 어딘가를 들렀다가 일주일쯤 묵는 건 어떨까. 그것을 정말 낭비라고 부를 수 있는걸까. 무엇이 기다릴지 모르는 여행의 시작 앞에서 노심초사하다가도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반길 수 있도록 넉넉하게 여유를 두는 것을 비효율적이라는 말로 가두어도 되는 걸까. 내일로로 대표되는 효율과 공식의 틀에서 벗어나서 보면 며칠 동안 머물러도 전혀 꺼려지지 않는 멋진 지역들이 정말 많다. 우리가 그런 방식을 알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무를 인내력이 없는 게 아닌지 넌지시 질문을 던진다.

우리 그냥 느낌대로 여행 다닙시다 ⓒ 엠넷

지역경제를 살리고 자연을 보호한다는 취지 아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공정 여행’도 처음 가는 곳을 경험하는 좋은 방식이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터미널에서 만나 가장 빨리 오는 버스를 타는 즉흥적인 여행도, 1년에 한 번은 무조건 같은 장소에서 함께 사진을 남기자는 소박한 약속도 괜찮다. 물론 여행을 하는 방법은 그 누구도 하나로 정할 수 없다. 위에서 제안한 것들 역시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 없는, 여러 여행 방법들뿐이다. 하지만 최소한 ‘내일로’가 전부는 아니다.

조만간 엄동설한의 겨울에 내일로는 다시 새로운 카피를 들고 나오며 당신에게 손짓할 것이다. 그 손짓을 잠시 거부하고, 오랫동안 청춘들을 어화둥둥 달래며 태워주었던 그 품에서 벗어나자. 이제껏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여행의 풍경이 조금씩 당신에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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