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휴식, 지상철 다섯 코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긴팔 티셔츠에 겉옷을 챙겨 입던 날들이 엊그제만 같은데 어느 새 여름이 와 버렸다. 이야, 여름이다! 녹음이 무성하고 물이 시원하니 이제 놀러 가볼까 하면 뭐하나, 누구는 계절학기, 누구는 인턴 출근……. 여름 풍경 여유롭게 볼 시간도 없이 실내 한 구석에 갇혀 바쁜 여름이 될 것만 같다.
잠시 고개를 들어 바깥이라도 보고, 하루짜리 휴식이라도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럴 땐 지상철을 타야만 한다. 시원하지 않은 듯 시원한 전철 안에서, 이동하는 동안 잠깐이라도 바깥을 보고, 잠깐이라도 바깥 바람을 쐬고.
치열한 여름을 보낼 당신에게 다섯 에디터들이 보내는, 수도권 전철 지상 구간 추천 리스트.
조금 한적한 산책로를 찾는 당신에게
찬우의 1호선, 역곡역이나 오류동역부터 온수역까지
지상철을 타고 부천과 서울을 오가다 보면 꼭 멈칫하게 되는 곳이 있다. 온수역이 바로 그곳이다. 비단 내가 다니던 학교가 있던 곳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온수역을 통과하는 차창 밖을 둘러봐도 높게 선 교회 말고는 뭐 특별할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보잘것없이 조그마한 역에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있느냐고, 왜 그 많은 역 중에 온수냐고 묻고 싶겠지. 그러나 이 역에서 내려 조금만 걷다 보면 그 생각이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 8번 출구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조금만 올라가다 보면 우리는 꽤 근사한 숲들과 만나게 된다.
‘온수도시자연공원’이라는 참 직설적이고 뻔한 이름을 가진 이 공원의 아래쪽은 많은 동네 주민들의 마실 장소이지만, 위로 올라가면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한적한 벤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몇 시간씩 그곳에서 책을 읽건, 술을 먹고 주정을 부리건, 혼자 감성에 취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엉엉 울건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덕분에 새록새록~)
당신이 조금 더 걸어 갈 자신이 있다면 성공회대를 지나서 있는 항동수목원에 가 보는 것도 괜찮겠다. 서울 최초의 수목원이라는 이곳. 봄철이면 잘 심어진 꽃들, 나무와 바람이 여러분을 맞아 줄 것이다.?항동수목원을 지나 조금만 더 걸어간다면 항동 철길을 만나게 된다. 기차가?(거의) 다니지 않는 철길을 걸어보는 것도 꽤 낭만적인 일일 것이다.
아, 잠깐. 애인은 없는데 여기 혼자 갔다가 커플들만 구경하고 오는 것 아니냐고? 다행스럽게도, 이곳은 커플보다는 동네 주민들의 핫플레이스다. 커플보다는 산책 나온, 놀러 나온 가족들을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당신이 온수역을 지나게 된다면, 할 일이 없어 잠깐 시간이 붕 뜬다면 이 두 곳을 꼭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찬우가 1호선 지상철에서 추천하는
갈 만한 곳 & 팁: 온수도시자연공원, 항동수목원, 항동철길. 온수도시자연공원에서 온수역으로 내려오는 길 오른편에 있는 분식집은 사실 그냥 분식집이 아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꽤 괜찮은 가격과 맛의 안주와 술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산책 후 음주는 필수!
같이 들을 만한 음악: Level 42의?Hot Water
내가 생각했던 서울
유라의 2호선, 합정역부터 당산철교를 지나 당산역까지
옆을 지나가는 차도 없이 탁 트인 한강의 전경. 동쪽에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서쪽에는 선유도공원이 보인다. 서울 생활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지하철이 한강 위를 지나면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넋을 놓고 창밖을 보다가 촌년처럼 보일까봐 표정 관리를 하는 정도가 아직 내 적응의 단계인가 보다.
경상북도에서 벗어난 적 없이 20년을 내리 살았던 나에게 한강은 곧 서울이었고, 2호선은 곧 대학생이었다. (서울 생활을 시작하고 이런 환상은 다 사라졌지만 말이다.) 성장 드라마의 주인공은 한강의 대교 위에서 ‘나는 할 수 있다!’?따위의 말을 외치며 마음을 다잡았고, 미니시리즈의 돈 많은 실장님은 한강이 보이는 오피스텔에서 살면서 아침마다 한강변을 따라 조깅을 했다. 심지어 내가 그렇게 무서워했던 괴물도 한강에서 나왔다.
그리고 2호선. 서울 지하철이 몇 호선까지 있는지도 몰랐지만 “2호선을 타자”라는 수능 응원 문구에 2호선이 인서울 대학의 모든 것인 줄 알았고, 그 초록색마저도 청춘을 상징하는 것만 같았다. (개뿔…)?서울은 한강이 다가 아니었고 대학은 2호선이 다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지만 그 시절이 그립듯 가끔은 그 설렘도 그립다. 그렇게 나는 또 당산철교에서 촌년마냥 설레 본다.
유라가 2호선 지상철에서 추천하는
갈 만한 곳?&?팁: 한강시민공원. 당산역 4번출구를 지나 있는 구름다리를 통해 바로 한강시민공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여의나루역보다 사람은 적지만 접근성은 비슷하다.
같이 들을 만한 음악: 염신혜, 선우정아의?Blossom?/?TOY의?A Night in Seoul
일상 속에서 잠깐 눈 돌리기 좋은 동작대교에서
자인의 4호선, 총신대입구(이수)역부터 이촌역까지
4호선과 6호선을 갈아타며 학교에 다닌 지 4년차. 버스보다 지하철이 훨씬 빨라 거의 매일 지하철만 타고 다니는데, 이 재미없는 과천-삼각지 환승-대흥 노선의 유일한 즐거움은 내 등하교시간의 유일한 지상철 구간인 총신대입구(이수)-이촌 구간이었다.
차음벽 위로 아스라이 보이는 빌라들과 햇볕 조각들을 지나 동작역을 넘어가면 바로 한강이 나왔다. 핸드폰에 처박고 있던 고개도 자연히 올라가고, 강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은 일상에서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며 쉴 수 있는 시간.
사실 이 구간이 ‘한강이 가장 잘 보이는 구간’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2호선 당산이나 7호선 뚝섬유원지가 더 넓고 반짝거리는 한강을 보여줄 수도 있다. 왜 굳이 여기냐고 묻는다면, 그건 이 구간이 ‘평범하게 좋은 곳이라서’라고 답하는 게 가장 알맞지 않을까. 대단히 특별할 것도 없는 4호선에서, 별 것 없이 어둠침침한 지하철 구간(심지어 선바위역 즈음에서 불도 한 번 꺼지고 와이파이도 먹통이 되는!)을 한참 지나,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인다는 건 얼마나 사소하게 기쁜 일인지.
대단치 않은 구간처럼 써 놓았지만, 사실 생각보다 갈 만한 곳이 많은 구간이기도 하다. 총신대입구(이수)에서 내리면 태평백화점과 남성시장이, 동작에서 내리면 현충원이, 이촌에서 내리면 국립중앙박물관 등이 있다.
이촌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는 건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작년 한글날에 개관한 국립한글박물관도 굉장히 괜찮다. 너무 어렵지는 않으면서 꼬꼬마 국문전공생의 흥미도 끌 만하며, 특히 기념품이 정말 최고다. 예쁜 문구류부터 시작해서… 2층에 있는 기념품점은 꼭 들르도록 하자. 박물관을 다 돌고 나서는 용산가족공원을 산책해보는 건 어떨까.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니지만, 햇볕 좋은 날 가볍게 거닐기에 충분히 넓고 파릇파릇한 곳이니까.
자인이 4호선 지상철에서 추천하는
갈 만한 곳?&?팁: 동작역 현충원, 이촌역 국립중앙박물관/국립한글박물관/용산가족공원. 동작역을 지나다 보이는 동작대교전망카페를 가고 싶다면 총신대입구(이수)나 이촌에서 내려서 502를 타자(동작에서 내리면 버스 환승이 애매하다). 오이도행 기준으로 오른쪽, 당고개행 기준으로 왼쪽을 보면 더 넓고 반짝거리는 한강을 볼 수 있다.
같이 들을 만한 음악:?요조의?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 괴물 OST 중?한강찬가
출근길 위 공항철도, 한강 위 햇살철도
형기의 공항철도, 김포공항역부터 디지털미디어시티역까지
아침 햇살, 듣기만 해도 무척 싱그러운 말이다. 아침도, 햇살도 그 하나만으로도 싱그럽기 그지없는 것이 둘이나 붙었으니 얼마나 그러하겠는가. 공항철도는 김포공항을 지나 DMC로 향하는 동안, 한강을 한 번 건너간다. 그리고 아침의 햇살은 한강 위에 길게 늘어져, 중심각이 좁은 부채꼴의 빛을 강물 위에 띄운다.
그 빛을 바라보고 있자면, 출근의 노곤함이 무색하게도, 으레 말이 가져오는 싱그러움에 머리를 가득 적신다. 어쩐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어도, 손잡이를 붙잡은 손이 파르르 떨려도 반짝이는 강물을 보고 있자면 오늘 하루도 어쩐지 무사하게 보낼 것 같았다.
DMC역에서 내려 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10분 조금 더 달려가면 상암월드컵공원에 도착할 수 있다. 네이버 지도 기준으로 약 1시간이 찍혀 나오는데, 걷는 시간이 길어 그렇게 측정된 것이니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입구에서는 휴대폰을 이용한 간단한 신분 인증을 통해 자전거를 빌릴 수 있는데, 공원이 워낙 넓게 탁 트여있어 자전거를 타고 달려도 부딪치는 일 없고, 깔끔하게 깔린 돌바닥은 엉덩이를 아프게 만들지도 않는다. 요즘 같은 계절엔 한켠 가득한 잔디밭에 들어가 꽃가지 하나 꺾어들고 설정 사진 찍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공원 끝에 이어진 다리를 건너 내려가면(사실 다리가 높고 가파른데다 휘어지는 곡선이라 꽤나 아찔하다) 바로 한강이 등장한다. 한강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곳을 들를 때마다, 30분 이상은 강물을 한참 바라보다 다시 돌아가곤 했다.
형기가 공항철도 지상철에서 추천하는
갈 만한 곳?&?팁: DMC역은 공항철도/경의선/6호선이 겹치는데다가, 환승구간과 플랫폼도 멀리 떨어져 초행에는 출구를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공항철도 쪽 8번출구 앞으로 나오는 경우 바로 앞에서 7013A, 7013B 버스를 타면 쉽게 도착할 수 있다. DMC 공항철도에서 가까운 거리에 DMC홍보관도 위치하고 있으니 한 번쯤 들러보는 것도 괜찮다.
일상을 벗어나 일탈을 즐기러 가는
유진의 중앙선, 용산역부터 강촌역까지
나는 지하철보다 버스가 좋다. 이유는… 막힌 구간이 없어서? 그러니까 버스는 지하철처럼 지하가 뚫려있는 곳만 다니는 게 아니라 어떤 좁은 길이라도 다니니까. 어디든 버스길이 될 수 있으니까. 버스를 타고 한 바퀴 휙 돌면 도심의 높은 빌딩도 보고 버스보다도 낮은 시장까지 눈에 담을 수 있지 않은가. 버스는 좀 더 생생하다.?지하철은 아무래도 지하로 다니니까 땅굴을 파는 두더지가 된 기분이 들 때도 있고.
이런 내가 주로 타는 지하철은 6호선으로 지상 구간이 전무하다. 심지어 정기권 유저라 99% 지하철 이용 중이라서, 나의 창 밖 풍경은 계속 터널-벽-사람의 연속이다.
일상적인 구간에서 벗어날 마음을 먹어야 지상철을 탈 수 있지만 생각보다 일탈은 쉽지 않다. 뜻밖의 일탈은 작년 여름에 찾아왔다. 여느 때처럼 친구와 카페에서 빙수나 먹자고 했는데 친구가 갑작스레 약속을 바꿨다. 수상스키 타본 적 있냐고. 무경험자였지만 운동 신경에 대한 놀라운 자부심이 있는 나는 당장에 가자며 부랴부랴 짐을 쌌다. 물놀이를 갈 때는 옷도 짐도 가볍다. 4호선 용산역에서 만나 우리는 강촌역으로 향했다.
얼마만의 강촌인가. 1, 2학년들의 성지라는 MT촌. 4학년인 언니는 이제 고급 수상 레저 스포츠를 즐기러 간다. 우리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멋이 나게 물살을 가르는 상상만으로도 이미 시원했다. 조잘조잘 그동안 못 나눴던 얘기를 나누며 경춘선에 몸을 실었던 그때.?사람이 많아 한 시간 가량을 출입문에 기대 서서 떠들었는데도 지치지 않았다. 들뜬 마음과 같이 떠들어줄 친구, 그리고 창 밖에서 우릴 따라오던 따사로운 햇살과 녹색 스펙트럼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그때의 지상철은 아직도 생생하다. 기차 여행을 가는 것 이상으로 아름다웠던 창 밖 풍경. 도시에서 아주 살짝 벗어난 것뿐인데 빛깔은 현저히 달랐다. 계속되는 푸르른 나무들의 향연은 우리의 짧은 일탈의 예고편이었다.
유진이 중앙선 지상철에서 추천하는
갈 만한 곳?&?팁: 수상스키가 매우 재밌으니 꼭 한 번 타 보시길. 이뿐만 아니라 땅콩보트랑 각종 보트 종류가 굉장히 많으며 수상클럽이니 번지점프니 하는 것들도 있으니 가격대 알아보고 저렴한 곳으로 가면 된다.
함께 들으면 좋은 노래 : 김동률의?출발 /?그 외에도 목가적인 분위기의 노래라면 어떤 것이든!?창밖 풍경이랑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잘 어우러지기에 BGM이 딱히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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