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탐사대] 서울의 무중력지대, 노들섬
다른 차원의 세계, 노들섬으로 초대합니다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노량진 학원 중심가에서 버스로 딱 두 정류장 떨어진 곳에 노들섬이라는 낙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노량진에서 겨우 2km 거리에있는 곳임에도, 두 공간의 분위기는 전혀 다른 세상을 붙여놓은 듯하다. 강의실과 고시원을 중심으로 하루 24시간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노량진과, 밭에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있는 노들섬. 두 공간의 속도가 너무 달라 노량진을 거쳐 노들섬에 들어가는 순간 마치 토토로를 따라 다른 차원의 숲의 세계에 들어 온 기분이 든다.
서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나쳐봤지만, 자세히 들여다 본 사람은 많지 않은, 노량진 곁의 숨은 무중력 지대, 노들섬의 이야기.
도심 한가운데 홀로 된 섬
노들섬은 본래 외따로 떨어진 섬이 아니라 이촌동에서 노들섬까지 이어진 모래벌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모래밭 마을’이라는 의미의 ‘사촌’이라 불렀으며, 해지는 풍경이 아름답다하여 용산 8경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917년 일제가 한강 남북을 잇는 한강 인도교를 건설하며 주변의 모래를 모아 언덕을 쌓아올리고 이를 ‘중지도’라 이름붙이면서 모래벌판이었던 노들섬 주변이 섬이 되었다.
1967년까지 중지도 동쪽의 고운 모래밭 은 ‘한강 백사장’으로 불리며 서울 시민들의 물놀이 장소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1968년부터 한강개발계획을 추진하며 한강 백사장의 모래를 퍼다 쓰며 모래밭은 사라졌고, 1982년 한강종합개발 저수로 정비 사업을 진행하며 중지도 주변의 모래밭은 아예 자취를 감췄다.
그렇게 ‘사촌’은 어느새 한강물로 둘러싸인 섬이 되었다. 1995년 ‘백로가 노닐던 징검’ 이라는 ‘노들섬’으로 지명이 바뀌었지만, 모래사장을 잃고 시멘트가 쌓인 섬엔 더이상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후 2012년까지 노들섬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서울 한 가운데 자리한 고독한 섬’으로 존재해왔다. 유람선 선착장 설치, 관광호텔 건린, 공원조성, 호페라하우스 건설, 예술센터 조성까지. 이전부터 노들섬을 개발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지만, 우연인지 모든 노들섬 개발 계획은 무산되거나 중지되었다. 그러던 2012년 박원순 서울 시장은 이곳을 텃밭으로 서울 시민들에게 임대하기 시작했다.
개발하겠다며 달려들었을 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섬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아기까지. ‘버려진 땅’이라고 생각했던 섬은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아 가장 특별한 곳이 됐다. 사람들은 외로운 섬에 생명을 심기 시작했고, 버려졌던 섬은 단 몇 년 사이에 도시에서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하는 ‘도심 속 비밀 정원’이 되었다.
서울의 비밀정원, 노들텃밭
내게 노들섬은 늘 학교를 오가는 길, 노량진과 한강대교의 중간에 들려오는 하나의 정류장에 불과했다. 제대로 노들섬을 들여다 보려 찾은 날, 아침부터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노량진 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한강 전망대 정류장’에 내렸다. 하지만 노들텃밭은 ‘노량진-한강 방면이 아닌’, ‘한강-노량진’을 향하는 쪽에 있었다.
천천히 한강의 끝까지 걸어가 다시 반대편 도로로 건너갔다. 도로 건너편에 우거진 수풀이 보였다. 다시 10분 정도 천천히 걸어가자 나무 사이로 벤치가 나타나고, 그 한켠에 ‘노들텃밭’이라는 팻말이 조그맣게 서 있었다. 버스를 타고 다닐 때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텃밭 입구가 보였다. ‘들어가도 될까?’ 잠시 주춤거리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노들텃밭에 들어서자 ‘이곳이 서울이 맞나?’ 생각이 들었다. 높은 빌딩과 아파트로 둘러싸인 섬 한가운데 논과 밭이 넓게 펼쳐졌다. 어린 시절 영화속에서 보았던 ‘토토로의 비밀숲’이 떠올랐다. 천천히 밭을 하나씩 살펴봤다. 방울토마토, 파, 배추, 케일, 참외까지. 세기도 힘들 만큼 많은 생명들로 가득했다.
밭 양 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니 멀리 허수아비가 서 있는게 보였다. 논에 벼를 싶으면서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이 함께 세워놓은 듯했다. ‘서울 한 가운데 이런 장소가 있는지 누가 알까?’ 서울 속 ‘비밀의 정원’을 찾은 듯한 느낌에 신이 나서 한참을 텃밭 사이사이를 서성였다. “뭐해?” 친구가 나타났다.
노들섬을 지키는 청춘, 노들유령
처음 노들섬과 노들텃밭에 대해 알게된 건 친구를 통해서였다. 어느날, 친구는 자신이 ‘노들섬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내가 매일 지나치던 그 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니 놀라웠다. 친구는 ‘노들유령’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친구들과 함께 텃밭에 작물을 심고, 가꾸고, 노들섬에서 논다고 했다.
아무것도 없는 노들섬에서 논다는 말이 그때는 어색하게만 들렸다. 하지만 친구가 보내준 사진 속에 그들은 너무나 즐거워 보였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곳에서 노들유령들은 자기들끼리 낙서하고 춤추고 술마시고 그림그리고 춤추며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어 가던 청춘들.
친구를 따라 하나씩 숨어있던 모습들을 찾기 시작했다. 텃밭 한켠에 모일 듯 말 듯 숨어있던 양부터, 농기구가 정리된 하우스, 그 안에 놓여진 작물의 씨앗들과 말린 과일들, 하우스 안의 닭장, 텃밭 켠에 만들어진 토끼장, 배설물에 톱밥을 덮어 비료로 만든 생태 화장실까지. 시골에서도 볼 수 없었던 보석 같은 공간들이 노들섬 안에 숨어 있었다.
노들섬을 지나 63 빌딩이 보이는 한강 근처로 나갔다. 버드나무가 우거지고 강 건너편에 63빌딩이 있고, 지하철이 지나가는 곳. 섬에서 서울을 바라보니 마치 두 곳이 다른 세계 같았다. 우린 강가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저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멈춘 채로.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다.
생명을 키우는 빈 공간, 노들섬
넌 왜 여기 오는 거야?
여기 오면 멈출 수 있잖아. 엄청 바쁘게 살다가 이곳에 오면 시간이 멈추는 느낌이 들어. 졸업, 취직, 스펙. 계속 매일 달리다 보면 맨날 똑같은 생각을 하며 사는 날 발견해. 그런데 여기 오면 마음껏 딴짓을 할 수 있거든. 많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즐겁게. 그러다보면 일상에서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떠올라.
주로 여기서 뭘 하는데?
그냥 놀아. 농사도 짓는데 우리는 아직 경험이 없으니까 망하는 경우가 많고. 그럼 그냥 우리가 놀 걸 만들어서 놀아. 공사장 쓰레기를 주워다 패션쇼를 하기도 하고 친구들을 초대해서 막걸리 파티도 열고, 그림도 그리고.
우리 이제 취준생이잖아. 안 불안해?
불안해. 엄청 불안하지. 그런데 무작정 달린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 사람이 어떻게 계속 달리기만 해. 여긴 달리다가 멈춰 설 수 있는 곳이야. 힘들면 친구들이랑 웃으며 쉬다가, 다시 뛸 힘을 주는 공간.
노들섬 옆에 노량진이 있잖아. 가장 바쁘게 살아가는 공간 옆에 또 이렇게 평화로운 공간이 있다는 게 신기해. 토토로에 나오는 비밀 숲 같아.
아마 그게 더 이 공간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 사실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이 두 공간은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공간이 아닐까.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과, 사람을 기다리는 섬.
2017년부터 이곳을 개발할 거라던데?
응, 사람들은 이곳이 쓸모없는 땅이래.
말도 안 돼. 서울에서 가장 특별한 공간인데!
사람들은 ‘바쁘지 않으면’ 쓸모없다고 생각하잖아. 사람이든 공간이든. 삶에서 정말 아름다운 순간이 뭔지 모르니까.
어떤 순간인데?
멈추는 순간.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는 거 알아? 그냥 갈색, 초록색이던 나무에서 백가지 색을 발견하는 순간. 그게 진짜 아름답고 소중한 거지.
그 말을 따라 가만히 섬을 둘러봤다. 멈추지 않고 달려가던 몇 년 동안 전혀 찾아내지 못했던, 하지만 조금만 느리게 걸으면 쉽게 닿을 수 있는, 늘 곁에 있던 여백의 공간. 이곳에선 매일 배경화면처럼 무감각하게 느껴지던 풍경들, 매일 보던 도시가 반짝거렸다.
‘이곳이 사라진다면, 또 이 도시 어디에서 여백을 찾을 수 있을까. 왜 사람들은 이 도시에게도, 삶에서도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못하는 걸까. 인간을 살게 한 땅과 식물이 언제부터 세상에 쓸모없는 것들이 되었을까. 흙이 있던 자리가 건물로 채워지면, 우리는 어디에 뿌리내릴 수 있을까.’
여러 생각을 하며 친구와 밭으로 돌아 나오는 길, 아기가 밭에서 일하는 엄마 곁에서 흙은 만지며 놀고 있었다. 장난처럼 엄마를 돕던 아이는, 금새 토끼 앞에 가 쭈그리고 앉아 상추를 건네주었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먹어.” 어른들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땅 위에서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노들섬의 빈 공간 속에서 식물이 자라고, 아이가 자라고, 청춘이 자라고 있다는 걸, 이곳이 이 도시에서 가장 필요한 공간이라는 걸, 이 도시에서 가장 똑똑하다 자부하는 어른들은 알고 있을까. 저 아이가 오랫동안 이곳에서 자라날 수 있길, 쉼이 필요한 사람을 안아주는 이 공간이 사라지지 않길. 섬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오랫동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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