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선택인데 뭐가 불만이야?”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이름에 걸맞게 우리 모두에게 공평한 선택의 기회와 자유가 주어진다, 고 생각했었다. “네가 선택한 거잖아. 그런데 뭐가 그렇게 문제야.”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러게 말입니다. 내가 선택한 건데. 하지만 가끔은 궁금하다. 그건 정말 나의 선택이었나? 돌이켜보면 암암리에 강요된 선택들이 참 많다. 그래, 그게 내가 선택한 건 맞긴 맞는데, 그런데 있잖아.
찬우 - 신앙 없는 모태신앙
나는 천주교인이다. 내가 딱히 선택한 적은 없지만 그렇게 됐다.
나는 무신론자에 가깝다. 자라면서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천주교인이다. 내가 그렇게 되고자 한 적은 없지만 그렇게 됐다. 어렸을 때 유아세례를 통해 교리 한 번 배워보지 못하고 세례명을 얻었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머니의 눈치에 못 이겨 매주 성당을 나간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기도문이며 성가, 각종 교리를 외워야 하는 건 덤이었다. 그 시간은 결코 즐거울 수 없었다.
그리고 내게 달라붙는 의무들이 있다. 십계명, 각종 기도와 헌금, 성사, 일주일에 한 번 - 많을 때는 두, 세 번도 하는 - 미사 참여… 한번은 참다 못해 함께 성당에 다니는 친구에게 징징댔더니,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라고, 네 종교는 어쨌든 네가 선택한 것 아니냐고 이야기한다.
맞다. 분명 내 선택이기는 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왜 이렇게 많을까.
유라 - 절대 재수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지만
절대 재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면서 수업이 끝나면 콘서트도 가고 방송국도 가는, 그런 생활을 하는 것만 상상했지, 일류 대학에 가지 못하면 낙오자가 된다는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 수능 다음 날이란 모든 힘든 것들이 탁- 끊기는 날, 더는 야자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일 뿐이었다. 집에 돌아와 채점을 하면서 펑펑 우는 것은 계획에 없었다.
그래도 재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딱히 엄청나게 가고 싶은 대학이나 학과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재수생이 된다는 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학력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다. 나만 잘하면 어느 대학에 가든 잘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친구들에게도 항상 이렇게 말했었다. 그래서 내가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대학들, 그러나 내가 진짜 공부해보고 싶은 학과들로 자신있게 원서를 넣었다. 합격이 되었다. 정말 기뻤다.
하지만 결국 난 그 학교에 등록 신청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일단은 축하한다는 가족들의 그 애매한 축하가 마음에 걸렸다. 거기서도 잘하면 될거라는 선생님들의 어색한 위로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그런 말을 듣고도 내가 상상하던 스무살을 즐길 수 있을까?
결국 재수를 택하게 됐다. 아무리 망해도 절대 재수는 하지 않을거라던 나였지만 주변의 시선을 견디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힘들었다. 내 편들이 나의 선택 때문에 등을 돌리는 그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가 3년간 계속 말했던 확신을 내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유진 - 결국 말하지 못한 "하지 않겠습니다"
초등학교때는 가끔 반장을 하곤 했다.
하지만 중학교부터 아에 선거에 나가지 않았다. 선택받는 입장이 된다는 것,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차라리 누군가를 선택하는 입장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아는 친구들 하나 없이 홀로 배정받은 고등학교였다. 다행히 새로 만난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그리고 다가온 반장 선거철. 갑자기 담임선생님께서 나와 한 친구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두 사람이 반장, 부반장을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왜 우리 둘이지?’라는 생각보다 ‘왜 선생님이 후보를 정해주시지?’라는 생각이 앞섰다.
반장이 되고 싶었던 친구가 있을 수 있고, 선거라는 나름의 경합(?)에 나서고 싶은 친구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 모든 것이 무시된 채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절차에 역시 아무도 반대하진 않았다. 나 역시 선생님 앞에서 내가 생각한 것들을 말하기 힘들었다. 괜히 나대는 애가 되기 싫었다.
고3이 되었다. 대학 수시 전형 중에는 임원경력이 있는 사람들만 쓸 수 있는 원서가 있다. ‘1학년 2학기 임원’ 경력을 써넣었다. 그리고 그 자리가 간절하게 필요했던 친구는 없었을지 떠올렸다. 내가 결심한대로 거부라는 선택을 하지 못한 어린 날의 내가 부끄러워졌다.
현익 - 맥에 윈도우 설치를 '선택'하다.
애플을 사면 생활이 피곤해진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다지 염려하진 않았다. 쇼핑몰 결제는 무통장 입금으로 하면 되고, 인터넷 뱅킹에서는 웹표준을 지킨다는 ‘오픈뱅킹’이 확대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애플 신제품 발표회가 끝나자마자 업데이트된 OS X를 기분좋게 다운로드한 직후,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이전까지 잘 들어갔던 오픈뱅킹 서비스들은 하나같이 “본 서비스는 귀하의 OS를 지원하지 않습니다.”라는 경고창을 띄우며 접속조차 되지 않았다. 당황한 맥 초보자는 결국 모바일 뱅킹을 이용해야 했다.
하지만 은행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급하게 주민등록등본을 떼야할 때, 정부의 문은 윈도우즈를 사용하는 국민에게만 열려있었다. 덕지덕지 ActiveX를 설치하고 공인인증서를 받아야 했다. 결국 걸어서 20분 거리의 주민센터까지 가서 수수료를 낸 뒤 간신히 한 장 뽑아낼 수 있었다. 그 뿐인가. 대학교 등록금을 내려고 해도, 대학의 문은 윈도우즈를 사용하는 학생에게만 열려있었다. 등록금고지서는 학교에서 제공하는 웬 이상한 ‘뷰어'를 통해서만 출력할 수 있었다. 뷰어 설치 프로그램이 윈도우즈용 .exe 파일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나라를 지키려고 해도, 국방의 문은 윈도우즈를 사용하는 예비군에게만 열려있었다. 이사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예비군 훈련 통지가 안 오는 것이 불안해서, 예비군 홈페이지에서 훈련일정을 살펴보려고 해도 필요한 것은 ActiveX와 공인인증서. 나중에 “무단불참자 대상 보충훈련 안내” 문자를 받자마자 욕이 튀어나왔다.
결국 나는 하드드라이브 용량의 10%나 차지하면서, 윈도우즈를 설치하는 선택지를 골랐다.
해찬 - 가지 않겠다고 더 빨리 말할 것을
“너 여기 갔던 거 기억 안 나?”
엄마가 1박2일을 보면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말 없이 TV만 보았다.
우리 가족은 여행을 참 많이 갔다. 방학 때마다 아빠는 운전대를 잡고 엄마는 여행 가이드로 변신하셨다. 그리고 형과 나는 몇 시간을 자동차에 갇혀서 휴게소만 기다리는 처지였다. 그러다 차가 멈추면, 패키지 여행객들처럼 일정에 맞춰 관광지를 돌아다녔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의견은 없었다. 부모님이 날짜를 통보하고, 나는 거기에 일정을 맞춰야 했다.
물론 가기 싫다고 말할 수도 었었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의 소중함을 모르는 막내아들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채 자동차에 실려 톨게이트를 지나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성인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배낭여행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인도로 떠났다.인도에서 낙타랑 사막에서 자다가 얼어 죽을 뻔하고, 전혀 예정에 없던 길로 가버리거나, 밥 먹듯이 소매치기를 당했지만, 그래도 살아 돌아왔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이 너무 사랑스러웠고, 조금 더 빨리 말하지 못한 지난 시간이 더욱 아쉬웠다.
어진 - 내가 선택하지 않은 선택과목
나는 내 의사와는 상관 없이, 오직 담임교사의 강력한 의지로, ‘국사’를 선택해서 수능을 봤다.
일단 나는 역사가 너무 어렵다. 차라리 공식이나 법령은 외우라면 외우겠는데, 뭣 때문에 발발한 무슨 사건이 몇 년도다 하는 건 정말 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더 구조적인 차원에서, 당시에 ‘국사’를 고른다는 건 서울대 지망생들과 겨루겠다는 무식한 도박이었다. 그것도 49점 받느냐 50점 받느냐를 다투는 고수들의 갬블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승산이 없는 베팅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담임교사는 서울대 명단을 높히기 위해 내게 ‘국사 대비반’ 가입을 권유했다. 서울대에 가려면 국사를 해야 한다. 너는 서울대에 갈 수 있다. 그러므로 너는 국사를 해야 한다, 라고 정말 진지하게 입을 여셨다. 하루 종일 학교에 있어야 하는 고3의 신분, 거기다 매일 얼굴을 마주치는 담임 선생님이 그렇게 무섭게 말하는데 거절하기 힘들었다. 담임 선생님은 만족한 얼굴로 내 이름을 국사반에 써 넣었다.
소질이 없으니 진전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서울대에 가고 싶긴 한가?’ 라는 생각이 선명해질 때는 이미 수능 시험장에 앉아 있었고, 내 수능 성적표에는 5등급이란 숫자가 찍히게 되었다. 운이 좋아서 결국 그 5등급과 크게 상관 없이 대학에 붙었지만, 그래도 가끔 생각한다.
“너는 서울대에 가야 한다”는 누군가의 강요로 인해 얼마나 많은 수험생들이 자기 소질이 아닌 것을 “선택”하고 망했을까. 그렇다면 이 선택이라는 건 도대체 누구를 위한 선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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