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에 가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여주인공 테레사는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들고 토마시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와 그녀가 우연히 만났던 술집에서 둘 사이를 이어주었던 이 책을 테레사는 토마시의 마음에 닿기 위한 입장권으로 여겼다.
당신에겐 그런 인생의 책이 있는가. 찾지 못했다면 당신을 누구보다 반길 곳으로 가자. 당신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책이 세상에는 아직 너무 많다.
위즈덤하우스,"빨간책방 CAFE"
위즈덤하우스는 문학·인문 등의 장르를 다루는 ‘예담’ 그리고 아동 분야를 출판하는 ‘스콜라’ 등 6개의 서로 다른 이름으로 서점 곳곳에 숨어있는 폭이 넓은 출판사다. 하지만 위즈덤하우스가 원하는 독자는 일에 치이고 바쁜 보통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회사원들이 공감하면서 읽는 만화뿐만 아니라 '미생'의 안영이가 일하는 도중에 짬을 내서 읽을 것 같은 <스물아홉살 생일, 죽기로 결심하다>?까지.
이렇게 다양한 분야를 폭넓게 건드리는 위즈덤하우스의 모습은 마치 보라색을 닮아있다. 원래 보라색은 신라의 골품제도에서 성골과 진골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천연물에서 염료를 추출하는 과정이 매우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이 귀한 색이 꼬마 아이들이 원두막 아래에서 사랑을 소근거리는 <소나기>에서 등장할 정도로 흔해진 까닭은 어떤 화학자가 손쉽게 보급할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위즈덤하우스 역시 영어습관부터 생활 운동까지, 귀한 정보를 알고 싶지만 어디서 찾을지 헤매는 사람들에게 가치있는 것을 전파하고 있다.
최근 위즈덤하우스는 또 하나의 색을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2014년 6월부터 손님을 맞이한 카페 <빨간책방>은 수많은 출판사들이 저마다 특색을 내세우며 나타난 북카페 중 독보적인 인기를 끌고있다. 빨간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전국 최고의 빵과 디저트만 선별해서 판매하는 ‘자도 랭킹 샵’이 눈에 띈다. 그리고 바로 오른쪽에는 ‘영화평론계의 유재석’으로 알려진 평론가 이동진이 추천한 책들과 한줄평이 있다.?서점이었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그 책들은 이곳에서 가뿐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뺏으면서 손님의 지갑을 가볍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여기서는 이런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후 자기계발서에 대한 비판적인 담론은 연간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 <피로사회>를 통해서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더 나은 삶을 위한 몇 가지 방법들을 찾는다. 이 와중에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시도하자는 <사소한 차이>의 모토는 밉지 않은 오지랖을 부리는 위즈덤하우스와 닮아있다.
하기 싫은 일 3분만 더하기, 늘 펜을 가지고 다니기, 노는 계획 먼저 세우기 등 책에서 말하는 33가지의 법칙이 담긴 이 책은 확실히 긴 호흡으로 읽어야 결론에 닿을 수 있는 다른 분야의 책보다 접하기 쉽다. 여기에 남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을 수 있는 차이들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가라고 말하는 내용이 마음에 와닿는다.
후마니타스, "후마니타스 책다방"
세상이 하나의 작은 마을이라면 출판사 후마니타스는 관심이 필요한 부분을 MRI로 찍어서 보여주는 의사 역할을 맡고 있다. 돈을 걷기 위한 치료 대신 환자에게 꾸준한 관심을 건네는 모습은 도시의 대학 병원보다는 친근한 동네 병원에 가깝다.
2002년부터 출판계에 입장한 후마니타스가 출판한 책들의 총 개수는 이제 200개가 다 되어간다. 현실의 사회에 대해서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는 뚝심도 특이하지만, 더 눈에 들어오는 건 출판사 소개이다.
‘'사회성이 강한 책을 만듭니다’
그 말을 지키듯 최초의 여성 용접공이었다는 김진숙 씨는 2007년, 노동절 기념으로 후마니타스를 통해 <깔깔깔 희망의 버스>를 내놓았다. 2009년, 기업 쌍용자동차가 3천명의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정리 해고를 하였고 5년 뒤에 후마니타스가 이에 대한 르포르타주 <그의 슬픔과 기쁨>을 출간하였다.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사무실을 겸하여 만든 책다방에 들어가면 한 가운데의 큰 나무가 가장 먼저 손님들을 맞이한다. 의자와 책상 모두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졌고, 유리벽에는 사회 강연 포스터들이 있다. 사회에 수긍하기 보다는 엇나가고 있는 점들을 바로잡으려는 냉정한 시선이 가득할 것 같지만 곳곳에 책다방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손글씨들은 이곳을 더 정겹게 만든다.
후마니타스 책다방은 출판을 통해 사회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겠다는 그들의 발걸음에 함께 맞춰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쉼터이다. 손에 땀을 쥐면서 글을 보고 편집하는 사람들이 오늘도 그곳에서 커피를 만들고 있다.
여기서는 이런 ?책
2008년,?두산이 중앙대를 인수하였다. 진중권 교수는 재임용에 실패하고 학생들은 스승을 더 이상 캠퍼스에서 볼 수 없게 만든 학교에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바뀌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학교는 계속해서 일방적으로 과를 통폐합하고, 교수들 또한 평가에 따라 강의를 하는 기회도 줄어들었다. 그 현장에서 매일 피켓을 들고 서있던 한 학생은 경고보다 무서운, 벌금 2천5백만원을 청구당했다. 그리고 그는 졸업하자마자 대학의 기업화를 아프게 꼬집는 <기업가의 방문>을 쓴다.
강의실의 졸음소리를 깨울 정도로 거센 학생들의 통폐합 반대 운동은 지금도 굳게 닫힌 총장실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공중파 뉴스로는 알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하여 후마니타스 출판사는 새로운 단면과 깊은 근본을 다룬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1984, "편집샵 1984"
'1984는'?출판사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분야 중에서 아트·뮤직·패션·라이프 스타일 전반을 다루는 책을 만드는 것으로 노선을 정하였다. 여기에 맞춰 국내 최고 아티스트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명작을 선택하여 표지를 디자인하는 프로젝트 '아티스트×클래식'은 이들이 세상에 선보인 많은 성과중에 하나다.
이 세련됨의 과거에는 1977년부터 고전문학을 사람들에게 알린 ‘혜원’ 출판사가 있었고, 더 지난 1950년대에는 한국 최초의 대중잡지 ‘희망사’가 존재한다.보유한 역사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이 어떤 모습을 원하는지 빠르게 파악하여 그에 맞는 화장을 선보이는 자유로움이 출판사 1984의 큰 매력이다.
출판사가 많은 파주나 합정을 피해 홍대입구역에 당당히 자리잡은 편집샵 1984를 보고 있으면 트렌드에 정면으로 승부하겠다는 이들의 자신감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과하게 악세사리를 붙이는 식으로 표출되지는 않는다.
편집샵으로?찾아가면 흑백으로 그려진 로고보다도 텐트처럼 펼쳐진 천막에 눈길이 간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스냅백, 향초, 농구 선수 코비 브라이언트를 닮은 피규어가 보인다. 귀여운 무민, 베이브릭 피규어부터 ?‘채플린의 영화들을 표현한 일러스트’와 같은 작품까지 놓인 이곳은 하나의 문화 전시장과 마찬가지다.
어떤 내용을 어떻게 담을지에 대한 고민이 담긴 책들이 함께 있기에 이곳의 세련됨은 단순한 치기로 끝나지 않는다.?전세계의 균형 잡힌 브랜드 하나를 소개하는 월간 매거진 <B>, 건축가 승효상의 건축 철학을 제목과 표지 없이 출판한 책. 독립언론들과의 인터뷰를 하나로 묶은 책 등등. 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궁금한, 어원 그대로 댄디한 책들이 넘친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에 애정을 듬뿍 담아 소개하는 출판사 ‘1984’의 방식은 계속 존중될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책
최근 <패션 위크>라는 사진집을 출간한 남현범의 이력은 출판사 1984가 원하던 방향과 비슷하다. 컴퓨터공학과를 전공한 그는 열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일 보다 한 손으로는 렌즈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셔터를 누르는 짓에 더 끌렸다. 런웨이에서 당당하게 걸어가는 8등신 모델들의 자태가 아닌, 그들을 담아내려는 포토그래퍼들의 찌부러진 미간 그리고 벤치에서 쉬다가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놀란 사람들까지 책 안에 담겨있다.
일말의 목차 없이 사진 만으로 패션위크를 설명하는 책은 들추어 볼수록 다음에 어떤 사진이 있는지 궁금한 사진집이며,?편집샵 1984과 가장 어울리기도 하다.
문학과지성사, "몽로"
4월 혁명으로 인하여 피어난 민주주의의 꽃이 공포정치의 군화에 바로 밟혀버린 70년대 중반, 국가주도형 경제 정책이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 이때 '문학과지성'이란 이름의 잡지로 시작된 잡지는 창간사를 통해 심리적 패배주의가 한국인의 의식을 참담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하면서 발톱을 드러냈다. 그리고?『문학과지성』 동인의 한 사람이 언론 탄압에 저항하다가 사회적 추방을 당한 사건은 출판사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문학과 지성사가 우리 사회에 들어낸 발톱은 최인훈 작가의 <광장>, 이청준 작가의 <당신들의 천국>, 조세희 작가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모습을 바꾸면서 한국이라는 사회가 개인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1978년부터 작년까지 세계 다양한 학자들의 연구실에 다가가 문을 두드리면서 만든 <현대의 지성>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이러한 문학과 지성사의 역사는 성과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그려낸?<피로사회>까지 이어지고 있다.
문학과 지성사의 날선 책들과는 달리 문학과지성사의 출판사 건물에는 카페와 술집이 함께 있다. 낮보다는 밤이 어울리는, 유독 조용한 골목 사이에 있는 곳에서 한자(夢路)는 유독 환하게 빛난다. 그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익숙한 옛날 가요와 서양식 요리를 동시에 건네는 술집이 모습을 드러낸다.
로만다 몽로의 주인장 박찬일 셰프는 이전에 레스토랑의 얼굴마담일 정도로 이름 있고 실력있는 요리사지만, 동시에 전국 방방곡곡의 전통 식당들을 찾아가 그 곳의 조미료가 아닌 역사를 탐구한 글쟁이기도 하다. 맛있기로 이미 소문이 난 박찬일식 튀김을 필두로, 백김치부터 파스타까지 국적을 불문하는 다양한 메뉴들이 있다. 당연히 술도 생맥주부터 위스키까지 골라 마실 수 있다.
음식은 입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는 속설을 따르듯 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문학과지성사의 책들이 모인 테이블이 따로 있다, 전체적으로 초록색 톤을 띄는 식당은 밤이 되면 특히 은은진다. 조명 아래에서 손님은 이곳까지 가져온 일상의 노곤함을 술과 함께 녹인다.
여기서는 이런 ?책
김중혁 작가의 장편소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에서 탐정 구동치는 악어빌딩 4층, 그 중에서도 4-B 사무실에 있다. 소설 속?악어빌딩의 느낌을 현실까지 끌어 온듯한 로칸다 몽로는 악어빌딩의 지하에서 사람들이 유일하게 숨통을 틀 수 있는 소설 속 공간을 느끼게 한다.
포장마차가 소주 몇 병으로 상대방의 진심을 앗아간다면, 로칸다 몽로는 마치 대나무숲처럼 상대방과 나눈 대화를 비밀로 지켜줄 것만 같은 믿음을 준다. 거기서 펼치는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은 검은 열쇠구멍 안에 툭 튀어나온 하늘색 제목과 함께 그곳을 은밀하고 재미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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