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큼 다가온 가을이 서글프면 조용히 사진집을 펼쳐보자

찰칵. 지금 당신이 찍은 그 장면은 바로 몇 초 전의 추억이 됐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가끔 행복한 순간이 손에 걸리면, 우리는 그것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이 사진이다. 여기, 다른 사람들의 그리운 시간들을 붙잡은 사진집들을 소개한다. 각기 다른 그리움을 지니고 있으니 지루할 틈이 없다. 슥슥 쉽게 찍은 디지털 이미지들이 문득 지겹다면, 스산한 가을 바람에 무언가 막연하게 그립다면, 때가 왔다. 이 사진집들을 펼쳐보자.

TO. 엄마아빠의 포근한 품이 그리운 당신

윤미네 집 / 전몽각 (PHOTONET)

아버지 전몽각이 딸 전윤미가 태어났을 때 부터 시집가던 날까지를 담은 흑백 사진집.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살게 된 내게, 이 사진집을 선물해준 사람은 말했다. 첫 장을 펼쳐 든 순간 ‘사랑’ 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그대로 와 꽂힐 거라고. 자신은 사진집 속 윤미네 다섯식구의 따스함이 가슴아리게 부러웠노라고.

외로운 유년을 지나 온 그에게 위로 그 자체였다는 이 사진집을, 나도 가끔 빈 방에서 혼자 펼쳐든다. 엄마 젖을 먹는 윤미, 아버지에게 새 교복을 자랑해 보이는 윤미, 어른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무렵의 혼자 책 읽는 윤미... 그 흑백 풍경들에 엄마 아빠 품에 안겨 세상을 마냥 몰라 환하게 웃던 내가 겹쳐진다.

 

TO. 첫사랑의 뒷모습이 그리운 당신

뒷모습 / 에두아드 부바 사진, 미셸 투르니에 지음 (현대문학)

수많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집이다. 때로는 뒷모습이 더 큰 진실을 말한다. 그렇기에, 배를 바다로 미는 포르투칼 노동자들의 어깨들에서, 미쳐 수영복을 챙겨오지 못한 가난한 연인의 굽은 등에서, 또렷한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온종일 한 사람의 뒷모습을 떠올리던 때가 있었다. 당신이 말없이 덤덤하게 웃고서 돌아 설 때, 가로등 불 빛 아래 툭 떨어지던 그 어깨는 왜였을까. 문득 열었던 동아리 방문 안에서 조그맣게 들썩이던 그 가녀린 목덜미는 내게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다, 도서관 한 구석에 툭 불거져있던 이 책을 만났다.

 

TO. 열일곱의 불장난이 그리운 당신

사랑의 방 / 베르나르 포콩(Bernard Faucon) (마음산책)

보이지 않는 ‘사랑’을 방의 형태로 보여주는 사진집이다. 신형철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 표지로 쓰인 적이 있다. 그 쓸쓸한 사진의 제목은 '열아홉번 째 사랑의 방’이다. 사진가 베르나르 포콩은 '사랑의 방' 연작들에 대하여 자신의 유년을 기억하며 꾸미고 찍었다고 설명한다.

‘잉걸불’ 이란 작품이 기억에 선연하다. 그 프레임 안에는 방안 가득 사그라드는 불장난의 흔적이 포착되어 있다. 모든 게 지겨웠던 그때, 쓰다 만 연습장에 조그마하게 불을 붙이고 놀던 아이가 있었다. 늘 커다란 교복에 갇힌 것처럼 보이던 그 애는 빛이 점멸하다 이윽고 사그라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곤 했다. 숨죽이고서 타오르는 잉걸불과 닮아있던, 돌아 갈 수 없는 시간의 잔열들.

 

TO. 그리워할만한 것들이 그리운 당신

흩어지다 / 표기식 (이안북스)

소규모아카시아 밴드 멤버들의 사진을 보다 문득 궁금해졌다. 누가 찍었을까? 사진작가 표기식. 그가 8년간 담은 사진들은 렌즈를 깔끔히 닦는 것을 잊은 듯, 조리개를 닫아두는 일을 잊은 듯, 무언가에 마음을 풀어놓아버린 듯. 그렇게 부옇고 번져있고 놓여있는 장면을 즐겨 포착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저녁을 닮아있다. 피곤에 달궈진 눈을 들면 저 멀리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가 모두 번져보이는, 그 빛들을 멍하니 보다가 내일 아침에는 몇 분 즈음 더 누워있을 수 있을지만 생각하며 잰 걸음을 재촉하는, 익숙한 그 풍경 말이다. 그리워할만한 것마저 녹아버릴 만큼 힘든 하루의 끝에서, 이 사진집을 가만히 넘겨보자. 어느새 그리워할만 순간을 만들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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