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민주성을 걱정해볼 만한 6가지 징조
뜻밖의 깨달음을 얻다
지난 12월 10일 서울시 청년허브에서 우연치 않게 참가한 어떤 프로그램. 뉴질랜드에서 온 리처드 바틀렛이라는 활동가가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법을 이야기한다길래 무슨 강의인가 보다 하고 들으러 갔다. 그런데 듣기는커녕 뭔가 활동을 많이 하고 왔다.
참가자석은 큰 원형으로 배치돼 있었고, 초반 40분 정도는 모두 일어나 자기소개를 한 마디씩 했고, 전반부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조별로 민주주의에 관한 백분토론까지. 난 그냥 뉴질랜드 얘기나 조용히 듣다 가고 싶었는데, 와서 보니 사실은 워크샵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후반부에서, 그는 자기가 엔스파이럴이라는 조직의 창설자이며, 이 조직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6가지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면서 우리끼리 토론한 내용에 얼마나 참고가 되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 “각자가 속한 조직이 민주적이지 않은 이유가 뭘까”를 가지고 방금 전까지 토론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어지는 설명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그는 ‘민주적인’ 그룹이 띨 수 있는 특징을 말했지만, 저건 반대로 말하면 “비민주적인” 그룹이 띨 수 없는 성격일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1. 혹시 조직 안에 비공식적인 내부 그룹이 많이 있나요?
꽤 큰 규모를 자랑하는 학회의 소그룹장을 맡고 있는 A씨. 그가 속한 그룹장 모임은 이 학회의 유일한 공식 의결기구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룹장 모임에서 다른 그룹장이 ‘요즘 회원들 분위기가 이상하다, 뭐 아는 것 있느냐’ 하길래 잘 모른다고 답하고 넘어갔다. 그러더니 다음날엔 자기 소그룹 회원들이 소그룹 단톡방을 예고 없이 우르르 나가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건 다른 소그룹이라고 예외는 아니었고, 알고 보니 아주 오래 전부터 ‘여길 나가서 다른 학회를 차리자’ 하고 여론을 주도한 사람들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참석자(contributors)’와 ‘핵심 스탭(administrators)’의 두 역할로 나뉘어 민주적인 듯 보였지만, 실은 여론을 주도하는 제3의 비공식 조직이 있었기에 이 조직은 하루아침에 와해되게 되었고, 그걸 A씨 같은 그룹장들만 모르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2. 혹시 조직이 억지로 민주적이 되려 하고 있나요?
동아리로 시작한 스타트업의 창립 멤버 B씨. 그는 대표자인 Z씨의 최근 행보가 우려스럽다. 셰어오피스에 우릴 입주시키고 명함과 일거리와 월급을 주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인데, 만사에 강박적으로 “오픈마인드”된 민주적 사내 문화를 도입하려 하는 것이다. “직급을 없애겠다”라며 각자 영어 이름을 지어오라지 않나, 주간회의 진행을 돌아가면서 맡으면 어떻겠냐 하질 않나… B씨는 뭔가 당혹스럽긴 한데 할 말을 못 찾고 있는 상황이다.
리처드는 이렇게 말한다. “이상적인 민주적 조직은 그 민주성이 마법처럼 작동한다. 어떨 때는 조직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도 어떨 때는 느긋하고 느슨하게 굴러간다. 이런 현상이 인위적, 조작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그때그때 나타나는가 어떤가가 중요하다.” 만약 B씨가 리처드의 설명을 들었더라면 분명히 한 마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봐 Z, 민주적인 문화는 억지로 만든다고 되는 게 아니라구.”
3. 혹시 조직 내에 케어를 받지 못하는 멤버가 있나요?
대기업의 홍보기자단에 들어오게 된 C씨. 쏟아지는 조별과제에 파묻혀 허덕이다 보니, 첫 소집날 친해진 같은 조의 동기 두세 명과 절친이 됐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C씨 조의 조원 Y씨가 전체 소집에 결석하는가 싶더니, 다음 전체 소집에선 기자단 책임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직접 나와 채근했다. “여러분, 활동에 불만이 있으면 제발 여기서 직접 말하세요, 나가서 악담하고 다니지 마시고!”
알고 보니 Y씨는 C씨가 속한 조에서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주어진 일만 하다가 소외감과 반감을 느껴 기자단을 탈퇴한 뒤, 익명 블로그로 이 기자단과 C씨의 친구들을 비방하고 있었다. 정말 민주적인 조직이라면 누구나 자기의 심적 상태를 돌봐주는 ‘간사(steward)’가 한 명쯤은 있어야 불만과 고충을 케어하는 기능을 할 수 있는 법인데, 그걸 C씨도 그 친구들도 차장님도 아무도 모른 채 Y씨의 고생을 방치한 결과였다.
4. 혹시 조직이 단기(또는 장기) 계획에만 치중하나요?
이번에 서로 다른 직장에 동시 합격한 D씨와 E씨는 서로의 사내 문화가 부러워 보인다. “우린 매일매일이 비상사태야. 장기 비전이 없어서 의견 내기가 싫어. 너넨 그래도 계획이 있잖아.” D씨가 던지면 E씨가 받아친다. “우린 허구헌날 미래 얘기만 해. 지금 할 일은 명확하지가 않고. 그니까 맨날 눈치만 보는 거야. 너넨 그래도 할 일이 있으니까 할 말도 있을 거 같은데?” 그리고 둘의 입방아는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리처드 왈, 조직이란 결국 뭔가 일을 하는 집단이다. 일을 제대로 못 하면 조직 자체가 성립하질 못하니 민주적 조직이 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3-3-3-1’의 “리듬(rhythm)” 기법을 소개한다. 각자 돌아가며 이 조직과 자기가 3년간 할 일, 3개월 안에 할 일, 3일 동안 할 일 그리고 오늘 하루(1) 할 일을 선언하게 하는 것이다. 여러 기법이 가능하겠지만, 특히 이 기법은 장기적 꿈과 단기적 과업 사이의 ‘리듬’을 동시에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유익하다고.
5. 혹시 조직의 의사결정 방식이 얼렁뚱땅인가요?
슬슬 교회를 좀 나가 보자고 마음먹은 F씨는 요즘 심경이 복잡하다. 예배는 좋은데, 예배 후의 청년부 모임이 그렇게 껄끄러울 수가 없는 것이다. 가장 불편한 것은, 명백히 중요해 보이는 안건들마저 특정 인물 몇 명의 ‘입김’으로 너무 가볍게 결정한다는 점이다. 열심히 나오는 멤버 몇 명의 집으로부터 가깝다는 이유로 추계 야유회 장소라는 중요한 문제를 고작 3분 만에 난지도한강공원으로 정하는 것을 볼 때는 황망할 정도였다. 그래도 1년 정도는 있어 보자 하고 꾹 참았다.
그 사이 가장 ‘목소리’가 크던 청년 둘이 각자 결혼하면서 장년부로 옮겨갔고 그는 졸지에 짬밥 부족한 최연장자가 되어 한없이 애매한 위치에 선 것이다. 내가 참가한 그날의 워크샵 내용 중 F씨에게는 이 부분을 들려주고 싶다. “민주적인 그룹이 되기로 정했다면 그 의사 결정 과정 역시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1인이 정확하게 1표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든가, 그 표의 다수를 따르되 소수 의견이 배제되지 않아야 한다든가 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 말이죠. 나는 (엔스파이럴 등의) 민주적 그룹조차도 이 의결 과정이 신속 정확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6. 혹시 조직이 ‘무엇이든 다 허용된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요?
학내 자치기구에 소속되어 있는 G씨. 신입생일 때는 세상이 아무리 차가워도 이 공동체 안에서는그저 모든 것이 다 괜찮고 좋은 줄로만 알았는데, 학년이 오르고 시야기 트이면서 ‘이건 뭔가 아니지 않나’ 하는 느낌을 점점 더 크게 받는다. 가장 불만족스러운 것은 분위기다. 뭔가를 추진할 땐 똑 부러지던 선배들이 다 나가자, 남겨진 후배들은 이 기구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만을 즐기면서 만사에 그저 될 대로 되라는 식이다. 심지어는 성추행 의혹이 내부에서 피어오르는 지경인데도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고 있어, 속으로 미칠 노릇이다.
민주적인 그룹이라고 해서 규칙이 없으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민주적이기 때문에 어떤 것들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최소적 원칙과 규범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인종차별은 어떤 형태로든 안 된다, 성별주의적 언행도 용납하지 않는다 같은 것들 말이다. 리처드는 이것을 “경계(boundary)”라고 표현한다. 그 경계를 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 규칙에 따르는 것이야말로,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반드시 필요한 요건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일상이 정말로 민주적으로 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6개의 동그라미 그림으로 요약했다는 점이 신기했을 뿐,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원칙들이었다. 억지로 민주주의적인 모습을 흉내내려 하지 말라니, 그처럼 당연하게 들리는 말이 또 있을까. 하지만 적어도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사람이 그 말을 직접 하는 걸 들을 때는 확실히 뭔가 달랐다. ‘아, 어쩌면 우리는 민주적인 행동과 양식들을 억지로 흉내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그러니까 굳이 저렇게 말로 해 주겠지.’
이런 순간이 있었다. 모두의 자기소개가 끝나고 모두가 자리에 앉자, 통역사와 청년허브 스탭들이 그에게 마이크를 넘겨 주며 앞으로 나올 수 있겠느냐고 청했다. 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상적 모습인가. 그러나 그는 그가 앉아 있던 평범한 참가자석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바로 마이크를 받아 3분 정도 굉장히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이루는 법에 대해 얘기하러 모였는데, 누군가가 앞에서 전문가가 되는 것은 좀 아니지 않겠느냐고.
아, 바로 이런 거로구나 싶었다. 어떤 모임이 정말로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조직된다면 누군가가 앞에 나가서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전문가 행세를 한다든가 하는 우리의 기존의 일상들은 많이 바뀌는 데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민주주의, 민주주의적 일상의 경험 그리고 그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지도 모른다. 당연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꼬박 세 시간 동안 상당히 진지하게 듣고 토론해야 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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