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in독일] ③ 약속과 녹색의 도시 베를린

어떤 것이 일상이 되기까지, 그것에 적응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까?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어야 그것에 적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을 뒤로한 채 베를린에 온지도 벌써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매일 쓸고 닦으며 소중히 여기던 내 방에도 어느덧 양말이 굴러다니기 시작했고, 유럽의 햇살을 온 몸으로 느끼며 ‘몸부림치던’ 거리들도 이제는 ‘어학원 가는 길’에 지나지 않는 작은 일상이 되었다. 이제는 지도 없이 Alexander Platz에도 갈 수 있고 Kneipe(PuP)보다는 마트에서 산 맥주를 더 많이 마시게 되었다.

이 생활이 일상이 되기까지 나에게 벌어졌던 일들, 한 달간 지켜본 베를린 사람들의 모습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Termin! Termin! Termin! (약속)

지난 한달 반의 시간 동안 여행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Termin 문화로 대표되는 독일 사람들의 업무방식에 적잖이 당황했다.

우리 집은 인터넷이 포함되지 않은 warmmiete로 직접 인터넷을 설치하든지 Prepaid Surfstick이라는 USB로 인터넷을 해야 했다. USB는 너무 느려서 자동으로 포기. 결국 설치까지 4주가 걸린다는, 한 달에 300기가 25유로짜리 상품을 가입해야 했다. 전화 한통으로 뚝딱, 심지어는 인터넷으로 가입을 해도 확인전화와 함께 다음날 바로 설치기사를 보내주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베를린은 직접 찾아가서 가입을 해야 했고, 설치기사가 오기까지 4주라는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살짝 멘붕이 왔지만 한 달 정도는 베를린의 아날로그 생활을 만끽하기로 했다. 첫 일주일은 흘러넘치는 시간을 주워 담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다음 일주일은 와이파이가 가능한 카페를 찾아 다녔으며 셋째 주에는 매일 카페로 출근을 해야 했지만 인터넷 설치날만을 기다리며 영겁 같은 시간을 버텨냈다.

김치보다 더 보고 싶었던 한국인터넷…

4주가 지났다. 인터넷 설치기사가 오기로 약속한 날(Termin1) 우리는 집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벨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부재중 2통만 남겨둔 채 그는 오지 않았다. 뭔가 혼선이 있었는지 물어보려고 전화를 걸어봤지만 번호 중 하나는 인터넷회사로 연결되는 자동응답에, 나머지 하나는 No Number였다.

일주일 뒤에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겨우 잡았다(Termin2). 설치기사가 오지 않은 것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두 번째 약속도 일주일 후로 잡혔다. 일주일 후 방문한 기사는 ‘이제 될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지만 인터넷은 여전히 불통.

세 번째 약속을 다시 잡아야만 했다(Termin3). 이번에는 열흘 뒤였다. 약속 날, 우린 전화기만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이유를 들어보니 인터넷 신청자와 현관문 벨의 이름이 다르게 되어 있어서 다시 돌아갔다고. 아… 이쯤 되면 탄식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다.

다시 약속을 잡았다(Termin4). 기사님은?일주일 뒤에 방문할 예정이다.

한국택배기사님들 보고싶다…

단 몇 가지 경험으로 한 나라를 정의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내가 느낀 독일은 약속을 중요시하는 만큼 약속을 잡는 데에도 굉장히 신중한 나라였다. 그렇게 ‘약속’이라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나의 일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비록 융통성은 없어 보일지라도 말이다.

 

도대체 누가 독일을 회색도시라고 말했나

"모든 사람들이 단 1분이라도 더 오래 햇볕을 쬐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는 걸세"

독일의 작가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구절이다.

난 이 대목을 읽으며 베를리너를 떠올렸다. 조금이라도 해가 나는 날에는 카페나 공원으로 쏟아져나오는 사람들. 정말 단 1분이라도 더 오래 햇볕을 쬐고 싶어 하듯 베를린 곳곳에 놓인 벤치를 차지하는 사람들을 말이다.

하루에 3분의 2가 넘는 길고 긴 밤과, 습기를 머금은 추위가 뼈 속까지 시리게 하는 독일의 겨울. 그 겨울이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독일을 회색도시라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긴 터널 같은 겨울을 버텨내면 회색이 걷힌 초록의 베를린을 만날 수 있다.

서울에 한강이 있다면 베를린에는 공원이 있다 ⓒtraveller

또한 베를린에는 어딜 가나 똑같은 맛과 비슷한 인테리어의 프렌차이즈 카페가 아닌 주인의 감각과 취향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개인 카페들이 많다. 보통 인도의 반 이상을 카페의 테이블과 의자가 차지하는데 신기한 것은 언제나 손님들로 꽉꽉 들어차 있다는 것이다.

정장을 빼 입은 노신사부터 반팔에 청바지 차림인 아줌마, 한껏 멋 부린 힙스터들까지 그 모습도 다양하다. 2013년 통계를 찾아보니 독일에서 가장 많이 마시는 음료 순위에서 커피가 (맥주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독일인 한 사람당 1년에 약 190리터의 커피를 마신다고 한다. 겨울에는 말할 것도 없고 조금이라도 해가 비추면 하나같이 카페 테라스에 앉아 이렇게 커피를 마시기 때문이 아닐까?

베를린의 특색있는 카페들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은 거리에 있는 화단을 그 자리에 위치한 카페나 상점, 음식점에서 직접 관리한다는 것이다. 튤립이 한창 만개했던 4월, 많은 카페에서 튤립을 직접 키워 베를린의 거리를 꽃으로 물들였다. 5월이 된 지금은 다른 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본격적으로 봄이 시작되는 4월부터 베를린은 도시 전체를 그린도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온통 푸르다.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에는 거리마다 평균 89그루의 나무가 서 있으며 샤로텐부르크Charlottenburg 지구에는 9미터마다 나무를 볼 수가 있다.?뿐만 아니라 2010년에는 정부가 티어가르텐Tiergarten 에 있는 단풍나무 140그루를 옮겨심기로 결정하자 분노의 서명운동이 일어 무효가 되었을 정도다. 그 정도로 베를리너들에게 '그린베를린'은 생활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꽃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나에게도 한 달 반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길가에 꽃이 떨어져있으면 가던 길을 되돌아와 굽어보게 되었고, 바람에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어와 꽃병에 꽂아두게 되었다. 주말에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공원을 찾고 있다. 무뚝뚝한 얼굴로 나무 밑에 작은 접시를 놓아두는 아저씨를 보며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나오는 건강한 마음이 지금의 베를린을 만든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베를린 적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겨울을 지내봐야 독일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 아직 나에게는 생각만으로도 움츠러드는 베를린의 겨울이 남아 있지만 지금은 ‘봄’이라는 축복받은 계절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하루하루 작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

1년이라는 시간은 거주자도 아니고 여행자도 아닌 잠깐 머무르는 시선에 가깝지만 그 시간동안 있는 그대로의 베를린을, 4계절을, 낮과 밤을 더욱 경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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